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명작의 비밀

모나리자 생애 500년, 그 결정적 순간

‘리자 부인’ 이삿짐센터 광고 모델 되다

  • 이광표 서원대 교양대학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19-05-1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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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에게 알려진 명작은 어떻게 명작의 지위를 얻게 됐을까. 작품을 둘러싼 논란이나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는 없을까. ‘신동아’는 이번 호부터 그 감춰진 비밀을 들여다보는 연재 ‘명작의 비밀’을 시작한다. 문화유산학 박사로 ‘명품의 탄생’ ‘한국미를 만나는 법’ 등을 펴낸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앞에 모여 있는 관람객들. [AP=뉴시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앞에 모여 있는 관람객들. [AP=뉴시스]

    ‘모나리자 집단’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해 ‘모나리자’ 한 작품만 감상하고 전시실을 떠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여건이 허락하면 다른 작품을 굳이 감상하지 않을 이유까지야 없겠지만, 어쨌든 루브르 박물관 방문객의 25% 정도가 모나리자 집단에 속한다고 한다. 

    이들에겐 모나리자가 최우선이다. 인류가 남긴 미술품 가운데 독보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모나리자. 그래서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은 리자 부인의 고상한 미소를 보려는 사람들로 늘 인산인해다(‘모나’는 이탈리아어 경칭으로, 이 작품 모델이 된 여인 이름은 ‘리자’다). 

    게다가 사람들은 감상에 그치지 않고 모나리자를 열심히 패러디한다. 벌거벗은 모나리자, 수염 난 모나리자, 뚱뚱한 모나리자, 담배 피우는 모나리자, 포탄 속의 모나리자…. 복제품이나 사진, 영상, 문화상품 등으로 모나리자 이미지가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데, 왜 우리는 루브르로 가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모나리자를 패러디하고 조롱하며 소비하는 것일까.

    밀로의 비너스와 한판 승부

    1516년 모나리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를 따라 이탈리아 국경을 넘고 프랑스 앙부아즈 지역으로 건너갔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프랑수아 1세의 후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이때 모나리자를 프랑수아 1세에게 넘겼다. 모나리자는 프랑스 왕실 소장품이 됐다. 

    베르사유궁에 머물던 모나리자는 1797년 루브르 박물관(1793년 개관)으로 넘어갔다. 그 후 1800년 나폴레옹 1세는 튈르리궁 자신의 침실로 모나리자를 옮기기도 했다. 비난이 거세지자 나폴레옹은 1804년 이 그림을 슬며시 루브르의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이 기간을 제외하고 모나리자는 늘 루브르에 있었다. 



    루브르의 명작, 신비의 미소로 명성을 얻어가던 모나리자는 19세기 후반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자 ‘밀로의 비너스’와 한판 대결을 벌여야 했다. 1867년 ‘대중을 위한 루브르 안내서’라는 가이드북이 발간됐다. 이 책은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가장 소중한 보석 가운데 하나” “(루브르의) 영혼과 미소”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1878년 또 다른 가이드북은 모나리자보다 밀로의 비너스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비너스는 루브르의 가장 유명한 보물”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사이에 치열한 경쟁 구도가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월터 페이터,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여러 문인의 지지에 힘입어 모나리자는 밀로의 비너스를 누르고 루브르의 대표작이 됐다. 

    미소의 신비감도 더 증폭돼갔다. 급기야 프로이트가 레오나르도의 유년기 성적 무의식과 연결해 모나리자의 미소를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이 분석은 1910년 발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유년시절의 기억’이라는 글에 들어 있다. 프로이트는 레오나르도의 노트 가운데 ‘어린 시절 한 마리 독수리가 내 입에 꼬리를 집어넣는 꿈을 꾸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프로이트가 볼 때 이것은 당연히 성적인 행위였다. 프로이트는 여기서 사생아 레오나르도의 무의식 속 성적 억압을 발견했고 “모나리자의 미소는 다빈치의 무의식 속에 잠복해 있던 미소”라고 설명했다. 논란은 있었지만 프로이트 덕분에 모나리자의 미소는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자리 잡았다. 

    그래도 좀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모나리자 팬덤이 엘리트와 상류층 일부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박물관은 장벽이 높은 곳이었다. 대중화가 좀 더 필요했다. 당시 성장세를 보이던 신문, 사진, 광고 등 대중매체와 호흡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부족했다.

    루브르의 치욕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비판한 프랑스 일간지 엑셀시오르 1911년 8월 23일자 1면.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비판한 프랑스 일간지 엑셀시오르 1911년 8월 23일자 1면.

    1911년 8월 21일 월요일 오전. 이날은 루브르의 휴관일이었다. 살롱 카레 전시실에 한 청년이 들어섰다. 그는 전시실 벽에 걸린 모나리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떼어냈다. 먼발치로 경비원이 이 모습을 바라봤다. 계단 쪽으로 자리를 옮긴 청년은 액자를 뜯어낸 뒤 그림을 둘둘 말아 옷 속에 넣고 루브르를 빠져나왔다. 모나리자가 걸렸던 벽엔 4개의 고리와 액자틀 자국만 남았다. 

    그날 오후 루브르는 발칵 뒤집혔다. 경찰 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경비원을 취조했다. 경비원은 “박물관 큐레이터가 모나리자를 잠시 연구실로 옮기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루브르에서 누가 감히 모나리자를 훔쳐가리라고 생각했을까. 하지만 동서를 막론하고 명작의 도난은 이렇게 사람들이 허를 찔릴 때 발생한다. 

    2004년 8월 22일 노르웨이 오슬로 뭉크 미술관. 북적이는 전시실에 복면 괴한 두 명이 들이닥쳤다. 한 사람은 총으로 보안요원을 위협하고 한 사람은 벽에 걸린 ‘절규’와 ‘마돈나’를 잡아당겨 철사 줄을 뜯어냈다. 30여 명의 관람객은 놀라서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괴한들은 그림을 들고 유유히 걸어 나가 대기해놓은 아우디를 타고 도주했다. 두 작품의 목제 액자틀은 오슬로 거리에서 부서진 채 발견됐다. 

    아무튼 1911년 사건 이후 루브르 박물관장이 즉각 해고됐다. 아무렇지도 않게(사실은 노련하고 익숙하게) 모나리자를 떼어가다니,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 아닐까. 그림에 미친 억만장자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아닐까…. 경찰도 당황스러웠다. 여러 사람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화가 피카소도 의심을 샀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에 집착하는 박물관은 폭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피카소는 루브르 도난품을 4점 구입한 전력이 있었다. 피카소는 의심을 벗고자 그것들을 센강에 버리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아폴리네르도 아니고 피카소도 아니었다. 

    언론은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당시 부수가 급팽창하던 신문들의 비판이 특히 가혹했다. ‘일라스트라시옹’은 8월 26일자 한 면 가득 모나리자 사진을 실었다. 또 다른 신문은 일주일 내내 1면에 도둑이 모나리자를 훔쳐가는 모습의 그림을 게재했다. 한 신문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라진 라 조콩드(모나리자의 프랑스 이름)…우리는 아직 액자는 갖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그건 일종의 조롱이었다. “(모나리자가 사라진 건) 정권이 부실한 탓”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不在의 逆說

    모나리자 도난사건이 발생한 뒤 루브르 박물관은 일주일 넘게 문을 열지 못했다. 그해 8월 30일 루브르 살롱 카레 전시실은 충격을 딛고 다시 문을 열었다.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렸다. 평소 모나리자를 보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박물관에 몰린 것이다. 이들은 모나리자가 사라진 전시실에서 네 개의 고리와 빈자리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흔적을 응시하며 눈물 흘리고 헌화하고 애도했다. 

    프랑스의 한 시인은 “우리에게도 이런 것이 있었구나” 하고 새삼 중얼거렸다. 루브르 박물관 밖에서는 모나리자 복제품, 엽서 등이 불티나게 팔렸다. 카바레 등 유흥업소에서도 모나리자 스토리가 무대에 올랐다. 모나리자의 뒤늦은 존재감이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파고든 것이다. 부재(不在)의 역설(逆說), 부재의 미학(美學)이었다. 

    2008년 우리의 국보 1호 숭례문 화재 직후 상황도 이와 닮았다.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50분경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했다. 토지보상비에 불만을 품은 70대 노인의 방화였다. 목조 누각 상당 부분이 불에 탔고 그 모습은 처참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사람이 몰려들었다. 불타 버린 숭례문을 애도하고 눈물을 흘렸다. 시커먼 숭례문 앞에는 국화꽃이 쌓였다. 평소 국보 1호 숭례문의 가치나 아름다움에 무심했던 사람들도 상당수 화재 현장을 찾았다. 그 폐허, 그 빈자리 앞에서 숭례문의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다시 100년 전. 그런데 모나리자 도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리 간단치 않았다. 도난 직후 화가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있었다. 50여 명이 응답했고 이 가운데 30여 명은 “엄청난 손실” “대재앙”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은 “사실 별것 아니었다” “모나리자는 루브르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 아니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음울하다. 날 유혹하지 못했다” “그녀는 눈썹도 없고 이상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라고 답했다. 예상을 뒤엎는 대답이었다. 

    왜 이런 답이 나온 것일까. 도난사건을 계기로 모나리자가 대중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자 이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다. 고급 문화계는 오히려 모나리자와 거리를 두고자 했다. 과도한 대중화에 대한 경계심의 발로였다.

    어색한 귀향

    모나리자 반환 전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현장.

    모나리자 반환 전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현장.

    모나리자 도난사건에 대한 수사는 한동안 별 진척 없이 이어졌다. 1911년이 지나고 1912년 또 한 해가 지났다. 점점 모나리자는 사람들에게서 잊혀갔다. 그러던 1913년 11월, 모나리자를 훔쳐간 이탈리아 청년 빈첸초 페루자가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그는 피렌체에 있는 유력 골동상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모나리자를 갖고 있고 그것을 넘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골동상은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다. 페루자는 그해 12월 12일 모나리자를 들고 피렌체에 도착했다. 

    모나리자를 훔쳐갈 정도로 대담했던 청년이 그게 덫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페루자는 골동상의 신고로 대기 중이던 이탈리아 경찰에 체포됐다. 페루자는 범행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작품이 왜 루브르에 있는가. 모나리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었다. 이탈리아 문화재를 약탈해간 나폴레옹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모나리자를 약탈해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경찰 조사 결과, 범인 페루자는 놀랍게도 범행 1년 전 모나리자 설치 작업에 참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페루자의 발언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탈리아에 모나리자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랐다. 범죄자 페루자는 순식간에 국민 영웅이 됐다. 그가 수감 중인 교도소에 꽃다발과 선물이 답지했고 감방을 더 큰 곳으로 옮겼다는 얘기도 있다. 급기야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내밀었다. 

    1996년 서울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서울 서소문 호암갤러리에서 ‘조선 전기 국보전’이 열렸고 여기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출품됐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시대 언젠가 일본으로 유출됐고 한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기까지 했던 조선 전기 최고의 산수화다. 여러 일본인의 손을 거쳐 1950년부터 나라(奈良)의 덴리대(天理大)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전시가 시작되고 며칠 뒤, 일군의 청년이 서울 인사동에서 몇몇 기자를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다.
     
    “몽유도원도는 일본이 약탈해간 것이니 지금 전시 중인 작품이 일본으로 돌아가면 안 된다. 우리가 몽유도원도를 탈취하겠다.” 

    ‘몽유도원도’가 약탈됐을 가능성이 없진 않지만 아직까지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약탈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그들은 약탈이라 주장하며 탈취 운운했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100년 전 이탈리아는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돌려주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탈리아인의 정서를 감안해 프랑스 반환에 앞서 피렌체, 로마, 밀라노에서 전시를 하게 해달라고 프랑스에 제안했다. 프랑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1913년 12월 하순, 약 2주에 걸쳐 모나리자의 독특한 귀향전(歸鄕展)이 열렸다. 전시는 ‘대박’이었다. 먼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모나리자가 걸리자 구름 관객이 몰려들었다. 그림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도 있었다. 로마를 거쳐 밀라노 전시가 이어졌다. 이 전시엔 이틀 동안 6만 명이 몰렸다.

    이삿짐센터 모델이 된 모나리자

    1913년 12월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전시될 때 주변에서 판매된 엽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친 모습으로 모나리자가 실린 마차를 끌고 가고 있다.

    1913년 12월 모나리자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전시될 때 주변에서 판매된 엽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지친 모습으로 모나리자가 실린 마차를 끌고 가고 있다.

    1913년 12월 31일, 이탈리아 밀라노를 출발한 열차가 프랑스 파리 리옹역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운집했고 리자 부인(모나리자)이 열차에서 내렸다. 충격적인 수난을 겪으면서도 이탈리아에서 존재감을 한껏 과시한 모나리자는 더욱 스타가 돼 있었다. 모나리자는 우선 국립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로 옮겨졌다. 여기서 며칠 휴식을 취한 모나리자는 1914년 1월 4일 루브르 박물관의 원래 자리인 살롱 카레 전시실로 귀환했다. 

    리옹 역과 루브르 박물관 주변엔 환영 인파가 넘쳐났다. 모나리자의 무사 귀환을 두고 ‘즐겁고 유쾌한 이탈리아 여행’이라는, 여유 있는 농담도 나왔다. 거리에선 모나리자 노래가 울려 퍼졌고 모나리자를 모티프로 한 엽서와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엽서에 실린 이미지들은 재기발랄했다. 리옹 역에서 루브르로 보내달라며 떨고 있는 모나리자, 모나리자를 실은 마치를 끌고 가는 지친 모습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열차에 올라타는 모나리자 등. 한 이삿짐센터의 엽서에는 밀라노를 떠나는 모나리자가 그려져 있었다. 도난과 귀환을 계기로 고상한 모나리자가 이삿짐센터 광고 모델로 변신한 것이다. 이것이 모나리자를 활용한 최초의 상업광고 아니었을까. 

    모나리자의 무사 귀환은 프랑스에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문제가 생겼다. 지식인, 엘리트, 상류층 등 이른바 고급문화 향유층의 우려였다. 그들은 그동안 모나리자를 독점했다. 그런데 도난사건 이후 모나리자가 너무 빠른 속도로 대중화됐다. 모나리자라는 고급 예술을 일부만 독점한다는 특권의식이 깨졌고,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반발에도 모나리자는 대중화에 완벽하게 성공했다. 도난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통해 모나리자는 이제 대중의 스타가 됐다. 이후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모나리자 500년 생애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현상은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은근한 조롱이기도 했다. 그렇게 고상하다고 으스대면서도 모나리자 하나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고 조롱이고 풍자였다. 모나리자는 그렇게 새로 태어났다.

    루브르 모나리자는 진짜인가?

    올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타계 500주기. 한 미술사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1913년 루브르로 돌아온 모나리자.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라고.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이 질문은 물론 농담이겠지만 예술의 존재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인기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미의 기준, 미술을 생각하는 기준도 절대적이지 않다. 이 위대한(?) 도난 사고는 모나리자에 엄청난 스토리를 축적시켰고 영원한 의심을 덧입혔다. 

    도난은 스토리를 낳고 스토리는 의심을 낳고 또 다른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다채로운 풍자와 패러디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예술의 토양이 되고 모나리자는 더욱 풍성해진다. 의심은 예술과 철학의 본질 가운데 하나다. 그런 점에서 모나리자는 복이 많은 그림이다. 앙드레 말로는 “박물관은 걸작을 전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걸작을 창조한다”고 말했다. 루브르가 그렇고 모나리자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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