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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가수재(賈秀才)의 유랑

서북도에서 시작된 반란과 조선의 끝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가수재(賈秀才)의 유랑

경기도 양성현감(陽城縣監)으로 부임한 두 달 뒤 심재필은 왕의 밀지를 받았다. 젊은 왕은 허수아비이니 안동 김문이나 반남 박문이 보낸 것으로 보는 게 옳았다. 그 내용이 수상해 인근 고을 원들에게 알아보니 모두 같은 밀지를 받아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을을 떠도는 낯선 인물들은 잡아들이고 갑자기 사라진 자들은 명단을 작성해 올리라는 터무니없는 명령이었다. 양성현은 먹고살기 위해 경기 지역으로 꾸역꾸역 몰려드는 유랑민으로 넘쳐났고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누굴 잡아들이고 어떤 명단을 작성하란 소리인가?


서북도의 급변 상황

김홍도의 행상.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金弘道筆 風俗圖 畵帖)’에 수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김홍도의 행상.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金弘道筆 風俗圖 畵帖)’에 수록돼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재필은 엉터리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천에 널린 떠돌이들을 잡아들여 명단을 작성한 뒤 바로 풀어주고 실종자로 처리했다. 하루 만에 일을 마치고 청사 마루에 앉아 지는 노을을 바라보던 그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승하하신 정조 임금을 떠올리면 가슴엔 분이 쌓였고 탄식이 일과가 된 지 오래였다. 보람 없는 관직으로 돈이 모이면 식솔들을 이끌고 낙향할 작정이었지만 요령부득으로 고지식한 그의 수중엔 금전이 고이지 않았다. 11년 전 주군의 죽음과 동시에 실세한 규장각 출신 문신들은 재필처럼 미관말직을 전전하며 큰 뜻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보름 후 훈련도감에서 파견한 별장과 초관들이 들이닥쳐 동원 가능한 의병 숫자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재필은 그제야 뭔가 일이 벌어졌음을 눈치챘다. 차출 인원을 못 박은 별장 일행이 떠나자마자 말에 뛰어오른 재필은 북쪽으로 50리를 내달려 용인현 관아에 도착했다. 규장각 시절 선배였던 용인현령은 서북도 민심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전했다. 토벌대 본영인 순무영(巡撫營)을 꾸리려는 조짐이 조정에서 포착됐는데 의병 모집은 뭔가 더 심각한 사태를 대비한 조치로 보인다고 했다. 재필은 이미 오래전 자신의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갔던 생기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현령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재필이. 부디 딴생각 마시게. 무슨 생각하는지 내 다 아네.” 

재필은 일어서려다 말고 다시 주저앉으며 낮게 속삭였다. 

“형님 걱정 이해하오. 하지만 서북쪽에서 큰일이 벌어진 건 맞지 않소? 조정에서 아무리 틀어막아도 곧 진상이 드러날 거요. 이게 기회일지 누가 아오?” 

말을 몰아 양성으로 되돌아온 재필은 밤을 새워가며 고민했다. 조정에서 장막을 치고 서북도에서 벌어진 급변 상황을 감추고 있다면 청나라의 침략은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필시 민란이거나 변방 장수의 반역일 테고, 그게 의로운 봉기라면 조정의 부패한 세도가들을 숙청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아침 일찍 등청한 재필은 동헌에 홀로 서서 먼동이 터오는 하늘을 마주했다. 주군을 잃고 사명감 없이 견뎌온 지난 삶은 스스로 허락한 치욕이었다. 하지만 서북쪽에 대의가 있다면 그곳이 그가 지금 있을 자리이며 이제부터는 존왕(尊王)의 기치를 내걸 시간이었다. 그가 한숨 섞인 혼잣말로 속삭였다. 

“세상에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이 모진 권태를 내 어찌하랴.”


수상한 건어물 장수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아전들을 소집한 재필은 최근 현에 나타났던 의심스러운 외지인들을 샅샅이 탐문해 보고하라 명했다. 며칠 뒤 아전들이 제출한 문서를 꼼꼼히 분석하던 재필의 눈에 이상한 인물 하나가 들어왔다. 성명 불상의 그자는 1년 남짓 경내의 사찰 청원사(淸源寺)에 기식하다 탐문 도중 사라진 건어물 장수였다. ‘장사꾼’이라는 뜻의 ‘가(賈)’ 자를 성으로 삼아 가수재(賈秀才)란 별명으로 불린 그에게 주목한 재필은 관련 정보를 더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아전들에 따르면 가난한 장사꾼임에도 돈벌이에 뜻이 없던 가수재는 엽전 몇 푼만 생기면 곧장 주막에 들러 탕진하고 저물녘 절로 돌아올 때면 당시(唐詩) 한 수를 읊조리던 기이한 자였다. 그는 키가 매우 크고 피부가 검붉었는데 재필은 대뜸 서역인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를 서역인으로 추정할 이유는 또 있었다. 만취한 가수재가 과거를 준비하던 선비들 방에 난입한 어느 날, 승려들 손에 내쫓겨 법당에 쓰러져 잔 그는 이른 새벽 모두가 듣도록 유려한 음률로 이태백의 사(詞)를 읊었다고 했다. 청나라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법당에 몰려든 선비들에게 초서로 한시까지 적어준 그는 그때부터 청원사 사람들에게 수재로 통했다. 

가수재는 불경에도 식견이 있었다. 하루는 그가 불탁 위에 팔다 남은 복어를 공물로 올려 승려들의 공분을 샀다. 가수재는 부처께서 복어를 좋아하셨다는 증거로 즉석에서 ‘보리경’ 한 대목을 날조해 외웠는데 불경에 익숙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외국어를 잘하고 불경에 능한데도 건어물 장수로 자신을 위장한 서역인이라면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일까? 

재필은 사라진 가수재를 직접 추적하기로 했다. 가수재가 만약 서북도의 변고와 연루된 자라면 가장 빠른 노정을 통해 용인현에 도달한 뒤 한양성 우측으로 우회해 개경을 관통하려들 게 뻔했다. 용인현령에게 전갈해 주요 길목마다 검문을 강화하도록 부탁한 재필은 쉬지 않고 말을 몰아 송파나루에 이르렀다. 그는 나루에서부터 용인 방향으로 남하하며 북상하는 상인들을 확인해나갈 생각이었다. 먼 인척이던 광주유수의 도움으로 포위망을 남쪽으로 바짝 좁힌 재필은 상대를 용인 쪽으로 몰아넣고자 했다. 

마침내 남한산성 근처에서 발견된 가수재는 청계산 사면을 따라 양재역 쪽으로 도주했다. 그가 만약 사평나루를 통해 한양에 잠입하려 한다면 도성의 관군에 체포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건 재필이 바라던 바가 아니었다. 양재역에 먼저 도착해 청계산로에 매복해 있던 재필은 광주유수가 보내준 군졸들의 협조로 끝내 가수재를 생포했다. 기진맥진해 있던 가수재는 호송되며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가수재의 정체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자 파견된 관군이 봉기군과 대치하는 모습을 그린 ‘순무영진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고자 파견된 관군이 봉기군과 대치하는 모습을 그린 ‘순무영진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공]

광주유수에게 가수재를 도망한 양성현 관노로 보고한 재필은 파발들이 오가며 쉬는 양재역참에서 하루저녁 묵으며 가수재와 단둘이 되었다. 재필이 물었다. 

“난 널 놔줄 수도 있다. 네 정체가 무엇이냐?” 

가수재는 재필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고을 원이 공무도 없이 임소를 비워둘 순 없었기에 재필은 상대에 대한 처분을 날이 새기 전 결정해야 했다. 재필이 다시 말했다. 

“난 정조 임금 밑에서 화성 천도를 도왔던 심재필이다.” 

재필이 자신의 관력에 대해 할 말을 다 마쳤을 무렵 다음 날 말에게 먹일 죽을 끓이는 역노들의 아우성 소리와 삼남에서 모여든 상인들이 술에 취해 노상에서 다투는 소리로 사방이 어수선해졌다. 상념에 잠겨 있던 가수재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절 무슨 연고로 쫓으셨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쇤네는 떠돌이 어물장수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나리는 제가 왜 양성현에 머물렀었는지 그게 알고 싶으시단 말씀이신지요?” 

재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수재가 자신의 두 손에 채워진 수갑을 들어 올려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갑을 풀어준 재필이 말했다. 

“아침에 지게도 돌려주마. 서북도에서 벌어진 일을 혹 알고 있느냐? 아는 대로 소상히 말해다오.” 

가수재는 그날 밤 홍경래가 일으킨 민란에 대해 긴 이야기를 들려줬다. 서북도민들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로 심한 차별과 멸시의 대상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서북면 출신 양반들은 벼슬길에 제한이 있었고 평민들은 가혹한 징세와 변경의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몰락 양반 홍경래는 그런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을 도화선 삼아 새 세상을 열려는 미륵의 화신이자 미래의 태평성세를 이끌 예언자를 자처하고 있었다. 말을 마친 가수재가 덧붙였다. 

“팔도를 떠돌며 그저 들은 소식이올시다. 한데 또 누가 알겠습니까? 이 바람이 남쪽으로까지 불어대면 온 천지가 확 뒤집힐지.” 

말문이 막힌 재필은 속으로 역모라고 되뇌었다. 역모였다. 눈앞에 앉아있는 자는 역도들의 끄나풀로 경기 남부의 동태를 살피러 온 첩자였다. 당장 조정에 발고하지 않으면 재필 자신도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 재필이 물었다. 

“상감께 살려달라고 일으킨 민란이 아니로구나. 나라를 뒤엎을 셈인 게야. 그렇지?” 

가수재가 기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이 되물었다. 

“나리께선 천주의 자식은 아니신지요? 요즘 남인들은 죄 그쪽이라 들었습니다만. 만일 그러시다면 우주가 평등해지는 게 그리 나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서쪽에서 온 첩자

‘가수재전’의 주인공 가수재는 현재 경기도 안성에 해당하는 양성현 청원사에서 기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성 청원사 대웅전. [문화재청 제공]

‘가수재전’의 주인공 가수재는 현재 경기도 안성에 해당하는 양성현 청원사에서 기식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기 안성 청원사 대웅전. [문화재청 제공]

한때 재필은 동반(同伴)이던 정약용을 따라 천주교에 몸담았다 개심한 배교자였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악몽처럼 되풀이되는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그날 밤, 달 없이 깊은 밤, 운명의 주군이 정해지던 불면의 밤, 침전으로 정약용과 재필을 부른 정조 임금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렇게 말했었다. 

“약용아, 재필아. 내 너희가 야소교도(耶蘇敎徒)임을 이미 알고 있다.” 

모골이 송연해 온몸을 떨고 있던 두 사람에게 정조 임금이 이어서 한 말을 재필은 토씨 하나 틀림없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어미가 천출이어서 신하들 눈치를 봐야 했던 자가 나의 할아비요, 패역의 죄명으로 뒤주에서 죽어야 했던 자가 내 아비니라. 왕좌에 앉아 있지만 가장 무서운 적들이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노린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낮은 자가 있더냐? 야소는 낮은 데로 임한다고 하니 이번 생엔 부디 나를 도와다오.” 

이를 악물고 한동안 방바닥을 내려다보던 재필이 가수재에게 대답했다. 

“남인이라고 다 천주교도는 아니다. 게다가 난 오래전 회심해 성인의 학문으로 돌아왔다. 너야말로 조선 태생은 아닌 듯한데 혹 야소를 믿는 서역인이냐?” 

가수재는 야소교도는 아니었지만 서역인은 맞았다. 카스피해 남쪽의 옛 페르시아 상업 도시 아스트라바드에서 태어난 그는 투르크 무역상을 따라 청나라를 드나들다 북경에서 우연히 만난 개경 상인들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이민자였다. 호적이 문란해 양반과 상민의 경계조차 불분명하던 서북도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재필이 물었다. 

“조선 이름도 없는 네가 어쩌다 홍경래 무리의 첩자가 된 것이냐?” 

“가수재란 성과 이름이 생겼잖습니까? 그리고 전 상인으로서 세상 가보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하늘 아래면 다 제 고향이지요. 첩자라기보다 천하 민심을 살피러 온 서쪽 뜨내기로 봐주십시오.” 

재필이 보기에 홍경래가 가수재를 양성현에 밀파한 이유는 뻔했다. 서북면에서 반란이 일어나면 임금은 남쪽으로 피신해야 할 터, 근왕병은 당연히 경기 남부에서 소집되어야 했다. 홍경래의 군대가 개경과 한양을 차례로 함락시킨다고 가정할 때 그들이 근왕병과 최후의 일전을 벌여야 할 곳 역시 양성현을 비롯한 경기 남부 지역이었다. 가수재가 장사는 작파해두고 고을 구석구석을 살피며 쏘다니다 주막에 들러 민심을 살핀 까닭도 거기에 있었을 것이다.


멋대로 세상을 도는 물건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진압 경과를 적은 ‘진중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진압 경과를 적은 ‘진중일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험한 요새나 단단한 성곽이 없는 용인 이남에서 결전을 치르고 싶었던 게로구나. 널 보낸 홍경래란 자 말이다. 그렇지?” 

가수재는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어쩐다. 난 너의 정체를 알아버렸고 널 풀어줬다 난이 실패라도 하게 되면 나까지 꼼짝없이 역도로 몰릴 판이다. 널 어째야 하겠느냐?” 

“풀어주십시오.” 

“뭐라? 그냥 풀어달라?” 

“그렇습니다.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쇤네는 세상의 꽃가루를 이곳저곳 나르는 꿀벌일 뿐입니다. 딱히 큰 신념도 없습니다. 이미 난은 벌어졌고 전 돌아가 보고 들은 것들을 떠들고 나서 조선을 뜨려 합니다.” 

“난이 성공해도 돌아오진 않고?” 

“그건 모르지요. 성공했단 기별을 듣게 되면 훗날 나리를 다시 뵐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전 멀리 떠날 것입니다. 개경 상인들은 홍삼을 더 먼 곳에까지 팔고 싶어 합니다. 힌두신의 사원도 사막의 모래도 이젠 그립군요. 조선 땅에서 하고픈 일들은 다 해보았습니다.” 

간밤에 내린 눈이 길 위에 얇게 덮였고 돌개바람이 장지문을 흔들고 멀어졌다. 날이 밝자 역참 주변은 채비하는 상인들로 붐비며 새로운 활기로 넘쳐났다. 지게를 진 가수재는 그들 사이에 섞여 사평나루를 건너겠다고 했다. 헤어지기 직전 가수재가 말했다. 

“전 새로 부임한 사또님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산자락에서 잡힐 때 나리를 알아보고 안심했지요. 장사꾼들 마음을 얕보진 마십시오. 우주 안의 물건들은 주인 없이 돌고 돌다 결국 누군가를 돕게 되는 법이거든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긴 가수재는 돌개바람처럼 멀어져갔다. 상인들이 떠나버린 역참에 홀로 남겨진 재필은 문득 허전했다. 그는 말에 올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수재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양성현감 자리는 머잖아 돈 많은 집 자식에게 뺏길 것이며 바칠 뇌물 없는 그는 언젠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다. 그렇게 쓸쓸히 노년이 찾아오면 끝내 조선을 떠나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하게 되리라. 하늘을 향해 그가 조용히 속삭였을 때 과연 그분은 그 말을 들었을까? 

“물건이 멋대로 세상 속을 돌다 보면 많은 것도 보고 많은 사람을 돕게 되겠지요. 그 물건에 주인만 없었다면 말입니다.”  


※ 이 글은 조선 후기 야담작가 김려(金金慮)의 ‘가수재전’을 토대로 했다. ‘가수재전’은 1818년 출간된 ‘단량패사(丹良稗史)’에 수록된 인물전으로서 책이 1차 완성된 건 1792년으로 보이지만 이후 내용이 추가됐을 가능성도 있다. 소설 속 무대인 양성현은 ‘가수재전’에선 옛 명칭인 적성현(赤城縣)으로 나오는데 현재 경기도 안성시의 일부다. 1811년 겨울 발발한 홍경래의 난은 5개월 뒤 진압됐다. 1800년 정조를 계승한 순조는 안동 김씨로 대표되는 외척 세도가들에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니다 1834년 생을 마감했다. 양성현감 심재필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정조 사후 규장각의 규모가 축소되자 소속 각신들이 실세해 뿔뿔이 흩어진 건 역사적 사실이다.


가수재(賈秀才)의 유랑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18년 10월 호

|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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