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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 정재민|전 판사·소설가

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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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 열정 사이   -증거조사 절차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천후이린 주연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 (2001)[동아일보 DB]

이 글은 주말 오전 우리 아파트 단지에 있는 작은 북카페 유리벽 앞에 앉아서 쓰고 있다. 이곳은 나를 늘 행복하게 만든다. 마음속으로 내 아지트라 찜해둔 곳이다. 눈앞에는 싱그러운 연초록 나무들로 둘러싸인 농구장 안에서 어린아이와 아빠가 캐치볼을 즐기고 있다. 혀로는 입술에 묻은 카푸치노 거품을 훔치며 코로는 향긋한 커피향을 즐긴다.

서가에는 작가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책이 가득 꽂혀 있다. 귓가에는 피아노, 기타, 첼로가 주연인 음악이 시냇물처럼 잔잔히 흐른다. 손가락은 꼼지락거리며 내 마음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노트북에 적는다.

눈으로는 험악한 사건 기록을 읽고, 귀로는 양측의 가시 돋친 말다툼을 듣고, 입으로는 피고인의 죄를 따지고, 손으로는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한다”고 적던 법정에 있을 때와는 기분이 천양지차다. 법정에서도 재판 전에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을 수는 없는 것일까. 방청석에 커피나 과자도 좀 내놓고. 내친김에 좀 더 멋대로 상상해보자면, 사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재판 시작 전에 판사가 방청석에 가서 커피도 한잔 마시며 담소도 나누고.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을 할 때에는 재판관들이 양국 당사자들과 재판 전에 저녁을 함께한다고 들었다(물론 국가 간 소송과 국내 소송이 같을 수는 없다). 유별나다고 뒷말을 듣더라도 사표 내기 전에 저질러봤어야 했나. 비현실적이라는 걸 안다. 현실적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생길지도. 그래도 가끔은 괜찮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문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그것을 감수해야 새로운 경험이라는 보상을 얻는 것 아닌가.

피렌체와 밀라노 사이

그저께는 별안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4년 전 개봉한 일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를 다시 찾아서 보았다. 한때 연인이었던 준세이(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아오이(천후이린)가 헤어진 후 각자 인생을 살아가다가 아오이의 서른 살 생일 때 피렌체 두오모 꼭대기에서 만나자던 10년 전 약속을 지킨다는 내용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가 왜 뜬금없이 이 영화가 보고 싶어졌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제음악 ‘더 홀 나인 야즈(The whole nine yards)’가 북카페에서 되풀이해 들리던 음악이었다.

14년 전에는 눈가가 촉촉해졌는데 이제는 도무지 그들의 로맨스에 몰입되지 않았다. 10년간 옛사랑을 못 잊는 것도, 10년 전 약속을 지키는 것도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20대 청년의 열정은 사라지고 40대 아저씨의 냉정만 남은 것이다. ‘냉정’도 과분하고 ‘냉정과 냉소 사이’에 가깝다. 14년 전엔 못 봤지만 이제야 흥미로워서 유심히 본 대목도 있다. 시간적 상징의 대칭이다.

준세이는 뒤를 보고 서 있다. 과거에 고착돼 있다. 역사의 도시 피렌체에서 명화를 복원하는 일을 한다. 다른 여자를 만나도 옛사랑 아오이를 잊지 못한다. 반면 아오이는 앞을 보고 걷는다. 현실적이다. 미래를 쳐다보며 오늘을 산다. 그녀는 준세이를 잊고 부유한 새 남자친구와 결혼을 준비한다. 패션과 상업의 도시 밀라노에 있는 보석상에서 일한다. 보석은 미래에도 끄떡없이 유지되는 가치를 상징한다.

판사 일을 하다가 관료(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 일을 시작한 지 다섯 달. 법원과 행정부는 피렌체와 밀라노만큼 서로 달랐다.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본질적 원인은 바라보는 시간의 방향 차이였다. 판사 때 주로 뒤를 돌아보고 서 있다가 관료가 되면서 앞을 보고 달리는 방향 전환을 겪은 것이다.

판사의 시간은 과거 사건 발생 시점에 고착돼 있다. 사람들 대부분이 함께 타고 올라가는 시간이라는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걸어 내려가면서까지 그 사건 발생 시점에 천착한다. 관료에게 사건은 도플러 효과를 일으키는 기차다. 기적소리는 기차가 다가올 때 높게 들리다가 기차가 지나쳐 멀어지면서부터는 낮게 들린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를 두고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일단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은 이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진다.

사건을 말(馬)에 비유하자면, 판사가 다루는 사태는 죽은 말이다. 판사는 돋보기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서 말이 죽은 원인을 차분히 분석한다. 반면 관료가 다루는 사건은 달리는 말이다. 부러 사건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판사와 달리 관료는 사건 속에 뛰어든다. 말 등에 올라탄 것이다. 양옆으로는 현재가 쉭쉭 지나쳐가고 정면에선 예측 못한 풍경이 들이닥친다. 등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현재의 온몸이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데 끝없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고삐를 어디로 당기느냐에 따라 미래에 전개될 양상이 확연히 달라진다.

판사는 준세이의 직업인 유화복원사를 닮았다. 재판은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다. 살인사건 당시의 5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 몇 년이고 재판하는 것을 보면 준세이가 이탈리아 화가 치골리의 작품을 오랜 시간 복원하는 장면이 겹쳐진다. 복원을 위해 복원사가 물감과 끌, 확대경을 사용한다면 판사는 증거와 논리와 언어를 사용한다. 복원사의 작업이 공방에서 이루어진다면 판사의 과거 복원은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재판 절차 중에서도 주로 증거조사 절차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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