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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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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는 내우외환 탓에 중국의 혼란이라는, 세계제국이 될 호기(好機)를 놓친다. 519년 안장왕 즉위 후 내전에 돌입하자 돌궐, 신라, 백제가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고구려 강서큰무덤 벽화.[문화재청]

정치가 어지러우면 참요(讖謠)가 유행한다. 2017년 한국에서 떠도는 ‘카더라 통신’을 보라. 조선 숙종 때 유행한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는 노래가 참요, 즉 조짐을 예언하는 민요의 대표적 사례다.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하는데, 민씨에게 유리한 가사를 볼 때 인현왕후가 속한 노론이 만들어 유행시켰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선무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다. 선무제는 한화(漢化)의 군주 효문제와 고구려 출신 문소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위는 고환(高歡)이 세운 동쪽의 북제(北齊)와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서쪽의 북주(北周)로 분열했다. 국력은 북제(550~577)가 북주(557~581)를 압도했으나 북제는 지도층의 끊임없는 권력 조작 놀음과 잦은 황권 교체로 정치가 늘 불안정했다. 북주는 참요를 퍼뜨려 북제의 혼란을 부추겼다. 북주의 장군 위효관(韋孝寬)이 북제 군부의 중핵 곡률광(斛律光)을 제거하고자 북제 수도 업성(鄴城)에 첩자를 심어 퍼뜨린 참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백승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명월은 업성을 비추네(百升飛上天 明月照鄴城).’

곡(斛)은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다. 100승(百升)이 1곡(斛)이므로 ‘백승’은 곧 곡률광을 뜻한다. 또한 ‘명월(明月)’이 곡률광의 자(字)였으니, 곡률광이 북제 황제 고위를 대체하리라는 암시를 참요에 담은 것이다. 무능과 음학(淫虐)의 군주 고위는 결국 이 참요에 의해 쓰러졌다. 고위는 576년 곡률광 일족을 살해했다. 자신의 팔다리를 스스로 자른 것이다. 곡률광을 죽인 다음 해인 577년 고위는 북주 무제 우문옹이 보낸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신라의 군사제도 당(幢) 

내란·왕권쟁탈戰 ··· 고구려,  帝國(제국)의 길 잃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신라는 고구려의 혼란을 틈타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뉴시스]

오르도스(河套)를 포함한 내몽골 거주 부족이 남하해 중원으로 이주하고, 그 빈자리를 몽골고원에 거주하는 부족이 채우는 현상은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키르기스→몽골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된다.

4세기 말 탁발선비가 국가의 중심을 화북(華北)으로 옮기자 몽골고원은 권력의 진공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등장한 국가가 혼혈선비족의 유연(柔然)이다. 유연은 유연족을 중심으로 흉노 발야계족, 고차 부복라족과 돌궐 아사나족 등이 결합된 다(多)종족 연합국가였다. 유연은 4월 축제 전통을 가진 탁발선비와는 달리 10월 제천 행사를 거행했다. 영토는 동으로는 랴오허, 서로는 중앙아시아 이르티슈 강에 이르렀다. 유연의 지배층은 투르크-몽골계로 보이나 구성원 대다수는 인도-유럽계 토하르인(Tocharian)으로 추정된다.

유연의 최고지도자는 투르크 계통이 사용한 ‘선우’가 아니라 몽골 계통의 ‘한(汗)’ 칭호를 썼다. 유연의 군사 체제는 100명을 1당(幢)으로 편성하는 당(幢) 제도였다. 10당을 1군(軍)으로 편성하고 군에는 장(將)을 뒀다. 유연의 십진법적 군사편제는 몽골제국까지 계승된다. 신라도 군사제도로 당(幢), 관직으로 각간(角干)을 뒀다. 신라는 진흥왕(534~576) 시기 대당(大幢)을 편성했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 등을 포함한 9서당(誓幢)을 운영했다.

북위는 초기엔 유연에 방어적 정책을 구사하다가 본거지를 공략하는 등 공격적 정책으로 전환했다. 북위가 끊임없이 유연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물자 공급을 차단해 유연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위의 대(對)유연 정책은 강남의 왕조들 및 고구려에 대한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돌궐, 유연을 무너뜨리다

북위는 유연 서쪽의 오손(烏孫), 고차(高車)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 동북쪽의 물길(勿吉)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유연은 이렇듯 동서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북위에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유연에 대한 북위의 공격적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강남의 왕조들과 동쪽의 고구려가 북위를 노리던 터라 유연 토벌에만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연을 멸망시킨 것은 북위가 아니라 돌궐(突厥)이었다. 돌궐은 철기 제작에 능한 부족이었다. 돌궐은 유연에 속했으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유연을 무너뜨렸다.

311년 ‘영가의 난’ 이후 남흉노에 중원(화북)을 빼앗긴 한족 일부는 창장 하류 양주(揚州)와 중류 형주(荊州) 방면으로 남하했다. 남하한 인구는 당시 화북 전체 인구의 약 8분의 1로 90만여 명에 달했다.

낭야 왕씨와 진군 사씨 등 교인(僑人·타향에서 임시로 머무는 사람)들이 주씨(朱氏), 육씨(陸氏), 고씨(顧氏) 등 강남 토착호족과 함께 사마씨를 지원해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들은 동진을 계승한 송-제-양-진 시대에도 중심 세력으로 남았다.

이 같은 강남의 역대 왕조들은 황무지 개간에 몰두했다. 한족의 황무지 개간으로 인해 쫓겨난 산월(山越), 파(巴), 요(獠) 등 원주민은 끊임없이 난을 일으켰으며, 일부는 한족에 동화됐다. 강남 마지막 왕조 진(陳)의 건국은 토호와 장군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의 원류는 강남의 원주민이다. ‘귀거래사’의 시인 도연명의 증조부로 동진에서 군사령관 격인 태위(太尉)를 지낸 도간(陶侃) 역시 원주민인 무릉만 출신.

사마씨의 동진(東晉)은 전진(前秦) 부견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한문명(漢文明)을 유지·발전시키는 구실을 한 다음 유유(劉裕·363~422)가 세운 송(宋)에 역사의 자리를 넘겨줬다. 동진 북부군(北府軍) 출신 유유는 410년 모용선비족 모용덕이 산둥의 광고를 중심으로 세운 남연(南燕), 413년 한족 초종이 사천에 세운 촉(蜀), 417년 강족 요장이 장안을 중심으로 세운 후진(後秦)을 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420년 동진을 찬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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