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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평양 사내 이충백傳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평양 사내 이충백傳 식인귀와 함께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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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함락된 평양성을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탈환하는 내용을 병풍에 그린 ‘평양성탈환도’. 작자 연대 미상. [출처 우리역사넷]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함락된 평양성을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이 탈환하는 내용을 병풍에 그린 ‘평양성탈환도’. 작자 연대 미상. [출처 우리역사넷]

고니시 부대가 물러간 뒤 평양에서 임진년 전쟁이 끝났다. 성엔 평화가 찾아왔다. 1601년생인 이충백(李忠伯)에게 전쟁은 낯선 과거여서 잠자리에서 듣는 무서운 얘기로 여겨질 뿐이었다. 평양성을 차지하고 조선 백성들을 주륙했다는 왜군에 대한 전설은 대동강 강물소리 속으로 잦아들다 어느덧 사라져 버렸다. 반도 남쪽을 불구덩이로 만든 정유재란 직후 생겨난 이상한 역병이 10여 년에 걸쳐 서서히 북상하다 마침내 평안도에 출현했을 때 이 짧고 달콤했던 평화의 간빙기가 멈췄다. 

그걸 본 건 1615년 늦봄이었다. 충백은 평양성 서쪽 주작문 부근의 성벽을 보수하는 데 동원돼 노역하던 중이었다. 점심으로 배급된 주먹밥을 먹으며 보통강을 바라보던 그는 교묘하게 뒤틀린 동작으로 강가를 걷는 상인 무리에 주목했다. 한양이나 개성에서 온 상인패들은 주로 배를 타고 대동문 앞에 접안해 성안으로 들어가는 게 상례였다. 보통강 쪽에서 나타난 무리라면 장사치로 위장한 도적 떼가 분명했다.


사람을 먹어치우는 도적

성벽을 뛰어내린 충백은 바람처럼 내달려 상인 무리가 처음 나타난 지점 주변을 탐색했다. 그들이 도적 떼라면 뭔가 값나가는 물건을 흘리고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강변을 헤매던 충백의 눈에 타다 남은 잉걸불에서 피어나는 연기가 보였다. 흙으로 잔불을 끄고 풀숲을 뒤지던 그는 경악하며 뒤로 쓰러졌다. 몸통에서 분리된 사람 머리가 보였다. 

충백의 집은 칠성문 밖에 있었다.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끈질기게 이어진 전투로 폐허가 된 평양성은 여전히 복구 중이었고 반으로 준 성의 인구는 좀체 늘지 않았다. 만성화된 기근과 창궐하는 질병이 번갈아 엄습하고 나면 줄초상은 예사였다. 그나마 전쟁이 없었기에 민초들은 암석에 달라붙은 기생식물처럼 잔뿌리를 뻗어 삶을 움켜쥐고 버텼다. 

감영 소속 석공으로 간신히 입에 풀칠하던 충백 아비는 유일한 혈육인 아들과 성곽 귀퉁이에 움막을 짓고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는 늦은 밤 귀가한 아들 충백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냥 무시할 수도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간나들이 인육을 먹었단 말이니? 전쟁이 끝났는데도?” 

아비의 말 뒤끝이 수상했던 충백이 팔짱을 끼고 되물었다. 

“아바이. 기럼 전쟁 통엔 사람끼리 잡아먹었단 말 아이요? 기게 사실입네까?” 

한참 말이 없던 아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기래. 살기 위해선 기래야 했디. 왜놈들이 몬저 시작했디만.” 

그날 밤 이후 충백은 허리춤에 단검을 숨기고 사방을 경계하며 다녀야 했다. 성안에선 간간이 실종되는 사람이 나왔고 사람 먹는 식인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울산성을 점령했다 고립된 가토 부대원들이 조선군 시신을 먹은 데서 유래한 식인병이 삼남 일대로 은밀하게 퍼져나가다 한양을 거쳐 평양에까지 이르렀다는 얘기가 돌았다. 중앙 조정으로부터 오랜 세월 차별받던 서북도민들은 한양에서 온 사람들을 무조건 증오했고 민심을 진무하려 파견한 관원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서로를 식인귀로 오해한 살인이 난무하고 관군들조차 야간 순찰을 두려워하자 평양성을 지키기 위한 비밀자경단이 조직됐다. 평양 토박이로만 구성된 이 조직에 가입한 충백은 발군의 싸움 실력으로 패두의 신임을 얻었다. 특이하게 살짝 쩔뚝대는 걸음걸이만으로 식인귀를 간파해내는 재주가 있던 그는 늘 선봉에 섰고 매일 밤 살인하지 않고는 잠들지 못하는 지경에 빠졌다. 살인중독이었다. 급기야 평양 사람들은 식인귀보다 충백을 더 두려워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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