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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양전(量田)의 폐단

불공평 농간에 인심을 잃다

  • |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양전(量田)의 폐단

국가는 국민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세금을 거두어들여야 하고, 그 과정을 공정하게 관리해야 한다. 전세, 공물, 부역이 위주인 조선의 조세제도는 전세 이외의 것도 점차 농지에 부과하는 전세의 형태로 바뀌어갔다. 이에 따라 부과 기준을 명확히 세우기 위해 농지의 면적과 소유자, 경작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조선은 20년마다 한 차례씩 양전(量田)이라는 토지조사를 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세금을 부과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해 전세를 거두어들이기 위한 목적이라면 백성이 양전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양전하는 과정에 드는 많은 비용이 백성에게 전가되고, 농지의 조사와 등록이 공정하지 않다면 누가 이를 반기겠는가? 그래서 조정도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백성의 고통과 원망을 우려해 제때 양전을 시행하지 못했다. 또 양전을 시행한다 해도 농지 면적을 정확히 측량하는 과정은 매우 복잡한 데다 등급을 매기는 일도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할 소지가 많아 논란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숙종 34년(1708), 강원도 관찰사로서 양전의 책임을 맡았던 송정규(宋廷奎·1656∼1710, 조선 후기의 문신)가 탄핵을 당했다. 이유는 이러했다. 송정규는 5가지로 정해진 농지 측량 기준을 무시하고 별도의 방식을 만들어 적용하는 바람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 책임을 고을 수령과 양전의 실무 책임자인 감관에게 떠넘겼다. 또 그가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양전 현장에 나오자 백성은 그를 접대하느라 살림이 거덜 날 정도였다. 이에 대한 사관의 논평을 보자.

강원도는 수많은 산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농민들이 모두 산기슭에 불을 지르고 바위틈에 흙을 메워 겨우겨우 한 해 수확을 하고, 땅의 양분이 다하면 곧바로 다른 산으로 옮겨 개간한다. 이 때문에 농지에 일정한 형태가 없어 양안(量案)에서 빠진 것이 매우 많으며, 상등(上等)의 농지인데 하등(下等)의 농지가 되고, 하등의 농지인데 상등의 농지가 된 것도 매우 많다. 그래서 조정에서 다시 양전하자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해마다 기근이 들어 민심이 동요하기 쉬운 상황이다 보니, 감히 백성의 원성에도 개의치 않고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최석정(崔錫鼎·1646~ 1715)의 천거로 과분하게 발탁돼 관찰사에 임명된 송정규는 양전의 임무를 맡았으나 번잡하고 가혹하게 일을 진행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 너그럽고 충직한 사람을 특별히 뽑아 일을 맡겨도 백성의 원망을 사지 않기가 어려운 상황인데, 송정규처럼 괴팍하고 모진 사람이 제멋대로 일을 진행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백성이 동요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일을 망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숙종실록 34년 12월 13일>


양전(量田)의 폐단
경자양안(庚子量案)
조세 부과를 목적으로 전지를 측량한 후 만든 토지대장이다. 1719년(숙종 45)부터 1720년까지 작성됐다. 조선 시대에는 20년마다 한 번씩 전국적인 규모의 양전을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양안을 작성해 호조 및 해당 도와 읍에 각각 1부씩 보관하도록 했다.

백성들은 양전하는 과정에서 드는 비용을 부담해야 했고, 실제 토지 품질보다 높은 등급이 매겨진 땅에 대해서는 많은 전세를 납부해야 했다. 그러자 궁지에 몰린 백성들은 농토를 버리고 떠나기도 했고 일부는 총포를 쏘며 관찰사의 죄를 규탄하는 과격한 저항을 벌이기도 했다. 

경종 즉위년(1720)에는 그전 해인 숙종 45년 7월 시작한 삼남(三南) 지방의 양전을 마쳤다. 이는 인조 13년(1635)에 삼남에서 양전을 시행한 후 85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양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관찰사에게 위임하지 않고 2품 이상의 고위 관원을 균전사(均田使)로 파견했다. 또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양전에 필요한 종이, 붓, 먹을 마련하는 비용 및 실무를 담당하는 관원의 늠료(料)와 식비를 관청에서 부담하도록 했다. 이러한 조정의 노력은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까? 

‘경종실록’은 ‘전답의 면적은 예전에 비해 꽤 늘었으나, 간사한 자들이 온갖 폐단을 만들고 속임수를 부려 민폐가 도리어 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세 부과 대상이 되는 전답의 면적이 늘어났으니 양전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간사한 자들이 온갖 폐단을 만들고 속임수를 부렸다’는 대목이다. ‘경종수정실록’에는 같은 기사에 다음과 같은 사관의 논평이 있다.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된 이후로 부유한 백성이 전지를 겸병(兼幷·둘 이상을 하나로 합쳐 소유)하는 폐단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삼남 지방을 다시 양전하여 세금을 정하였으니,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균전(均田·토지를 백성에게 균등하게 나누어주던 제도)의 명분만 흉내 내고 균전의 실효는 추구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관찰사, 군수, 현령에 적임자를 임명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간사하고 교활한 지방의 아전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됐다. 세도 있는 집안의 전답은 하등으로 분류하고 곤궁한 백성의 전답은 상등으로 분류해 속임수를 부리고 온갖 간교한 폐단을 만들어냈다. 전답의 면적은 전에 비해 약간 늘었지만 백성들의 원망은 도리어 심해졌다. 사람들이 “삼남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양전을 다시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참으로 맞는 말이다.


<경종수정실록 즉위년 10월 6일>


양전(量田)의 폐단
고사촬요부록(攷事撮要附錄)
1554년(명종9) 어숙권(魚叔權·조선 중기 학자)이 편찬한 책으로, 이 책 안에는 토지 측량법 및 토지 측량에 사용하는 자의 규격과 그림이 실려 있다. 전지의 면적과 등급을 조사하는 양전은 전세를 정확하게 부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양전에 드는 많은 비용이 백성에게 전가되고 전지의 조사와 등록이 공정하지 않아 많은 원성을 샀다.


양전을 다시 하는 목적은 그동안 전세를 납부하지 않던 농지를 찾아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권세 있는 자들은 소유한 농지의 면적을 줄이거나 등급을 낮추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반면 힘없는 백성은 양전에 드는 비용을 부담할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높은 등급의 전세까지 내게 됐다. 이러니 누가 양전에 찬성할 수 있겠는가? “삼남에서 인심을 잃었다”라는,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사관의 언급을 통해 백성의 피해가 얼마나 크고 반발이 심했는지 헤아릴 수 있다. 이로부터 100여 년이 지나면 이른바 ‘삼정(三政) 문란의 시기’ ‘민란의 시대’가 도래하는데, 그 조짐은 이미 이때부터 싹트고 있었다. 세금은 얼마나 내는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공평하게 내는지도 중요하다.


신동아 2018년 9월 호

| 정영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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