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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왜 김환기에 주목하는가

마크 로스코의 뉴욕에 김환기 또한 있었다

  • |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 kim@ksuart.co.kr

세계는 왜 김환기에 주목하는가

  • ● 한국 근현대미술 최고가 ‘붉은 점화’의 신화
    ● 이중섭, 박수근에게는 없는 김환기의 ‘보편성’
    ● 점 하나 찍는 행위에 의미, 잭슨 폴록 일맥상통
    ● “그림 가격은 곧 國格”
5월 27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최고가(85억3000만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x202cm, 1972) (오른쪽)

5월 27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최고가(85억3000만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x202cm, 1972) (오른쪽)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202cm, 1972)가 5월 27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85억3000만 원에 낙찰됐다.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최고가격이다.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가격 톱 10에는 김환기 작품이 8점 들어 있다. 이외에는 이중섭의 ‘소’가 47억 원으로 6위,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 2500만 원으로 8위에 랭크돼 있다.
 
미술에서 가격과 순위는 의미가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은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수요와 공급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예술적 평가, 시대정신, 트렌드, 국민 정서, 경제 상황 등 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이다. 작가나 작품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어떠했느냐는 지표를 단 하나만 제시하라면 가격이 될 수밖에 없다. 가격은 자본주의 병폐를 피할 수 없고, 또 유일한 기준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한 기준임은 부인할 수 없다.


김환기가 독점한 ‘Top 10’

전면점화를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화백의 생전 모습.

전면점화를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화백의 생전 모습.

김환기(1913~1974), 이중섭(1916~1956), 박수근(1914~1965). 세 사람은 작품 가격이 말해주듯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굴곡진 삶을 살았다. 같은 시대를 살되, 삶의 무늬는 저마다 달랐으며, 이는 그대로 작품에 반영됐다. 셋은 모두 우리 고유의 정서를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언어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평안남도 평원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건너가 분카학원(文化學院) 미술과에서 공부했다. 일제강점기, 여유 있는 집안 미술지망생들의 발길은 대부분 일본으로 향했다. 이중섭은 거기서 마사코(山本方子·후에 이남덕으로 개명)를 만나 해방되던 해에 결혼, 원산에 정착했다. 

6·25전쟁 발발로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부산, 제주도 서귀포로 피난했다. 그러나 생활고를 견딜 수 없었던 이중섭은 이남덕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한국에 남아 부산, 통영 등지를 떠돌며 홀로 지낸다. 이후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절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집요하게 그렸다. 그는 1953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주일쯤 가족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끝내 재회하지 못하고, 1956년 41세에 적십자병원에서 신원미상의 행려병자로 죽었다. 사인은 영양실조. 말년에는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이중섭은 가족에 대한 그림 외에 소를 많이 그렸다. 분노, 열정, 광기에 가득 찬 그의 소는 당시의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중섭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의 화가 다수가 소를 그렸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이고 자전적이다. 그의 비극적 생애는 숱한 문학, 영화, 연극 작품의 소재가 돼 전설처럼 전해진다. 

강원도 양구의 가난한 집 태생인 박수근은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했다. 제도권 미술교육을 받지 못하고 밀레처럼 오로지 훌륭한 화가가 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그래서 기본이 안 된 화가’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라는 오명이 따라다녔다. 오늘날 국민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은, ‘기본이 안 된’ 그림으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도 여러 번 떨어져 절망했다. 학력이 미천한 그에게 국전은 유일한 등용문이자 살길이었다.

이 일로 박수근은 폭음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건강을 해쳐 52세로 단명했다. 우리나라 서양화 도입기에 다른 화가들이 인상주의, 표현주의, 입체주의, 초현실주의니 하는 서양 그림을 배우며 비슷비슷한 그림을 그릴 때, 박수근이 아는 것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밀레 그림이 전부였다. 

이러한 그의 무지가 오히려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그만의 조형 어법을 가능케 했다. 그가 그린 그림의 질감은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화강암을 닮았다. 그는 주로 자기 주변의 선한 사람들, 흔한 풍경을 그렸다. 그림을 그것에 담기는 정신이나 정서와 그것을 담는 그릇(표현 양식)으로 구분해 본다면, 박수근은 내용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을 만들었다. 국민화가는 우리 국민의 애정이 듬뿍 담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애칭이다. 당시 마거릿 밀러 같은 서양인들이 그의 그림에 열광한 것은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박수근의 독창성 때문이었다.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김환기의 예술 생애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동경유학 시절(20~25세·6년), 서울대 및 홍익대 교수 시절(36~44세·8년), 파리 시절(44~47세·3년), 뉴욕 시절(50~61세·11년)이 그것이다. 세 곳의 해외 체류기간 중 뉴욕 시대가 가장 길었다. 

동경 유학 시 그는 일본 추상미술을 받아들여 기하학적 추상을 그렸다. 그러나 1948년 창립전을 연 ‘신사실파’전(‘신사실’이라는 이름은 김환기가 직접 지었다) 이후 파리 시절까지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사물을 그린 구상(Figurative) 회화였다. 그가 다룬 대상은 주로 한국 고유의 전통문화와 관련된 기물이거나 한국의 자연이었다. 

그는 44세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학장 자리를 버리고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김환기가 예술가로서 자신의 이념과 화가로서 자신의 위치를 고민하자, 넓은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권한 이는 부인 김향안이었다고 한다.


세계 미술 시장 이끄는 ‘뉴욕학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고 말한 그는 한국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나는 동양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비약하고 변모한다 해도 내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동양 사람의 그림이요, 한국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예술철학은 평생 지속된다. 프랑스 유학 후 귀국전에서 최순우가 “불란서 물만 마시고 와도 모두 그림들이 홱 바뀌는데 수화 그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나는 좋다”고 하자, “기실은 불란서에 가서 개인전을 갖기 전까지는 그곳 작가들 그림에 물들까봐서 전람회 구경도 안 다니고 자기를 지키느라 매우 애를 썼다”고 김환기는 말했다. 

한국미를 표현하는 김환기의 양식은 뉴욕 시절 크게 바뀐다. 구체적인 대상은 선과 색과 구성으로 추상화된다. 이것이 절정에 이른 작품이 요즘 미술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한국 미술품 가격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소위 ‘전면점화(全面點畵)’다. 

뉴욕에 이르러 완성된 김환기의 예술은 1950년대부터 세계 미술의 중심을 파리에서 뉴욕,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오게 한 미국식 그림(American Style Painting)인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를 언급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클리퍼드 스틸(1904~1980), 바넷 뉴먼(1905~1970), 잭슨 폴록(1912), 마크 로스코(1913), 빌렘 드 쿠닝(1926) 등 김환기와 동시대, 같은 공간에 살면서 뉴욕학파(New York School)를 이끈 작가들은 지금 세계 미술 시장에서 앞다투며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김환기가 활동 무대를 뉴욕으로 옮긴 것은 오늘날 그의 인기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당시 우리나라 화가 대부분은 쇠락해가는 파리를 향했다. 남관, 김흥수, 이성자, 문신, 이응노 등 1950,60년대 대표적 작가들이 그러했다. 김환기 역시 일찍이 파리에 체류했고, 1963년 제7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고 ‘회화부문 명예상’을 수상한 일로 뉴욕을 거쳐 다시 파리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는 뉴욕에 주저앉는다. 그것이 오늘의 김환기를 있게 했다. 일본, 독일을 거쳐 뉴욕에 정착하면서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된 백남준 역시 미국의 부상(The American Century)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다.


추상표현과 숭고미

마크 로스코, 김환기, 잭슨 폴록의 작품(왼쪽부터). 이들은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동시대 작가들이다.

마크 로스코, 김환기, 잭슨 폴록의 작품(왼쪽부터). 이들은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동시대 작가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다. 1947년 미국은 전 세계 공산품의 50%, 철의 57%, 전력의 43%, 석유의 62%, 자동차의 80%를 생산하고 원자폭탄을 독점하는 나라였다. 미국은 미술계에서도 ‘미국의 세기’를 실현해가고 있었다. 전후 유럽의 컬렉터, 평론가, 화가들이 ‘희망의 나라’ 미국으로 모여들었다. 미국 정부와 민간은 물심양면으로 이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연방정부는 FAP(Federal Art Project)로 예술가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이때 미국으로 망명 내지는 이주한 주요 작가들이 페르낭 레제, 피터르 몬드리안,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마크 로스코, 빌렘 드 쿠닝, 아쉴 고르키 등이었다. 1950년대에 30여 개에 불과하던 뉴욕의 화랑이 1960년대에는 300여 개로 늘었다. 재벌들은 이들의 작품을 사주고 미술관을 지었고, 정부는 여기에 대한 세제 혜택을 아끼지 않았다. 

경제와 군사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룩한 미국은 또한 문화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다.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이 미술로 세계를 이끈 시발점이었으며, 뒤이어 팝아트 등 20세기의 모든 미술운동을 만들어냈다. 미술 시장의 중심도 미국이었고, 미술 사조의 중심도 미국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이전 미국은 세계 미술의 주요 흐름에 단 한 번도 기여한 적이 없는, 파리를 기웃거리는 주변 국가였다. 냉전 시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 개인주의의 기수, 거대한 영토를 가진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정체성을 반영한 추상표현주의는 개인적 표현을 중시한 만큼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국경과 개별 문화의 특수성을 뛰어넘는 추상적 형상을 원했다. 뉴먼은 ‘기억, 연상, 향수, 전설, 신화와 같은 방해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고, 로스코는 ‘기억, 역사 혹은 기하학’이라는 장애물을 거부했다. 스틸은 ‘진부한 신화’를 원치 않았다. 소재를 포기하려는 집단적 의지는 유럽 문화의 굴레를 벗어나 미국적 경험과 정신을 바탕으로 미국 고유의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시도의 출발점이었다. 김환기도 뉴욕에 온 후 그의 작품에서 한국의 기물이나 자연 등 식별 가능한 대상물을 모두 없앴다. 

추상표현주의 회화의 특징 중 하나는 거대한 스케일이다. 서사적 스케일은 초강대국 미국의 야망과 자부심, 미 대륙의 광활한 풍경과도 일맥상통한다. 기존의 회화적 특징인 형상과 환영적 공간, 초점을 버린 그들의 거대한 올오버 회화(all-over painting)는 자연이자 우주 공간이다. 그들의 작품은 ‘숭고미’를 보여준다. 폴록은 “내가 자연이다”라고 선언했다. 김환기의 거대한 전면점화도 이런 특징을 지닌다. 자연이자 우주다. 그 그림 앞에 서면 관객은 장엄함에 압도돼 자신을 잃고 작품의 일부가 된다. 작품과 화가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벽화 이래 이런 스케일의 작품에 도전한 작가들은 없었다. 

바넷 뉴먼이 ‘인간, 영웅적이고 숭고한’(1950~51, 242×542cm)을 전시하면서 “사람들은 큰 그림을 멀리서 구경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큰 그림들은 가까운 거리에서 관람하도록 기획되었다”는 메모를 붙였다. 로스코도 본인의 거대한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관람객 간 거리가 46㎝쯤이라고 했다. 관람객에게는 숨 막히는 거리지만, 작가가 작업할 때 손이 미치는 거리다. 로스코는 관객에게 작가가 되기를 요구했다.


우리는 김환기를 이해하고 있는가

2012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 전(위)과 미국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MOCA)에 걸린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두 작가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거대한 스케일과 그로부터 나오는 숭고미 등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2012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 전(위)과 미국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MOCA)에 걸린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두 작가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거대한 스케일과 그로부터 나오는 숭고미 등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큰 작품은 요즘의 트렌드와도 부합한다. 새로 생기는 미술관 전시 공간이 거대해지고 설치미술이 일반화되면서 회화도 큰 작품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 추상표현주의의 한 분파인 색채(면)추상주의(Chromatic Abstraction·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클리퍼드 스틸 등)는 작품에서 붓 자국을 없앰으로써 빛이 발하는 듯한 시각적 효과를 냈다. 

이러한 효과로 로스코나 뉴먼의 색면추상은 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김환기의 전면점화도 종전의 두꺼운 마티에르를 버리고 수묵화처럼 맑고 투명하게 번져나가는 빛의 기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그는 “동양 사람의 체질은 역시 모필이 맞고, 거기서 미묘감이 나오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김환기는 캔버스 위에 한 점 한 점 찍어나가는 행위(action) 자체를 중시했다. 파리 시절까지 그는 그림 그리는 행위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추상표현주의의 한 갈래인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잭슨 폴록, 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등)은 행위를 예술로 본다.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물감을 뿌려댄 잭슨 폴록에게 그림은 곧 행위, 과정, 퍼포먼스였다. 액션페인팅은 예술과 삶을 일치시켰다. 행동(곧 실존)은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중심이다. 힘이 넘치는 율동감과 생명력은 액션 페인팅의 요체였으며, 김환기는 휘몰아치는 듯한 점의 구성을 통해서 이를 확보했다. 

김환기 작품 가격의 기록이 앞으로도 계속 경신될 것이라고 믿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은, 뉴욕 시절 그가 이룩한 성과가 보편성과 세계성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미술품의 연간 거래 규모가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단 한 점 가격(5000억 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영세한 시장을 가진 나라에서, 그리고 자국 예술에 대한 자긍심이 별로 없는 나라에서, 그래서 자국의 작가 중에서도 외국 사람들이 구입하는 작가들의 작품만 열심히 따라 사는 나라에서, 고유성만으로 세계적인 작가가 되기는 어렵다. 한국 정신은 보편적인 시대정신(Zeitgeist)은 아니다. 

한 나라 작가의 그림 가격은 그 나라의 경제력, 그리고 문화에 대한 자긍심에 비례한다. 그림 가격은 곧 그 나라의 국격이다. 어떤 외국 전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유명한 한국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전시한 화랑 주인에게 “한국 사람들은 내 작품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한국 사람들에게는 내 작품을 팔지 말라”고 했다. 그 작가의 심정을 나는 이해한다, 수긍할 순 없지만.


세계는 왜 김환기에 주목하는가
김순응
● 1953년 충북 진천 출생
●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 하나은행 자금본부장, 서울옥션 대표이사, 케이옥션 대표이사
● 現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
● 저서 : ‘미술시장의 봄여름가을겨울’(2010), ‘돈이 되는 미술’(2006) 등


신동아 2018년 7월 호

| 김순응 김순응아트컴퍼니 대표 kim@ksua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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