2019년 5월호

[인터뷰] 이정동 靑 경제과학특보 “혁신 핵심은 ‘평생학습’, 정부 정책 비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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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19-04-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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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 현장 바닥 이야기가 정책담론 침투해야”

    • “혁신 없으니 기존 파이 두고 전투”

    • “내수 중심이면 국가가 자꾸 수축”

    • “규제는 철폐·완화가 아니라 업데이트하는 것”

    • “규제 샌드박스 하려면 정부부터 스마트해야”

    • “확장 재정은 혁신 촉발 위해 써야”

    [이상윤 객원기자]

    [이상윤 객원기자]

    1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발표한 ‘신년사’에는 ‘혁신’이라는 단어가 자그마치 스물한 차례 등장했다. 그로부터 13일 후, 이정동(52)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가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에 발탁됐다. 경제과학특보는 전례가 없던 직책이다. 문 대통령은 이 특보에게 혁신성장에 관해 자문하기 위해 이 자리를 신설했다.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산업과 과학기술 분야를 아우르는 전문성과 식견을 바탕으로 혁신성장을 실현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인선 배경을 소개했다. 

    문재인 정부가 내건 혁신성장은 그간 ‘구체성이 없다’고 박한 평가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손꼽히는 기술정책·혁신경제 전문가인 이 특보의 발탁은 적잖은 화제가 됐다. 이 특보는 한국 산업계에 ‘축적’ 개념을 설파해 유명세를 탔다. 혁신은 끊임없는 시행착오에서 축적된 고도의 경험지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게 이 특보의 지론이다. 그래야 비로소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정의하는 ‘개념설계(Concept Design)’ 역량을 갖출 수 있다. 한국 산업은 개념설계 역량이 부족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야당 대표 시절 이 특보의 저서인 ‘축적의 시간’을, 집권 후에는 후속작인 ‘축적의 길’을 읽었다. 1월 30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 전체 직원에게 ‘축적의 길’을 선물했다. 4월 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에서 이 특보를 만나 문재인 정부가 새로 그린 혁신성장의 청사진을 가늠해봤다.

    경력자 창업

    문재인 대통령이 1월 30일 청와대에서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오른쪽), 이정동 경제과학특별보좌관과 오찬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월 30일 청와대에서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오른쪽), 이정동 경제과학특별보좌관과 오찬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청와대 특보 발탁 후 많이 바쁠 것 같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웃음) 제가 늘 관심을 두던 게 패러다임 전환인데요, 이 필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이런저런 데 다니려고 합니다.” 



    - 공학자인데 경제 필자로 관심 받았습니다. 서점에 가면 두 권의 책이 경제학 코너에 있더군요. 

    “저도 그게 참 신기해요.(웃음) 경제나 산업 이야기를 할 때 주로 매크로 지표를 많이 제시하잖아요. 가령 취업률이 얼마다, 성장률이 어떻다 등. 신문에 ‘뷰티풀하게’ 나오는 경제·산업 이야기와 내가 알고 있는 현장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괴리가 큰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10여 년 전부터 있었어요. 둘 사이를 좁히고 접목해야 할 것 같아 쭉 스터디를 해왔죠. 앞으로도 바닥에 있는 이야기가 정책 담론에 더 많이 침투해야 합니다.” 

    - 그간 대통령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대통령 개인이 아니라, 경제·산업 정책을 맡은 정부 일반에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조언을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주로 조언하는 내용이 혁신성장에 방점이 찍혀 있다고 전해지는데요. 

    “혁신성장,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기술혁신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특보는 “우리 산업에 신산업과 새로운 기업이 없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했다. 이는 곧 ‘21세기 한국이 어떤 산업을 육성할 것인지’의 논의로 귀결된다. 

    이와 관련 4월 3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한 ‘선진국형 서비스산업 발전 방향’ 정책토론회에서 서비스산업을 육성하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최대 1%포인트 올릴 수 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서비스산업 생산성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낮다는 이유에서다. 이 특보 생각은 다르다. 

    “서비스산업은 독자적으로 생존을 못 합니다. 지금 회자되는 서비스업은 아마 지식기반서비스업을 말하는 듯한데요. 이 역시 제조업과 함께 성장합니다. 지식기반서비스가 강한 국가 중 제조업이 약한 국가가 없어요.” 

    - 미국을 예로 들면서 지식경제 국가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잖습니까. 


    “페이스북, 구글은 기업가치가 크지만 막상 월스트리트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미국 경제가 겉으로는 ‘반짝반짝한’ IT(정보기술) 기업으로 굴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강력한 제조업들이 숨어 있죠. B2C(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가 아니라 B2B(기업 간 거래)가 미국 경제의 중심입니다. 서비스업이 무용하다는 건 아닙니다. 제조업이 경시된 상태에서의 서비스업 육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고수

    진보정부와 보수정부를 막론하고 마법의 힘을 발휘하는 단어가 청년 창업이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청년들을 대책 없이 위험으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해왔다.
     
    - 지난 10년간 청년 창업에 대한 환상이 과장돼온 건 아닐까요? 

    “청년 창업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문제는 청년 창업만이 유일한 창업대안인 것처럼 이야기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제가 ‘경력자 창업’이라는 단어를 썼어요. 나이로 보면 경력자 창업, 분야로 보면 ‘고기술 창업’입니다. 청년들이 고기술 창업을 하기는 어렵잖아요. 지금은 주로 청년들이 B2C 영역에 들어가 있죠. 창업의 방점을 청년보다는 경력자 쪽에 둘 필요가 있어요.” 

    이와 관련해 이 특보는 1월 30일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미국 창업자의 나이는 평균 40대 중반이고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하이테크 창업자 평균 나이는 50대”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앞으로 경력자 창업이라는 말을 써야겠다”고 화답했다. 

    - 고수의 존재를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려면 직장이건 업계건 오래 일해야 하지 않습니까? 노동개혁이 이뤄지지 않는 이상 청년 채용을 막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노동 문제는 혁신을 막는 원인이 아니라, 혁신이 안 돼 생긴 결과입니다. 혁신이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지 않으니 기존 파이를 나눠 먹기 위한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그걸(노동 관련 규제를) 푼다고 해서 혁신이 살아날 것인가? 아니죠. 성장하는 국가에서는 이런 문제가 잘 안 생겨요. 즉 우리가 궁극적으로 당면한 문제는 잠재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한 직장에 30년 다닌다고 고수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축적이 아니라 퇴적될 가능성이 도리어 높죠. 직장이 아니라 태스크(task)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하잖아요. 각 태스크 분야에서 나름의 개념설계를 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죠. 그런 환경에서 커온 사람이라면 연차가 5년이건 10년이건 고수라고 할 수 있어요.” 

    - 일한 기간이 곧 고수의 조건은 아니군요. 

    “그렇죠. 기자님도 대학 졸업 때까지 데이터, AI(인공지능) 같은 말 한마디도 못 들어보셨죠? 그런데 지금 산업 현장에서는 그런 물결이 나타나고 있잖아요.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40대 무렵에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감수성을 높일 수 있게 돕는 겁니다. 이를 학습이라고 합니다. 교(敎)와 육(育)은 답을 갖고 가르쳐주는 겁니다. 학(學)과 습(習)은 자기가 필요한 걸 스스로 찾아가는 거예요.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을 접해서 기존에 본인이 하던 일들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시도를 하는 거죠. 우리는 이런 환경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해야 합니다. 고수를 배양한다고 해서 가령 노동규약을 고쳐 오래 머물게 한다? 그건 아니에요.” 

    이 와중에 이 특보가 미국의 산업사(史)를 복기했다. 미국에서 IT기술이 발전해 산업 현장에서 컴퓨터와 로봇을 앞다퉈 도입할 때다. 기술은 진화했으나 정작 기업의 생산성이 오르지 않았다. 학계는 이를 ‘생산성 패러독스’라고 불렀다. 이 특보가 설명한 진단서는 이렇다. 

    “새로운 시스템을 쓰고자 하는 사람과 조직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평생학습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우리도 제조업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기술혁신 패러다임을 받아들이려 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신기술을 토대로 새로운 문제를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학 졸업하고 나서부터 80세까지의 기간이 중요해요. (하지만) 지금 정부 부처에 평생학습 정책이 사실은 비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대부분 복지 문제로 접근하죠. 산업을 업그레이드하려면 사람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한데, 그런 노력은 거의 없다고 봐야죠.”

    사람 업그레이드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의 저서 ‘축적의 시간’(왼쪽)과 ‘축적의 길’.

    이정동 청와대 경제과학특별보좌관의 저서 ‘축적의 시간’(왼쪽)과 ‘축적의 길’.

    - ‘사람 업그레이드’는 문재인 정부의 기조인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과 통하네요. 

    “그렇죠. 지금 대기업과 제조 현장에서 (구조조정 탓에) 나오고 있는 사람 상당수가 교육을 많이 받은 분들이에요. 현장 경험도 많이 쌓여 있습니다. 정작 나와서 사장(死藏)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분들이 회사 나와 호프집 열면 우리 산업에 축적된 기반이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 사회가 새롭게 축적도 해야 합니다만, 지금까지 쌓아온 축적도 활용해야 해요. 그분들이 학습을 통해 업그레이드되면 고수가 되는 거죠. 그러면 일부는 필히 창업을 할 겁니다. 그게 ‘경력자 창업’의 사례예요. 청년들이 창업하면 경력자들이 취업 안 하잖아요. 반면 경력자 창업으로 생긴 회사는 청년들을 고용하죠.” 

    - 혁신성장을 경제정책으로 한정할 게 아니라는 말로 들리네요. 

    “산업계가 그간의 관행을 일신하면서도 축적된 것을 버리지 않고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 그러려면 정부 부처 칸막이부터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혁신성장기획단이 만들어진 이유가 부처를 넘어서고 패러다임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서죠.” 

    문 대통령은 2018년 12월 18일 “비장한 각오로 제조업 부흥을 위한 제조업 르네상스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동시에 화두가 된 단어가 ‘스마트 팩토리’다. 생산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 품질과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이 특보는 “제조업 르네상스와 스마트 팩토리를 통해 혁신을 위한 노력을 기해야 하지만, 고용친화적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면서 이런 예를 들었다. 

    “콜센터의 경우 단순 직무잖아요. 콜센터에 AI가 도입되면 일하는 분들이 실직 위험 탓에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하지만 단순 직무를 AI에 맡기고 사람은 더 고부가가치의 일로 진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죠. 어차피 AI는 트레이닝 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존 직원들이 트레이너로 일할 수 있고, 그러다 고수가 되는 겁니다. 제조업 르네상스와 스마트 팩토리를 시도할 때도 어떻게 하면 일터에서 자존감을 보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 혁신성장을 두고는 기술의 문제로만 보는 경향이 짙죠. 

    “우리나라 물적 투자 수익률이 자꾸 떨어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 수익률을 누가 결정하나요? 똑같은 1억 달러를 써서 지은 실리콘밸리 공장과 한국 공장이 왜 각기 다른 결과물을 내놓습니까? 사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 이런 말을 대통령이나 정부 고위 당국자들에게도 전하겠습니다만, 사실 단임 정부 안에 결론 내기 힘든 문제 아닌가요? 

    “혁신성장에서는 정부(의 차이)를 반드시 넘어서야 합니다. 누구라도 승계, 발전시켜야 해요. 대통령 포함해서 우리 사회 의사결정 라인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산업혁신의 문제에서만큼은 비정치화가 필요합니다.”

    중국의 기술굴기

    - 보수정당 소속인 유승민 의원도 ‘축적의 시간’을 추천했더군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술혁신 문제에서만큼은 좌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 야당 의원들이 만나자거나 자문을 구해오는 일이 있나요? 

    “지난해까지는 국회 가서 여야 가리지 않고 이야기했어요. 지금은 그런 기회는 잘 없네요. 기회만 되면 (여야 가리지 않고) 자꾸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혁신성장의 절박감을 자극하는 주체는 아무래도 중국이다. 중국의 ‘기술 굴기’가 심상치 않다. 4월 7일 산업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AI와 바이오헬스, 자율주행차 등에서 한국의 산업 경쟁력이 중국보다 낮다고 꼬집었다. 혁신성장을 내건 정부가 집권했지만 아직 역량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 특보는 “2019년은 패러다임이 전환되지 않으면 죽는 시기다. 중국 때문”이라고 경고했다. 

    - 중국은 막대한 내수시장을 바탕으로 자본의 전폭적 지원 속에서 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중국과 제대로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중국을 ‘거대시장’으로 읽곤 하는데요, 실은 ‘다양한 시장’이라고 읽어야 정확합니다. 중국에서 AI칩과 빅데이터가 활성화되고 있는데, 수요가 다양한 덕이거든요. 즉 고급한 수요와 저급한 수요를 망라하는 겁니다. 심지어 말도 안 되는 가전제품 만들어 뭔가 해보겠다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제품도 공급해보고 때로 사고도 겪으면서 시행착오가 쌓이는 겁니다.” 

    - 휴대전화만 해도 최고급 제품과 싸구려 제품이 다 있죠. 

    “심지어 오토바이 만드는 데가 300군데라는 것 아닙니까.(웃음) 그중 허접한 오토바이는 (시장에서) 안 팔려요. 하지만 안 팔리는 경험을 해보는 것, 그것이 중국 시장의 장점이죠. 왜 중국 선전으로 사람들이 몰리겠습니까. 선전에 여러 수요를 충족해줄 클라이언트들이 있기 때문이거든요. 중국은 다양성의 바다입니다.” 

    이 특보가 산업계에 유행시킨 또 다른 단어가 ‘스케일업(scale up)’이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아이디어를 사업화 단계까지 키워가는 과정을 뜻한다. 3월 6일 정부가 발표한 ‘제2 벤처 붐 확산전략’에도 ‘스케일업 전용펀드 조성’이라는 항목이 포함됐다. 이 특보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지점. 그는 “5000만 명 시장이 작지는 않지만 스케일업을 충분히 이뤄낼 만큼의 규모는 아니다”면서 “무조건 글로벌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우리와 가장 가까운 글로벌이라면 중국인데요. 중국 말고 어디로 가야 합니까? 


    “중국이 15억 명으로 실험하고 있으면 우리는 남미 시장에도 가보고 해야죠.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하이엔드’ ‘로엔드’ 제품을 다양하게 만들어 자꾸 시행착오 겪어봐야죠. 과거 개발도상국 중 많은 나라가 비슷한 수준에서 출발했습니다. 그중 수출 시장을 시행착오의 무대로 활용한 나라 대부분이 성공했어요. 내수 중심으로 큰 나라는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현대가 해외에서 포니를 처음 팔았을 때 얼마나 욕먹었습니까. 그러면서 선진국 소비자에게 한 소리 듣고, 그러면 또 고치면서 큰 거거든요. 그건 교과서에 없는 거예요. 기술혁신 관점에서 글로벌 시장을 활용해야 합니다. 내수 중심이면 국가가 자꾸 수축하게 됩니다. 지금은 발산해야 할 때입니다.”

    규제는 플랫폼

    [이상윤 객원기자]

    [이상윤 객원기자]

    - 일각에서는 규제가 많아 혁신성장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규제는 도리어 시행착오를 많이 할 수 있게끔 하는 결정적인 플랫폼이죠.” 

    - 규제가 플랫폼이다? 

    “규제혁신, 규제완화 이런 단어를 많이 씁니다. (하지만) 규제혁신이 아니라 ‘비즈니스의 실험장을 넓힌다’고 표제를 잡아야 할 것 같아요. 규제완화, 규제철폐라는 단어는 결국 규제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잖습니까. 하지만 기술은 반드시 규제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규제가 없어지면 기술도 없는 거예요. (규제는 기술의) 그림자와 같습니다. (특히) 기술 발전과 규제 발전이 공진하면서 가야 해요. 즉 ‘규제 프리’가 아니라 ‘규제 업데이트’입니다. 한번 해보고 어떤 일이 생기는지 보고 업데이트하자는 겁니다. 마치 옷을 줄였다 늘렸다 수선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혁신성장을 위한 도구 중 하나로 ‘규제 샌드박스’를 시행하고 있다. 신기술을 활용한 서비스가 나오면 일정 조건 아래 규제를 풀어주고, 시장 출시도 할 수 있도록 임시 허가를 내주자는 취지다. 특정 지역·공간을 지정해 규제를 풀어주는 ‘규제프리존’과는 결이 다르다. 정부는 1월 17일 규제 샌드박스 1호로 수소차 충전소 설치를 허용했다. 문 대통령의 혁신성장 멘토인 이 특보가 보는 규제 샌드박스의 도입 의의는 독특하고 흥미로웠다. 

    “규제 샌드박스는 ‘이번에 유전자 검사를 허용해주겠습니다’ 이게 아니에요. 기존 규제가 없거나 미비하면 (사업을 시행해) 실험해가면서 어떻게 바꿀지 같이 살펴보자는 겁니다. 말하자면 규제 샌드박스는 ‘지금부터 게임이 시작된다’는 거예요. 신기술에 있어 우리 사회가 체크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실험을 같이 해나가는 겁니다. ‘모든 걸 해보는 것’이 아니라 ‘해보면서 규제를 고쳐나가는 것’이거든요. 똑똑한 정부만이 스마트하게 규제할 수 있어요.” 

    - 공무원이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기술 감수성을 키워야겠네요. 

    “규제 샌드박스를 계기로 정부가 더 스마트해질 수 있습니다. 이게 중요한 포인트 같아요.” 

    - 우리 사회에는 경제는 민간에 맡기라는 주장이 많은데, 정부와 민간이 협업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군요. 

    “그럼요. 미국 보세요. 자율주행차 키우면서 업계와 정부가 논의해 안전 규정을 만들어가고 있거든요. 우리도 규제 업데이트를 제대로 하기 위한 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아주 스마트한 정부가 인증, 실증할 수 있는 공공 인프라가 상당히 중요해요.”

    확장재정과 슘페터

    2016년 6월 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업문화와 기업경쟁력 컨퍼런스에서 주제 발표하는 이정동 서울대 교수. [뉴스1]

    2016년 6월 1일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기업문화와 기업경쟁력 컨퍼런스에서 주제 발표하는 이정동 서울대 교수. [뉴스1]

    이 특보는 1월 30일 문 대통령을 만나 재정확장 정책에 대해 “주머니를 키우는 건 케인스식으로 하고, 쓸 때는 슘페터식으로 혁신적으로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혁신적 기업가가 신제품과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도전하는 메커니즘을 품고 있다고 간파한 학자다. 이 특보와의 문답이다. 

    - 문재인 정부는 확장재정 기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재정으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다는 반박도 나옵니다. 

    “혁신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정부 재정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정부가 직접구매로 조달청을 통해 쓰는 돈만 100조 원이 넘습니다. 이런 돈을 더 혁신적인 기술을 채택하는 데 써야 합니다. 정부 재정을 간접적으로 쓸 수 있는 곳도 많잖아요. 한전, 도로공사, 우체국 어디 한두 군데입니까. 그러면 판교 등에 있는 기술기업들이 정부 사업에 참여해보겠다고 밤낮없이 덤벼들 겁니다. 정부는 공공사업 입찰 제품의 기술 요구 수준을 크게 높여 판교에 있는 기술기업들이 ‘(어렵지만)도전해보겠다’는 마음과 자세가 들도록 만들어줘야죠.”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은 4월 8일 ‘세계 최초 5G 상용화, 대한민국이 시작합니다’ 행사 기념사에서 “5G와 같은 혁신적 신기술에서 신산업과 일자리가 만들어지려면 정부가 선도적으로 다양한 시범·실증사업을 통해 초기 시장을 만들어주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특보가 부연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기업에 근육이 하나씩 붙어갈 겁니다. 그 기업들이 해외에 납품할 때 상대 측에서 ‘어디 납품해봤어요?’ 물으면 ‘한국 행정자치부 사업에 참여해 동사무소에 제품 1만 개 깔아봤다’ 이렇게 답할 수 있죠. 수출에 큰 도움을 주는 엄청난 레퍼런스거든요. 그것이 재정을 슘페터식으로 쓰는 겁니다. 애플도 그렇게 컸어요. 미국 교육부가 애플 컴퓨터를 초등학교에 안 깔아줬으면 일찍이 망했어요. 즉 정부는 시행착오의 모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재정을 그렇게 활용해야죠.” 

    - 우리나라 조선 산업도 만들어보지 않은 형태의 선박 주문이 들어왔을 때 맞부딪치고 도전하면서 성장했다고 하더군요. 

    “중국이 마찬가지 방식을 활용하고 있어요. 중국 정부가 중국 조선사에 자꾸 해양플랜트를 발주하고 있습니다. 중국 조선사가 처음에는 허접한 제품 만들다가 지금은 일정 부분 설계 단계까지 올라섰어요. 이게 공공부문이 기술혁신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입니다. 중국 AI 기술은 공안 덕에 발전했습니다. 범인 잡기 위해 AI를 활용하려 했는데, 그 사업에 참여해보려고 민간에서 열심히 개발하고 납품했습니다. 지금 그 기업들이 해외에 진출할 때 중국 정부에 납품했다는 사실을 레퍼런스로 씁니다.” 

    - 재정을 그렇게 똑똑하게만 쓴다면야 굉장한 혁신국가가 될 수 있겠네요. 

    “그럼요. 민간부문의 시행착오를 지원해주는 효과도 있지만, 정부가 더 스마트해지는 효과도 있죠. 또 지금 동사무소나 우체국 수준보다 훨씬 높은 서비스를 받게 될 테니 국민으로서도 효과를 누릴 수 있죠.”

    “New to the World, 안 해본 것 해야”

    밖으로는 중국이 위협이다. 안으로는 반도체 수익 낙폭이 위기감을 키운다. 그간 한국 산업 혁신의 총아였던 메모리 반도체의 수익성이 뒷걸음질 쳤다. 삼성전자의 1분기 영업이익은 6조2000억 원으로 시장 예상치를 밑돌았다. 이 특보는 “반도체업계 내부에서 차세대 먹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면서 “꼭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도체가 아닌 새로운 싹을 찾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바이오산업에 상당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대학에서 바이오 관련 학과를 많이 키웠어요. 바이오산업 기반이 별로 없을 때니 당시 졸업한 사람들은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러니 유학을 많이 갔는데 덕분에 인적 기반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IT가 쇼트 사이클 산업이라면 바이오는 롱 사이클(진입장벽이 높아 후발주자의 추격이 쉽지 않은) 산업입니다. 벌써 우리나라에 2조 원의 시장가치를 평가받은 회사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 청와대 특보로서 남은 문재인 정부 기간 어떤 점에 방점 찍고 자문에 응할 계획인가요? 


    “국가가 산업을 바라보는 정책적 시각이 크게 보면 두 번쯤 바뀌었어요. 1960~80년대에는 땅, 기계, 외자 도입을 통해 전략산업을 키웠어요. 1980년대 중반 R&D(연구개발) 개념이 (한국에) 처음 등장합니다. ‘디스플레이를 하자’ 그러면 이에 필요한 R&D를 집중 지원하자면서 인력 양성했죠. 선진국이 하는 걸 보고 일정하게 영토가 마련된 곳에 뛰어들었어요. 지금은 선진국 산업 중 우리가 잘할 것 같은 걸 뒤따라 하려 해도 중국이 더 잘합니다. 이제는 ‘New to the World’, 전 세계가 안 해본 것을 해야 합니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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