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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박서보 화가 딸 박승숙

“아버지는 위대한 노동자였다”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박서보 화가 딸 박승숙

  • 박서보는 한국 현대미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화가, 행정가, 교육자로 각각 큰 족적을 남겼다. 단, 아버지로서는 아니었다. 딸 박승숙은 “오랫동안 아버지 딸인 게 싫고 창피했다”고 말했다. 박승숙이 ‘박서보와 그의 시대’를 이해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박서보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는 딸을 만났다.
[동아일보]

[동아일보]

박서보(88)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 가격은 한 점당 10억 원을 호가한다. 박승숙(51) 씨는 아버지 이름에 이렇게 늘 돈 얘기가 따라붙는 걸 못마땅해했다. “스무 살 때부터 평생 작가로 살아온 아버지의 정체성은 작업실에서, 오직 그의 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게 박씨 생각이다. 그럼에도 글을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박서보를 잘 모르는 독자에게 그의 위상을 설명할 가장 쉬운 방법은 ‘그림 값’이기 때문이다.


한국 화단의 스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9월 1일까지 열리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전 전경(위). 박서보 묘법 No.3-82 작품. [뉴시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9월 1일까지 열리는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전 전경(위). 박서보 묘법 No.3-82 작품. [뉴시스]

2015년 9월 미국 시사지 뉴요커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84세 박서보는 한국에서 미술 분야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그리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의 1982년작 ‘묘법 No.3-82’는 2013년 11월 5만6750달러(약 6900만 원)에 팔렸다. 바로 그 작품이 올해 5월 63만1972달러(약 7억7000만 원)에 다시 판매됐다. 박서보는 ‘1980년대에는 이런 작품을 한국 돈 300만 원에도 팔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박서보의 인생 역전을 잘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박서보는 30년 넘게 홍대 미대 강단에 섰다. 이른바 ‘홍대 사단’을 이끈 리더였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는 등 행정가로도 성공했다. 화업 또한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대학 재학 중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입선했다. 20대에 한국 대표로 세계청년화가대회에 나가 1위를 차지했다. 그가 갖지 못한 게 하나 있다면, 그건 오직 시장의 사랑이었다. ‘묘법’ 시리즈로 대표되는 박서보의 추상 작품은, 뉴요커가 보도했듯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다. 

상황이 달라진 건 2014~2015년 무렵이다. 미술 시장에 ‘단색화 열풍’이 불며 수집가들이 박서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박씨는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아버지가 잘 팔리는 화가로 둔갑해 있었다”고 했다. 



2014년 한 경매에서 박서보 작품 ‘묘법 No.47-74’는 수집가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당초 추정가 400만 원의 18배에 이르는 7296만 원에 팔려나갔다. 해가 지날수록 작품 가격은 더욱 뛰었다. 뉴욕 런던 파리 홍콩 등 세계 미술 중심지에서 앞다퉈 박서보 초청 전시회를 열었다. 화가는 여든 넘어 일약 ‘스타’가 됐다. 국내외 언론 인터뷰 요청이 쏟아졌다. 

이때 박서보는 딸의 도움이 필요했다. 노년에 접어들고 심근경색, 뇌경색, 고혈당 등에 시달린 그는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예술학을 전공한 딸 박씨가 아버지를 돕고자 친정을 오갔다. 서면 인터뷰 답변을 대신 작성하는 등 이런저런 일을 거들었다. 그 과정에서 부녀의 대화가 시작됐다. 작품 세계, 예술관, 인생 경로 등에 대해 딸이 묻고 아버지가 답했다. 그러다 문득, 박씨는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하나라도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018년 아버지가 87세, 딸은 50세가 됐을 때의 일이다.


“아버지, 어떻게 살았어요?”

[박해윤 기자]

[박해윤 기자]

돌아보면 박씨에게 아버지는 늘 불편한 존재였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박서보는 딸의 작은 잘못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집에서 실수로 물이라도 쏟을라치면 곧장 불호령이 떨어졌다. “내, 너 이럴 줄 알았다”로 시작해 종국에 “너는 그따위로 살다 망할 것이다”로 마무리되는 ‘저주’가 일상이었다. 박씨와 두 오빠에게 아버지는 무시로 이런 얘기도 했다. 

“싸워라/ 이겨라/ 누구도 믿지 마라/ 너만 생각해라/ 먼저 치고 나가야 한다/ 인생은 경쟁이다/ 힘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는 온통 나쁜 놈만 우글댄다/ 언제 그들이 뒤통수를 칠지 모른다/ 네 것을 먼저 챙겨라/ 나눌 필요 없다.” 

이것은 박서보의 철학이기도 했다. 그는 매순간 세상과 싸웠고, 인생이라는 전장에서 승리하고자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붙였다. 

박서보는 1956년 기성 미술계의 고루함을 비판하며 반(反)국전 선언을 한 젊은 화가 그룹의 주역이다. 1970년대 이후에는 ‘한국 추상화의 기수’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일궜다. 대학 강단에 서고, 각종 미술 관련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동시에 미친 듯이 그림에 매달렸다. 작품이 잘 팔리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추상화’로 성공하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박씨 어머니는 6개월에 한 번씩 셋방을 옮겨 다니며, 세 자녀를 혼자 키우다시피 했다. 늘 바쁜 아버지는 자식들 학교 입학식, 졸업식에도 온 적이 없다. 박씨가 “아버지 딸인 게 싫고 창피했다”고 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사람들은 나를 보며 ‘세 자식 중 아버지와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겉모습도, 기질도 많이 닮았다는 걸. 그래서인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더 기분이 나빴다”고 털어놓았다. 박씨 삶의 상당 부분은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걸 증명하려는 몸부림으로 채워졌다. 

지난해 문득 그 아버지, 오랫동안 미워했던 한 인간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어쩌면 아버지가 너무 늙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이 들어 약하고 순해진 박서보는 이제 젊을 때의 독불장군이 아니었다. 딸이 자신에게 관심을 갖자 그는 지나온 삶의 궤적을 줄줄 풀어내기 시작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50년의 세월을 돌아 마침내 속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던 날, 박서보가 딸에게 들려준 첫 인생사는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하던 날의 기억이었다. 박서보가 홍대 미대 1학년생이던 시절이다. 당시 그는 본가가 있는 경기 안성을 떠나 서울 회현동 친척집에 살고 있었다. “국군이 평양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부 말만 믿고 서울에 머물다 인민군 탱크와 맞닥뜨렸다. 갖은 고초 끝에 안성 본가로 갔지만 인민군이 이미 거기까지 밀고 온 상태였다. 그는 미술과 학생이라는 이유로 지도 그리는 부역에 동원됐고 공산당 찬양 공연을 하는 그룹에 배속돼 무대장치도 그렸다. 동네 선후배 여럿이 이런저런 일을 맡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이 안성에 들이닥치자 상당수가 ‘사상범’으로 경찰에 붙들려 갔다. 다행히 체포를 피한 그는 이번엔 국군이 편성한 국민방위군에 소집돼 전장에 나서야 했다. 한겨울 전장에서 많은 청년이 추위와 배고픔을 겪다 허망하게 죽었다. 

그 와중에 박서보는 아버지를 잃었다. 1950년 12월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자신과 가족들 먹여 살릴 궁리를 해야 했다. 그는 나이를 32세로 고친 가짜 신분증을 발급받은 끝에 1951년 국민방위군에서 빠져나왔다. 이후 즉시 서울로 올라가 미군부대 근처를 떠돌며 돈을 벌었다. 장교 식당에 벽화를 그려주고, 미군들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을 모은 뒤 박서보가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홍대 전시(戰時) 캠퍼스로 가서 그림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어서 대학을 졸업해야 집안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박씨의 얘기다. 

“그 시절에 대한 아버지의 기억이 어찌나 생생한지, 이야기를 나누며 여러 번 놀랐다. 처음엔 지어낸 얘기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일을 겪었다면 결코 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통수를 조심해”

그사이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정부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장교 요원을 모집했다.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는 것으로 군복무를 대신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 약속을 믿고 박서보는 1954년 친구들과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모두 수료했을 때, 또 한 번 ‘뒤통수를 맞았다’. 정부가 육군보병학교 수료생을 현역으로 징집하려고, 대학 졸업식에 군용 트럭을 보낸 것이다. 다른 학교 학생에게 소식을 전해 들은 박서보는 졸업식에 불참하고 도망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전쟁 중 국민방위군으로 전장을 떠돌았고, 정부가 시킨 대로 군사학교도 다녔는데, 졸업하는 마당에 또다시 군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가짜 이름을 만들고, 신분증도 위조했다. 박서보의 본명은 ‘재홍’이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보’라는 이름을 썼다. 1954년 홍대 미대 졸업전을 소개한 ‘서울신문’ 기사에는 박재홍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1955년 10월 31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국전 입선자가 박서보로 소개된다. 동일 인물이다. 그사이 박서보가 ‘딴사람’이 된 것이다. 

전후 혼란한 상황이라 해도 20대 청년이 도망자로 사는 건 쉽지 않았다. 당시 정부는 징병거부자를 잡아내고자 거리에서 무시로 불심검문을 실시했다. 박서보는 일부러 수염을 길러 늙은이 흉내를 내고 다니며 검문을 피했다. 당시 경찰이던 동료 화가 김창열이 박서보와 같이 다니며 ‘신분 보증’을 해주는 식으로 그를 ‘살려준’ 일도 있다. 

박서보가 도망을 멈춘 건 1961년, 박정희 정부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때 육군보병학교 수료생들은 정부를 상대로 단체 소송을 내 일등병 만기 제대증을 받았다.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됐지만 과거의 상처는 오래 남았다. 박씨는 “20대 내내 도망 다니던 버릇 때문인지 아버지는 이후에도 관제 유니폼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위축됐다고 털어놓았다”고 했다. 

박서보는 박정희 정부 시절, 가까이 지내던 재일화가 이우환이 조총련과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아 같이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일도 있다. 자신이 정보 당국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음도 그제야 알았다. 엄혹한 시절이었다.


한국에서 일군 화업

아버지 박서보 화백의 사진 앞에 선 박승숙 씨. 부녀는 외모가 똑닮았다. [박해윤 기자]

아버지 박서보 화백의 사진 앞에 선 박승숙 씨. 부녀는 외모가 똑닮았다. [박해윤 기자]

박씨는 “당시 많은 아버지 동료가 해외 이주해 작업을 이어갔다. 그런 시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환기(미국) 김창열(프랑스) 등 박서보를 아끼던 해외 체류 화가 여럿이 그에게도 외국행을 권했다. 그러나 박서보는 한국에 남아 작업을 계속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 세계적 주목을 받는 ‘묘법’을 완성했다. 박씨가 설명하는 묘법의 제작 방식은 이렇다. 

“흰색 물감을 바른 캔버스 위에 연필로 반복해 선을 긋고, 다시 그 위에 흰색 물감을 발라 선을 지운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한가득 선을 그으면 지우고 그은 뒤 또 지운다. 그 과정을 수차례 반복하면 겹겹이 쌓이는 물감 층에서 과거의 잔상이 희미하게 올라와 묘한 입체적 느낌이 난다. 아버지는 새롭게 그리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의미로 이렇게 작업한 작품에 묘법(描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버지는 불혹의 시간을 오롯이 묘법을 하며 보냈다.” 

박서보는 1980년대부터 묘법 작업에 한지도 사용했다. 

“물에 불린 한지를 밀면 종이의 물성이 더욱 도드라진다. 한지의 매력에 푹 빠진 아버지는 미는 연필과 밀리는 바닥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이 지금 세계 미술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박씨는 “아버지의 삶을 듣고, 그의 작품을 다시 보면서 비로소 그라는 사람과 그의 작품이 시대와 상호관계 속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던 아버지와 그 시대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경하게 됐다”고도 털어놓았다.
 
박씨가 보기에 박서보는 여전히 한계가 많은 사람이다. “내 편과 남의 편으로 사람을 가르고, 좋고 싫고, 맞고 틀리고, 잘하고 못하고로 세상사를 판가름”한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아버지가 살아온 시대 때문이 아니었을까. 흑백논리로, 적군과 아군으로 세상을 가르느라 바쁘기만 했던 그 시절이 박서보를, 그리고 그 시대 사람들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닐까. 이게 지금 박씨 생각이다. 

박씨는 최근 아버지의 삶과 예술 세계, 그리고 그가 살아온 시대를 조망한 책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를 펴냈다. 박씨가 보기에 아버지 삶의 요체는 ‘노동’이었다. 그는 살아남고자, 승리하고자 삶의 모든 순간을 우직한 노동자처럼 살았다. 박씨가 보기에 지금 “자본주의의 미세먼지” 세례를 받고 있는 박서보의 작품도 실은 쉼 없는 노동의 산물이다. 박씨는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박씨의 바람은 전쟁을 겪지 않고, 그 시대의 아픔조차 아예 모르고 살아온 세대가 이 책을 통해 부모를 이해하고, 오늘 이 사회를 일궈낸 이들이 ‘나눠 갖고 있는’ 독특한 삶의 특징을 이해하게 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가자는 게 박씨 의견이다. 그는 “이 책을 쓰며 몇 개월간 삶이 크게 바뀌었다.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정말 펑펑 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남은 찌꺼기가 하나도 없다. 앞으로는 여기서 더 나아가 전쟁을 겪은 세대를 알리고 이해하게 하는 작업에 나서고 싶다”고 밝혔다.




신동아 201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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