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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식의 考古野談

1915년 여름 백제왕가 공동묘지서 만난 도쿄제대 교수 2명은 왜?

식민지 고고학의 탄생

  •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1915년 여름 백제왕가 공동묘지서 만난 도쿄제대 교수 2명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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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여름 백제왕가 공동묘지서 만난 도쿄제대 교수 2명은 왜?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김태식 제공]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출토품 중에 금동투조금구(金銅透彫金具)가 있다. 투조란 주로 납작한 목재나 금속판을 뚫는 장식 기법을 말하며, 금구란 금붙이를 말한다. 따라서 뚫음무늬 장식을 한 금동판을 뜻한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 금속 유물은 높이 8.7㎝, 너비 7.0㎝로, 1915년 여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라는 당시 일본 도쿄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가 능산리 고분군 중에서도 중하총(中下塚)이라는 무덤을 발굴해 수습한 것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에 포함돼 2015년 여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이름을 올린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도읍기(536~660) 백제시대 왕가의 공동묘지로 간주되는 곳이다. 현재는 봉분 7기가 작은 산 남쪽을 바라보는 기슭에 한 무리를 이룬다. 한가운데 꼭짓점에 해당하는 곳에 무덤 하나가 있고, 그 아래쪽 전면으로 무덤 3기씩이 동서 방향으로 두 열을 이룬다. 그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아래쪽 동쪽이면 동하총(東下塚), 위쪽 줄 중앙에 있으면 중상총(中上塚), 위쪽 줄 서쪽에 있으면 서상총(西上塚)이라 구별하곤 한다.

꼭짓점에 해당하는 맨 위쪽 고분은 1970년대 이 고분공원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발견돼 7호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들 7기 고분은 현재 제법 큰 봉분을 갖춘 상태지만, 이는 최근 정비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백제시대에는 봉분이 아주 낮고 작았다. 

지금은 백제가 남긴 유산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명소가 된 능산리 고분군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과 같은 ‘문화재’로 세상에 알려졌을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1915년 여름을 주목하게 된다. 이때 공교롭게도 같은 도쿄제대 교수 2명이 각기 조사팀을 이끌고 같은 시기에 같은 능산리 고분군에 나타났다. 이들의 이상한 만남에서 백제왕가의 공동묘지는 비로소 속살을 드러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세키노였다. 1902년 이미 대한제국 곳곳을 답사하며 문화재를 조사한 세키노는 한국 병합 이후에도 식민지 조선고적조사에서 실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금동투조금구는 그가 능산리 고분군을 발굴해 그곳에서 수습한 백제시대 왕릉 유물 중 하나다.  



세키노라는 이름의 등장

1915년 여름 백제왕가 공동묘지서 만난 도쿄제대 교수 2명은 왜?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금동투조금구.[김태식 제공]

그가 이 유물을 찾아낸 중하총은 양식으로 보면 남북 방향으로 긴 평면 직사각형 석실 앞에 무덤길인 연도(羨道)를 별도로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에 속한다. 단면에서 보면 천장을 안쪽으로 기울게 만들고 덮개돌을 올렸다. 이미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이곳에서는 그 외에도 목관 조각과 금동제 관못, 금동제 관장식 금붙이 등이 수습됐다. 금동투조금구의 기능에 대해서는 논란이 없지 않지만, 모자의 일종인 관모(冠帽)의 전면 장식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 유물을 세키노는 어떤 계기로 발굴하게 됐을까.

1915년 11월에 나온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 제194호에는 세키노가 쓴 ‘백제의 유적’이라는 글이 실렸다. 이에는 본문 시작에 앞서 주제와 관련되는 사진 2장이 수록됐으니, 개중 하나가 바로 그해 여름, 세키노 자신이 능산리 고분군에서 발굴한 금동투조금구이며, 다른 하나가 이 무덤 석곽 내부 장면이다. 이 논문 서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지난 메이지 42년(1909), 한국 탁지부(度支部) 촉탁을 받아 야쓰이(谷井) 문학사·구리야마(栗山) 공학사와 더불어 백제 고도인 공주와 부여의 유적을 조사한 일이 있지만, 금년(1915) 7월, 야쓰이 문학사 및 고토(後藤) 공학사와 더불어 조선총독부 촉탁을 받아 다시 부여에 이르러 그 일대를 답사하고…이번에는 처음으로 분묘 발굴을 시도한 결과 당시 분묘 양식도 분명히 알게 되고 또 부장품이나 성벽 유적 출토 옛 기와의 문양이 크게 우리(일본) 나라(奈良)시대의 그것과 친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됐다.”

세키노가 말하는 1909년 조사란 세키노가 도쿄제대 공학부 건축학과 제자인 구리야마 준이치(栗山俊一)와 같은 도쿄제대 국사학과 출신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를 데리고 그해 9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조선고적조사를 말한다. 하지만 그 성과가 시원치 않았음을 다음의 세키노 글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지난 메이지 42년에는 겨우 이틀간만 허락받은 데다 눈까지 내리기 시작해 고분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 후 부여-논산 간 신작로 개설에 즈음해 처음으로 능산리 산상에 고분 석곽이 다수 노출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올해에 이르러 마찬가지로 능산리에 왕릉이라 부르는 고분이 있음을 알게 됐다. 한데 지금까지 이 왕릉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이 부근에 최씨라는 양반이 있었고, 지방 세력가로서 이 왕릉 부근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으므로 만약 왕릉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려지면 결국 그 가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어 그 세력을 이용해 그곳 주민들에게 왕릉에 관한 일을 오래도록 비밀에 부치도록 엄명했다고 해서 오래도록 누구도 알지 못하고 지났지만, 우연한 일로 문득 군청에서 하는 말을 들어 세간에 알려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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