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낱낱이 기록해 남기는 이유 |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

봉림대군 세자 책봉 | 의적 임꺽정과 토벌군의 횡포

  • 허윤만 |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입력2016-12-22 17:2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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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췌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낱낱이 기록해 남기는 이유

    아름다운 풍경을 파노라마 기법을 활용해 연속 촬영하면 여러 방향의 경치를 한 번에 다 담아낼 수 있다. 직접 가보지 못한 사람들도 아름다운 풍경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역사 기록도 마찬가지다. 대화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담은 상세한 기록이 있다면 파노라마 사진 보듯 더욱 생생한 역사 현장을 지켜볼 수 있다.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후계자 문제를 놓고 펼쳐진 일대 설전(舌戰)을 토씨 하나 안 놓치고 낱낱이 기록함으로써 읽는 사람이 마치 대화 현장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기사 하나가 있다.

    인조 23년(1645) 윤6월 2일. 인조는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서봉, 낙흥부원군 김자점 등 조정 주요 신료 16명을 긴급 소집했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두어 달 전 뜻밖의 죽음을 맞는 바람에 조정 안팎이 어수선할 무렵이다. 주요 신료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인조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 파문을 일으켰다.





    인조 : 내게 고질병이 있어 이따금 심해지는데 원손(元孫)은 저렇듯 어리고 약하다. 지금의 상황을 볼 때 원손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김류 : 백성과 신료들은 전하의 장수를 송축하고 있는데 전하께서 갑자기 이런 말씀을 하시니 신들은 무어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인조 : 내 병이 이러할 뿐 아니라 나랏일도 날로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으로 빠져들고 있으니 만일 내가 죽고 나면 어린 임금이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대군들 가운데서 후계자를 선택해 세우고자 한다.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왕위 계승자인 소현세자가 죽었으니 종법(宗法)에 따르면 그 후계는 자연히 소현세자의 장남이자 인조의 원손인 석철(石鐵)이 맡아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 석철은 열 살로 너무 어리다며 장성한 대군들, 즉 소현세자의 동생들 중에서 후사를 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전부터 소현세자를 지독히 싫어한 인조는 세자가 죽었으니 아예 후사를 바꿔 ‘미운 자식’의 자손에게 보위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자 좌의정 홍서봉을 위시해 이에 반발하는 신료들의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홍서봉 : 예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세자가 없을 때 세손이 보위를 잇는 것이 바꿀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었습니다. 원칙을 버리고 편법을 써서 처리하는 것은 국가에 좋은 일이 아닐 듯합니다.

    영중추부사 심열 : 신의 생각도 홍서봉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약간 병환이 있으셔도 아직 춘추가 한창이시고, 원손이 어리고 약하기는 해도 이미 나이가 열 살입니다. 예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종통(宗統)은 매우 중대한 일이니, 가벼이 의논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시작부터 여러 노신(老臣)의 반대에 부딪힌 인조는 전략을 약간 바꿔 당시 조정 서열 1위인 영의정 김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김류는 문득 옛이야기 하나를 꺼내 기울던 분위기를 슬쩍 돌려놓았다.


    김류 : 덕종(德宗)이 동궁으로 계시다가 정축년(1457, 세조3)에 승하하시고 예종(睿宗)이 무자년(1468, 세조14)에 종통을 이으셨는데, 당시 성종의 나이는 열두 살이고 월산대군은 나이가 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세조께서 왕세자를 이렇게 세우셨으니 그 까닭은 잘 모르겠습니다.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


    훗날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한 후 세조가 의경세자의 아들인 월산대군이나 자을산군 성종 대신에 둘째 아들 해양대군 예종을 후사로 결정한 것은 현재 인조가 원하는 구도와 모양새가 딱 들어맞는다. 김류는 이렇듯 인조에게 유리한 사례를 적시해 은근히 인조를 위한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준 셈이다.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었으니, 사실은 의경세자가 죽은 해에 월산대군은 고작 네 살, 성종은 갓난아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세조는 너무 어린 손자들 대신 장성한 차남 해양대군을 일단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부화뇌동  vs  마지막 저항


    그런데 김류는 후사 책봉 시기를 의경세자가 죽은 직후가 아닌 세조가 승하한 직후로 교묘하게 ‘바꿔치기’해 갓난아이 성종을 열두 살짜리로 둔갑시켜버렸다. 인조반정의 주역이자 인조의 최측근으로 오랫동안 권세를 누려온 김류는 애초부터 인조와 뜻을 같이했지만, 대놓고 인조 편을 들기에는 영의정으로서 자신의 입지가 애매했기에 이렇게 속임수를 써가며 인조를 은밀히 두둔한 것이다.

    한편 조정의 또 다른 실세인 낙흥부원군 김자점은 대표적인 소현세자 반대파였기에 대놓고 인조를 편들며 부화뇌동했다. 하지만 인조는 아무 근거도 없이 입에 발린 말을 반복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는지 “경은 원훈대신(元勳大臣)인데도 이처럼 흐리멍덩하게 말을 하는가” 하고 핀잔을 줬다.

    이렇듯 몇몇 힘 있는 신료가 인조 편을 들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대다수 신료는 ‘바꿀 수 없는 원칙’을 내세우며 후계자 교체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러자 이래저래 논리가 궁해진 인조는 버럭 성을 내며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려거든 아예 벼슬을 내놓고 떠나라고 엄포를 놓았다. 줄곧 반대해온 홍서봉 등 여러 신하는 인조의 격노 앞에서 마침내 은근슬쩍 백기를 들고 만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끝까지 쓴소리를 멈추지 않은 이가 있었다. 우찬성 이덕형이다.


    이덕형 : 신하의 도리상 갑자기 원칙에 반(反)하는 일이 있을 때 원칙을 지키자는 자세로 간쟁해야겠습니까, 아니면 편법을 써서 처리하자는 자세로 순응해야겠습니까. 오늘 성상께서 비록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이라고 하교하셨지만, 갑자기 이미 정해진 명호를 바꾸려는데 군신들은 모두 초목이 바람에 쏠리듯 추종하기만 하니, 장차 저런 신하들을 어디에다 쓰겠습니까.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


    하지만 이덕형의 마지막 저항은 인조의 묵살로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인조는 힘으로 신료들을 밀어붙이는 데 성공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훗날 효종(孝宗)이 되는 봉림대군을 후사로 결정해버렸다.


    “鄙夫와  小人 후세가 가릴 것”


    이날 일어난 일을 상세히 기록한 사관은 이런 말로 끝을 맺는다.



    아, 정도(正道)를 따르는 자를 군자(君子)라 하고, 임금의 말에 순순히 따르기만 하는 자를 비부(鄙夫, 마음씨가 더럽고 못된 사내)라 하며, 몰래 영합하는 자는 소인(小人)이라 할 뿐이다. 신은 누가 군자이고 누가 비부이며 누가 소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 입에서 나오면 그 마음을 숨길 수 없는 법이니, 그 말을 가지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 후세에 반드시 구분할 수 있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낱낱이 기록하여 모두 남겨 두는 바이다.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당시 상황을 통해 누가 군자이고 소인인지 충분히 분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최종 판단은 어디까지나 후대인들의 몫으로 남기려는 취지로 그날의 대화를 낱낱이 모아 공식 사초인 시정기(時政記)에 기록했고, 이것이 인조 사후에 편찬된 ‘인조실록’에 소상히 수록됐다.

    이를 통해 역사적 사건 하나가 370여 년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질 수 있었다. 이날의 대화는 ‘승정원일기’에도 실려 있지 않은, 오로지 ‘인조실록’ 만의 기록이다. “주상이 신료들을 불러 모아 후사를 봉림대군으로 바꾸었다”라고 간단히 남길 수도 있었던 사건을 이토록 상세한 기록으로 남긴 사관의 노력 덕에, 국가의 대사를 놓고 인조가 그의 신하들과 벌인 일을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다.



    의적 임꺽정과 토벌군의 횡포 | “모이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대표적인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 3인을 거론했다. 성호의 눈에는 단지 강성한 도적떼에 불과했던 이들을 오늘날 우리 대중은 탐관오리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을 구제해준 의적(義賊)으로 인식한다. 소설이나 드라마, 만화 등의 매체를 통해 대중과 친숙해진 이들은 모두가 실존인물이라 실록에서도 그 자취를 대략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행적이 가장 상세히 기록된 인물이 명종대에 활약한 임꺽정이다.

    당대 위정자들이 바라본 도적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의 대하소설이나 사극 드라마 주인공으로 그려진 호걸 임꺽정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가난한 민초들을 구제했건 안 했건 조정에서는 그저 관리들을 죽이고 강도짓을 일삼으며 조정의 안위를 위협하는 불순분자요, 위험한 세력으로 볼 뿐이었다.

    임꺽정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은 명종 14년(1559) 3월이다. 이후 그를 잡아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와 여러 대책이 쏟아졌지만, 임꺽정과 그 일당들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히려 세력을 늘려 점점 더 조정의 골칫덩이가 돼갔다. 포도관 이억근에 이어 부장 연천령마저 이들에게 목숨을 잃자 조정에서는 급기야 황해도와 강원도에 순경사(巡警使)까지 파견해 토벌에 열을 올렸다. 순경사는 종2품의 고위 무관이다. 외적이 침입하는 변란에 대응해야 할 이들이 일개 도적떼 토벌을 위해 파견된 셈이니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잖았다.


    의주목사 이수철의 조작극



    하지만 순경사 둘에 중앙의 정예병까지 투입하고도 약 한 달 동안 임꺽정의 종적도 찾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급기야 순경사를 소환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즈음, 뜻밖에도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조사 결과 체포된 자는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 가도치(加都致)였다.

    시일이 지나도 임꺽정을 잡지 못해 초조해진 이사증이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가도치를 모질게 고문해 임꺽정이라고 거짓 자백을 받아낸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임꺽정의 도당이다가 체포돼 투항한 서림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온 나라가 속을 뻔했다.

    이런 웃지 못할 사건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의주 목사 이수철이 임꺽정과 그의 배후 한온을 붙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조사 결과 이들은 해주 출신 군졸이었다. 이 역시 공명심에 눈이 먼 이수철이 저지른 조작극이었다. 그리고 조사 과정에서 이수철이 백발 노파를 임꺽정의 아내로 둔갑시키고 엉뚱한 백성을 모질게 고문해 임꺽정의 친족으로 꾸민 정황도 드러났다. 그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들통난 이상증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서림에게 뇌물을 먹여 입을 막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임꺽정의 무리로 조정이 시끄러워진 지 3년이 다 됐지만 토벌은 못한 채 조작 사건만 잇달아 일어나 세간의 웃음거리가 됐으니 조정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이에 좌의정 이준경이 다시 중앙군을 동원해서라도 도적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나섰고, 명종도 이를 지지했다. 이번에는 토포사(討捕使)라는 이름으로 황해도와 강원도에 고위급 무관들을 파견했다. 그중 황해도 토포사는 사납기로 유명한 남치근이란 사람이었다.


     “생쥐 무리에게 쇠뇌를 쏘려 하니…”



    조정의 위신을 세우기 위한 임금과 재상들의 결의는 활활 타올랐으나, 이를 바라보는 사관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토포사 파견이 결정된 기사 바로 아래에 사관은 다음과 같은 논평을 남겼다.

     

    국가가 선정을 베풀지 못하고 교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아 탐욕스러운 재상과 포악한 수령들이 백성의 뼈와 살을 깎고 고혈을 짜내고 있으니, 백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에 대고 호소할 길도 없다.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며 하루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워 조금이라도 더 살고자 도적이 됐다면 그것은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요, 그들의 죄가 아니다. 어찌 불쌍하지 않은가. 근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이런 사태를 막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준경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인정을 시행할 방도를 궁리하여 교화를 진흥시키는 정치에 힘쓰지 않고, 도리어 생쥐처럼 미약한 무리들에게 천균(千鈞) 무게의 쇠뇌(連弩, 기계식 활)를 쏘려 하니 얼마나 잘못된 판단인가. 황해도의 도적들이 횡행한다고 하지만 그 무리가 8, 9명에 불과하며,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다. 깊은 산골에 흩어져 숨어 있어 붙잡으려 해도 눈에 띄질 않으니, 진을 치고 대오를 이루어 교전할 수 있는 적국(敵國)과는 다르다. 그러니 4개 도의 병력을 합쳐서 일시에 호응하려 한들 어디서부터 손을 대겠는가.

    극심한 흉년과 무거운 조세로 백성이 피폐해져 가만히 두어도 저절로 무너질 상황이다. 그런데 또 군대를 일으켜서 변방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면 물자를 다 써버려 곤경에 처하고 나라와 민간의 재물이 모두 고갈될 것이다. 거기다가 장수의 횡포와 군졸들의 약탈이 더해지니 백성이 누구를 믿고 살아가겠는가. 이는 4개 도의 백성을 몰아붙여 모두 도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짓이다.                                        

    -명종실록 16년 10월 6일

     

    사관은 임꺽정 같은 도적들이 횡행하는 원인을 정치의 잘못에서 찾았다. 임꺽정의 주 활동 무대인 황해도는 당시 극심한 흉년과 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탐관오리들의 수탈까지 더해져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도처에 유랑민이 넘쳐났고 그나마 남은 백성도 떠난 자들의 조세 부담까지 뒤집어쓰며 결국 몰락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하지만 외척 윤원형을 비롯한 집권 세력은 여전히 수탈에만 열을 올리며 백성을 더더욱 궁지로 몰고 있었다.

    결국 굶주린 백성 중 일부는 살아남기 위해 도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임꺽정의 무리가 황해도 일대에 횡행하게 된 것이다. 임꺽정은 정치를 잘못한 조정이 만들어낸 일종의 괴물이었다.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이다”라 했으니, 만약 황해도에 선정이 널리 베풀어졌다면 임꺽정은 흉악한 도적떼의 괴수가 아닌 평범한 백정으로 소박하게 살았을 것이다.


    도적떼보다 포악한 토벌군


    결국 토포사 남치근이 임꺽정을 끈질기게 추적해 기어코 사로잡음으로써 임꺽정의 난은 종식됐다. 명종을 비롯한 온 조정은 앓던 이를 뽑은 듯 쾌재를 불렀고, 토벌의 일등 공신인 남치근은 자급도 오르고 토지와 노비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대간에서 남치근을 탄핵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토벌 당시 남치근은 임꺽정의 행적을 수사하기 위해 백성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 모질게 심문했다. 그 무렵 황해도는 이미 민심이 조정에 등을 돌려 백성과 아전 가운데 임꺽정에게 동조하거나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이들이 임꺽정의 행적을 순순히 자백하지 않자 가혹한 형벌이 잇따랐다.

    이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백성이 희생됐다. 남치근의 토포군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이 죽거나 재산을 빼앗겼고, 심지어 양반들까지도 매질을 당했다. 황해도 온 고을이 공포에 떨며 지난 몇 년 동안 임꺽정의 도당들이 끼친 피해보다 석 달 동안 남치근의 토벌군이 끼친 피해가 더 컸다고들 할 정도였다. 마침내 남치근은 토벌한 공으로 받은 은상(恩賞)을 모조리 빼앗기는 처분을 받았다.

    임꺽정의 난으로부터 45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실록에 기록된 대로 흉악한 도적으로서가 아닌, 민초들을 대변한 호걸이자 의적으로서 재조명되고 있다. 임꺽정의 난은 조정의 잘못된 정치가 초래한 민초들의 최후의 저항일 뿐이었다. 당시 임금과 대신들이 그저 타파해야 할 도적으로 몰았던 임꺽정을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백성’에 불과한 가련한 민초로 본 사관의 깊은 통찰력이 그 당시의 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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