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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명장

‘한국 록 대부’의 음악 인생 60년

왜 지금 다시 ‘신중현’인가

  • | 임진모 음악평론가 jjinmoo@hanmail.net

‘한국 록 대부’의 음악 인생 60년

  • 6월 15일부터 7월 22일까지 종로구에 있는 홍익대학교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신중현의 음악으로 만든 창작 뮤지컬 ‘미인’이 공연 중이다. 그의 음악 인생 60년을 기념하는 공연이다. ‘왜 지금 다시 신중현’인지, 그의 음악적 성과를 되짚어보았다.
‘한국 록 대부’의 음악 인생 6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는 대중음악 대학에 관한 한 가장 유명하고 위세 당당한 버클리 음악대학이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대중음악 지망생이 세계적 음악가를 꿈꾸며 이곳으로 유학을 간다. 현재 보스턴 음대 총장인 로저 브라운은 2017년에 한국 출신 재학생들의 기를 살려주고 미래의 유학생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 한국에서 가장 명망 높고, 역사적 인정을 받는 음악가를 선정해 명예박사학위를 주자는 것이었다.
 
버클리 사상 최초로 한국인 음악가에게 수여하는 명예박사학위인 까닭에 총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 한국의 여러 뮤지션의 신상과 이력을 파악했다. 그들의 선택은 ‘한국 록(Korean rock)’의 시작인 신중현이었다. 브라운 총장은 인선을 마친 뒤 바로 한국으로 날아와 신중현의 거주지인 경기 양지를 찾았다. 상을 밝히는 체질이 아님에도 신중현은 버클리 음대의 인정과 노력에 감화해 미국행을 결심했다.


버클리 음대 사상 최초 한국음악가 명예박사학위

미국 음악계가 신중현을 주목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9년 일렉트릭 기타의 명가(名家)인 펜더사(社)로부터 ‘기타 연주 발전사에 기여’했다는 명목으로 맞춤형 기타를 헌정받기도 했다. 펜더가 기타를 만들어 바친 사람은 그때까지 여섯 명이었고 아시아에서는 신중현이 최초였다. 버클리 음대의 명예박사학위는 기타 연주를 넘어 음악 자체에 대한 평가였기에 신중현은 ‘음악 하는 사람한테는 영광’이라며 기뻐했다. “상을 받을 줄 상상하지 못했다. 정확한 표현일지는 모르지만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졸업식 현장에서 브라운 총장의 축사는 한국 유학생들과 가족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리고 그 축사엔 보스턴 음대가 신중현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는 이유와 신중현의 존재감을 주목한 이유가 고스란히 담겼다. 브라운 총장은 펜더사 제품전략가 리처드 맥도널드의 말을 빌려 신중현을 ‘절대적 음악 전설’이자 ‘끊임없이 발전하는 아티스트’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1970년대 한국 정부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견지한 반체제(anti-establishment)적 태도가 더욱 그의 위상을 드높였다.” 

버클리 음대는 정부와 기존 질서에 대한 그 반항적 면모를 로큰롤의 사회적 가치라는 맥락에서 높게 평가한 것이었다. 우리 음악사에서 신중현이 갖는 위상 또한 바로 여기에 기반을 둔다. ‘한국 록의 대부’라는 수식이 말해준다. 분명 신중현은 트로트와 미국산(産) 재즈풍 노래 일색인 가요 판에서 록밴드 애드포(Add4)를 결성해 한국 록의 여명기를 주도했고, ‘빗속의 여인’ ‘아름다운 강산’ ‘미인’ 등 기념비적인 로큰롤 가요를 만들었다.


‘괘씸죄’의 덫

2017년 5월 한국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신중현이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진모 제공]

2017년 5월 한국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신중현이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진모 제공]

버클리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하루 앞둔 축하 공연에 직접 출연한 신중현은 유명한 스탠더드 ‘가을낙엽(Autumn leaves)’을 기타로 연주해 들려줬다. 그만의 색깔을 살린 이 연주는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다음 날 보스턴 거리에서 만난 많은 미국인이 ‘대단한 연주를 들려줘 영광’이라는 찬사를 건네기도 했다. 신중현은 “전에 미국 공연 왔을 때도 느낀 바지만 그들은 음악을, 특히 연주를 들을 줄 안다”고 말했다. 

1950년대 엘비스 프레슬리와 1960년대 비틀스 이래로 청춘의 주요 문법이 된 로큰롤은 단지 그러한 예술적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연주와 빼어난 곡 구성, 대중성만이 전부는 아니다. 록은 특정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의 욕망과 사회적 시선과 연관돼 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기성사회의 가치 일반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록의 저항성이라는 키워드가 빚어진다. 다시 말해 신중현은 록의 두 축이라고 할 ‘예술성’과 ‘저항성’의 완벽한 실현이라는 점에서 우리 록의 대부로 불리는 것은 물론, 펜더의 기타 헌정과 버클리 음대의 명예박사 수여가 말해주듯 해외에서도 숭앙을 받는 것이다. 

신중현은 1960~70년대 박정희 군사정부 시절에 음악적 전성기를 맞았다. 애드포, 덩키스, ‘신중현과 더 멘’ 등 자신이 이끈 밴드 활동으로도 일가를 이뤘지만 이정화를 시작으로 펄시스터즈, 김추자, 박인수, 장현, 김정미로 이어지는 가수들을 훈련하고 곡을 써주는 작곡가 프로듀서로도 시절을 풍미했다. 그 무렵 신중현의 음악성과 대중적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대를 호령하던 그의 행보가 꺾인 것은 1972년에 청와대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로운 통치 즉 유신을 긍정적으로 다룬 노래를 만들어달라, 말하자면 ‘박정희 찬가’를 불러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는 이 요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후 ‘괘씸죄’의 덫에 걸려들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공연 때마다 경찰 단속이 이어졌다.


한국 토종의 냄새가 물씬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념식에서 신중현이 미국의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진모 제공]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념식에서 신중현이 미국의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진모 제공]

분노한 신중현은 독재자에게 바치는 노래가 아닌 우리나라의 강산과 국민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노래가 신중현과 더 멘의 ‘아름다운 강산’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라이브를 했을 때 보컬 박광수는 삭발을 했고 멤버들 모두 귀 주변에 머리핀을 꽂아 긴 머리를 걷어 올려 장발을 부각했다. 신중현은 그때를 회상하며 “한마디로 유신체제의 강압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버클리 음대의 총장이 축사에서 언급한 ‘반체제’ 용어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신중현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는 가운데 1975년에는 가요 역사상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된 대마초파동이 터진다. 당대 인기 포크와 로큰롤 가수 27명이 구속되고 9명이 입건되었다. 졸지에 대마초 공급선으로 엮인 신중현은 ‘대마초 왕초’ ‘대마초 수괴’ 딱지가 붙었다. 그와 그가 들려준 록은 ‘불온과 퇴폐’로 직결되었고 그것으로 그의 음악 생명은 끝이 났다. 1980년대 들어 활동을 재개했지만 리즈 시절이 훌쩍 지나면서 대중적 환대는 전혀 얻지 못했다. 신중현은 지금도 “대마초사건은 나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길을 잘 닦아온 우리 전체 음악의 수준과 기(氣)를 단숨에 꺾어버렸다”며 격노의 감정을 거두지 않는다. 

신중현 음악의 창의성, 탁월한 순도(純度)와 밀도는 지금 기준에서도 변함이 없다. 버클리 음대 재학생들은 신중현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이 있던 졸업식 콘서트에서 신중현 작품인 ‘즐거워’와 김정미에게 준 곡 ‘바람’과 ‘봄’을 연주해 경의를 표했다. 이 곡들 가운데 ‘신중현과 세 나그네’ 시절에 만든 ‘즐거워’는 우리에겐 덜 알려진 곡이지만 충격 그 자체였다. 현장에 있던 국내 관계자들과 외국 관객들까지 왜 그를 가리켜 ‘한국 록의 대부’로 떠받드는지 즉각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한 서구의 ‘록’ 스타일이 명백함에도, 거기에는 서구의 느낌이 아닌, 한국 토종의 냄새가 물씬했다. 보스턴에서 들으니 눈물이 날 만큼 한국적이었다. 생경한 서구의 록을 우리만의 호흡과 숨결로 창조해 제공했다는 것, 그것은 이전과 분리선을 치는 혁신적 위업이었다. 외국의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는 상황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임무가 그것을 창의적으로 재가공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신중현은 그 으뜸 인물이었던 셈이다. 

이 위업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노래가 1974년 한반도 남쪽 전체를 들썩거리게 한 문제작 ‘미인’이었다. 한 언론은 이 곡이 센세이션을 몰고 오자 ‘삼천만의 가요’라고 묘사했다. 음악관계자와 대중 모두가 대중가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이 곡을 두고 신중현은 당시 ‘야심’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 야심은 다름 아닌 가장 한국적인 록을 주조해낸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서양 리듬이 아닌 우리 고유의 장단과 가락을 녹여냈고 오음계로 곡을 썼다. 무엇보다 기타 리프를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켜는 방식으로 연주했다. 한국인이라는 인식 아래 전통의 내재적 가치를 신뢰하기에 나온 결실이 아닐 수 없었다. 명백한 록이지만 ‘한국적’인 맛이 가득했다. 또한 리프를 그렇게 전면에 내세운 것도 사실상 처음이었다.


우리 고유의 장단과 가락을 녹여낸 ‘미인’

가수 김수철은 “후대의 모든 기타리스트 지망생에게 기타를 잡도록 자극한 기념비적 곡”이라고 정의했다. 아들이자 1980년대 후반 국내 최초로 헤비메탈을 실험한 신대철은 “그 누구에게 단 5음계만으로 이렇게 멋진 곡을 써보라고 해보시라”며 100년 후에는 ‘아리랑’과 같은 반열에 오를 곡이라고 했다. 

2011년 초반 신중현이 ‘미인’을 기타로 연주하는 장면을 담은 텔레비전 광고가 방영되었다. 이 CF에서 곡은 아이들을 위한 동요로, 어르신들을 위한 판소리로, 세계적인 록 오페라로 다양하게 편곡되어 불렸다. 비록 광고이긴 했지만 다시금 ‘미인’이 어떤 스타일로 만들어도 결이 나오는 불후의 명작, 세기적 수작임을 확인해 주었다. 신중현이 만든 노래 23곡이 나오는, 막 개막한 창작 뮤지컬의 제목도 ‘미인’이다. 

록이 표방하는 정신, 그 저항성을 ‘록 스피릿’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는 가장 완벽한 록의 삶을 산 인물인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 인생 키워드는 혁신과 도전이었다. 국내 환경에서 가당치 않게 1964년에 록 밴드인 애드포를 결성한 것도 그렇지만 첫 앨범에 수록된 ‘빗속의 여인’을 들어보면 당대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화성으로 써낸 곡이라는 점에서 경이롭다. 이미자의 ‘섬마을선생님’,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보다 시기적으로 각각 2년, 3년, 8년 앞섰음을 전제하면 너무도 놀랍다. ‘당신은 어느 별에서 오신 겁니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러니 그 무렵에 활동하던 가수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곡을 써달라는 섭외가 폭발했다. 펄시스터즈(‘님아’), 김추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 곳에’), 박인수(‘봄비’), 장현(‘미련’), 김정미(‘봄’) 등 무수한 가수가 그의 곡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신중현사단’이란 수식이 언론에 등장했다. 국내에서 음악가 개인에게 사단이란 표현이 대중적으로 동원된 것 또한 신중현이 시작이었다.


창작 뮤지컬 ‘미인’

그의 혁신과 도전에 음악 스타일이 빠질 리 없다. 그가 가요 역사에 빛나는 명곡을 줄줄이 생산해낸 것 외에 여러 새로운 장르를 실험한 것이다. 정통 로큰롤뿐 아니라 당대 서구의 트렌드인 사이키델릭 록을 시도했고 ‘봄비’와 ‘님은 먼 곳에’가 말해주듯 당대 흑인음악인 소울(soul)을 소개했다. 따라서 그를 록의 프레임만으로 규정한다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고 본다. 요샛말로 ‘문화다양성’을 실천한 인물이라고 할까. 

그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재즈 또한 관계가 깊다. 한국 재즈의 전설인 고 정성조는 “신중현을 논할 때 록 이전에 재즈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중현 본인도 “재즈 감성은 여전하며 어쩌면 나는 재즈에서 록으로 전향한 케이스”라고 인정한다. 그는 실제로 재즈풍의 곡을 상당수 썼다. 그래서 그를 록의 대부가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선각자’로 일컫는 게 더 온당한 기술이라고 본다. 

이와 관련 신중현은 이런 말을 했다. “음악은 장르를 가리지 말고 모두 듣는 것이 좋다. 음악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듣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나는 록은 물론 재즈, 클래식, 우리 국악, 심지어 트로트도 좋아했다.” 

6월 15일 개막한 창작 뮤지컬 ‘미인’은 신중현이 써낸 히트 곡 23곡을 엮은 이른바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여기 노래를 들으면 그가 실험한 다채롭고 광대한 장르 팔레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미인’에 출연한 배우 김지철은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제 세대는 아니어서 잘 몰랐는데 대단한 것 같아요. 지금 들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가사 하나하나 느낌이 다 달라요. 보면 볼수록 점점 존경심이 듭니다.” 

그를 향한 동료와 후배들의 존경은 끝이 없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한 국내 음악가 대부분이 ‘영향을 준 음악과 음악가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비틀스와 같은 팝가수 외에 어김없이 신중현을 꼽는다. 이장희는 “남들도 다 좋아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에 열광했지만 국내로 하면 무조건 신중현 선생”이라고 했다. ‘송골매’ 출신 배철수는 신중현을 ‘우리 대중음악의 선각자’로 정의하면서 이렇게 토로한다. 

“중·고교 때는 주류 음악계가 성인가요 일변도여서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들을 게 없었다. 1972년 ‘신중현과 더 맨’의 ‘아름다운 강산’은 나로 하여금 ‘한국에도 이런 음악이 있나!’ 하는 충격의 회오리를 불렀다. 음악의 구성을 비롯한 모든 게 종래의 가요와는 완전히 달랐다. 1974년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도 마찬가지였다. ‘미인’의 성공을 보면서 ‘한국에서 록을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영감을 받았다.”


록은 영원한 음악문법

신중현이 후대로부터 얻는 존경과 숭배는 철저히 음악에 기초한다. 화제성이나 비주얼 또는 성공 공식에 대한 봉사와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지금 기준에서도 높은 수준의 곡들을 써냈다는 점과 실험의 자세로 일관했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거기에 음악가로서 지켜야 할 비타협적 자세와 자유를 향한 강골의 소유자라는 점을 더하면 완벽하다. 지금도 록에 대한 신념은 확고하다. 

“록은 세계가 만날 수 있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결코 흘러가는 하나의 유행이 아니라 영원한 음악문법이다. 나의 경우도 우리 정서를 록에다 얹어 우리의 장단과 흥을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목표로 살았다. 록은 ‘리얼’이고 ‘라이브’가 중심이 된다. 지금 유행의 대세가 힙합과 전자댄스음악(EDM)이란 것을 안다. 시대에 따라 환영받는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록은 흔들리지 않는다.” 

신중현은 흔들리지 않는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음악인다움(musicianship)과 음악적 태도(musical attitude)를 공히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강조한다. “결국 순수함이 이긴다. 음악가는 음악 지향, 돈, 명예와 관련해서 순수해야 한다. 대중도 결국에는 순수한 것을 사랑하고 인정한다.” 

다수의 걸작을 만들었으되 그의 음악은 돈과 인기가 아닌 자유를 품었다. 예술성과 사회성의 결합일 수도 있다. 우리와 우리 역사가 이런 높이와 크기의 뮤지션을 가졌다는 것은 다행이며 축복이다.


신동아 2018년 7월 호

| 임진모 음악평론가 jjinmo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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