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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랴오닝성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遼 | 전쟁과 교류의 두 얼굴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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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랴오닝은 이민족에겐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 중원을 기습하는 근거지였고, 한족에겐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요충지였다. 수많은 공방전 속에 주인도 수시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땅, 조선과 중국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땅,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를 축적한 무역의 땅이기도 했다.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금강산(錦江山) 공원의 금강탑에서 바라본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 고층 빌딩과 허허벌판이 양국의 국력차를 보여준다.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은 작은 도시다. 인구는 244만 명, 도시권 인구는 86만 명이지만, 중국은 행정구역을 넓게 잡기 때문에 시내 중심부를 거닐어보면 한적함을 느낄 수 있다. 사람 많고 땅 넓은 중국을 돌아다니다 단둥에 오니 도시라기보다 시골 읍내 같다.

시 중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압록강이 나왔다. 강 건너로 북한 신의주가 보였다. 순간 ‘촌동네’ 단둥은 뉴욕 맨해튼 중심가처럼 보이고, 신의주는 캄보디아 시골 마을 같았다. 중국에서는 매우 작고 초라한 도시지만 북한과 비교하니 빌딩 숲이 즐비한 초현대식 도시로 보였다. 그나마 신의주는 중국과 교류하며 제법 발전된 국경 관문도시이고, 당성(黨性)이 우수한 인재들이 와서 견학·관광을 하는 곳이다.

밤이 되니 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단둥 압록강변은 가로등이 휘황찬란하게 빛났고,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커다란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고 왁자지껄 떠들며 산책을 했다. 반면 신의주 쪽은 불빛 몇 개만이 성글게 켜졌고, 지독히 적막하고 고요해 유령 마을처럼 보였다. 필자의 미숙한 수영 실력으로도 마음만 먹으면 헤엄쳐 건널 수 있을 듯 가깝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멀고 멀어 遼寧

영원히 걱정하고기억하는 땅
조선시대 사신단이 오간 길도 바로 이곳이다. 연암 박지원은 명색이 국가의 공식 사절단이었지만, 넉넉잖은 출장비를 쪼개 쓰느라 제대로  먹지도 못한 듯하다. 박지원은 만상(灣商, 의주 상인)의 밥상을 부러운 듯 묘사한다.  

“만상 패거리는 자기들끼리 한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시냇가에서 닭 수십 마리를 씻고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고 나물을 볶으며 밥알은 자르르 윤기가 나는 것이 일행 중에서 가장 푸짐하고 기름졌다.”

만상은 청나라와 무역하며 큰돈을 벌었다. 그들의 밥상은 공무원인 연행사(燕行使)보다 훨씬 풍성했다. 그토록 부유했던 이들의 후예, 의주보다도 더 중국에 가까운 신의주가 오늘날 저토록 초라한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요동, 랴오닝에 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랴오닝성의 약자는 ‘멀 요(遼)’ 자다. 얼마나 먼 곳이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고대 중국의 중심 허난성 뤄양(洛陽)에서 랴오닝의 중심 랴오양(遼陽)까지는 1600여km나 된다.

랴오닝 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조조의 참모 유엽의 말처럼 “물길로 가려 하면 바다가 있고, 육로로 가려 하면 산으로 막혔다”. 대흥안령 산맥과 발해가 중원과 랴오닝을 갈라놓는다. 거대한 강 요하(遼河)가 요서와 요동을 나누고, 강 주변에는 광활한 늪지대 요택(遼澤)이 펼쳐져 지극히 험난한 길이었다.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러 요택을 건널 때 종군한 병사들의 해골이 끝없이 이어져 벌판에 널렸고, 당태종이 고구려를 원정할 때도 동서 200리 진창을 메워 길과 다리를 만드는 토목공사를 한 후에야 진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원의 손이 닿기 힘든 이 곳엔 여러 부류의 종족이 살았다. 고조선·부여·고구려를 세운 예맥계와 발해·금·청을 세운 숙신계(말갈·여진), 삼연(三燕)·요·원을 세운 동호계(오환·선비·거란·몽고), 한족 중국계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살았다. 이들은 작게는 요동과 만주의 패권을 장악했고, 크게는 중원을 차지했다.

랴오닝은 중국 밖 세력에는 중원의 간섭을 받지 않고 힘을 키우다가 중원을 휩쓸기 좋은 근거지였고, 중국에는 중원을 지키고 요동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자연스레 이 땅에서 수많은 공방전이 일어나며 주인이 수시로 바뀌었다. 그래서 박지원은 말했다.

끊이지 않은 북소리, 징소리

“아하!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 천자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천하가 편안한지 위태로운지는 항상 요동 들판에 달려 있었다. 요동 들판이 편안하면 나라 안이 잠잠하고, 요동 들판이 시끄러우면 천하에 전쟁이 일어나 일진일퇴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번갈아 울렸음은 무엇 때문인가. 진실로 1000리가 툭 터진 이 평원과 광야를 지키자니 힘을 모으기 어렵고, 버리자니 오랑캐들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대문도 마당도 없는 경계인 것이다. 이것이 중국엔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하는 땅이 되는 까닭이며, 천하의 힘을 다 기울여서라도 지켜야만 천하가 안정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랴오닝이 전쟁터였던 것만은 아니다. 여러 민족이 만나고 교류하는 길, 조선과 중국의 사신이 오가는 연행사의 길, 의주 상인 만상이 큰 부(富)를 축적한 무역의 길이었다.

랴오닝은 이처럼 거리적, 지형적, 민족적, 문화적으로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만들어왔다. 5500년 역사의 요하 홍산문화(紅山文化)는 4000년 역사의 황하문명보다 앞선다. 예맥계의 고조선을 필두로 여러 유목민 세력이 살던 랴오닝에 처음 손을 뻗은 중국 세력은 연나라다. 연소왕의 명장 진개(秦開)는 동호의 1000리, 고조선의 2000리 영토를 정복했다. 진·한 초기에는 중국계와 유목민족 세력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뤘으나, 한무제 때 한의 국력이 절정에 이르자 사방으로 정복사업을 펼쳤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후 중국계 세력이 랴오닝에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후한 말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탐관오리는 백성을 쥐어짰고 군대는 약했다. 머나먼 변경에서 착취에 시달리던 이민족들은 자연스레 반란을 일으켰고, 조정은 토벌군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변방 지역부터 군벌들이 등장한다. 서량(간쑤성)에 동탁, 마등, 한수 등의 군벌이 나타났듯, 요서에는 공손찬, 요동에는 공손도가 실력자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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