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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85세 화가 이상원

“밑바닥 삶에서 최고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아직도 혁명을 꿈꾸는 85세 화가 이상원

  • ●영화 간판화가에서 순수 미술 원로로
    ●사실적 한국화 기법으로 현대 문명 소외 다뤄
    ●황토를 화폭에 물감처럼 사용
    ●예술 신조는 최초, 독창, 근성, 파격, 감동
    ●제 1회 동아미술상, 생존 작가 최초 국립러시아미술관 초대전
    ●사비 180억 투입해 이상원미술관 건립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

이 화가의 묘사력을 따라갈 이 과연 누가 있을까. 카메라 외에는 없을 성싶다. 그의 그림을 보면 사진보다 더 사실감 넘치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그런 재능 덕분에 안중근 의사의 공식 영정을 그렸다. 그의 영정 그림 봉안식은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당시 그는 초상화와 성화(聖畵)를 그려 생계를 잇는 30대 무명의 상업화가였기에 더욱 이채로운 일이었다. 

이상원(84) 화가는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재능과 불굴의 의지로 상업화가를 넘어 순수 미술의 거장으로 우뚝 섰다. 한국화 양식으로 극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리다가 동서양의 융합, 집중과 생략 등 독창적인 방식으로 추상 기법을 터득했다. 지금은 국내외에서 1급 작가로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자신의 예술 혁명을 꿈꾼다. 고향인 강원도 춘천 유포리 인근의 허름한 컨테이너 화실에서.


강원도 오지 화실서 유배생활 자청

화실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이상원미술관이 있다. 5년 전 강원 춘천시 사북면에 180억 원을 들여 미술관을 세웠다. 지자체나 정부 지원금 없이 사재로 지었다. 아들인 이승형 관장이 아버지의 작품을 관리하고 창작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건립을 주도했다. 그동안 20만 명이 다녀간 미술관은 별도의 숙박시설까지 갖추고 ‘뮤지엄스테이’를 운영하며 일반인의 예술 체험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이상원 화백은 20년 전 터 잡은 화실이 익숙하다며 이 안락하고 현대적인 미술관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이 화백을 5월 3일 오후 미술관에서 만났다. 화악산 숲속 미술관은 청량한 계곡 물소리와 몇몇 방문객의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뜨릴 뿐 평화롭고 한가로웠다. 

-이렇게 좋은 곳 놔두고 컨테이너 화실 생활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회화는 습기에 민감합니다. 그걸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고요. 작업은 컨테이너에서 하지만 잠은 그 옆에 있는 황토방에서 잡니다.” 

-그곳에 혼자 사시나요. 

“서울에 사는 아내가 가끔 반찬 해갖고 왔다갑니다. 혼자 살면 불편한 게 많지만, 좋은 게 더 많아요. 작가는 자기 신념에 몰입해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서울에서는 사람들 만나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겼어요. 그래서 스스로 유배생활을 자청한 겁니다. 참 잘 택한 것 같아요. 그러지 않았더라면 많은 작업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 화백은 요즘 청각이 둔해져 다른 사람과 대화하려면 목소리가 조금 커진다. 눈도 침침해졌다. 어지럼증도 약간 있어 지팡이를 짚고 다닌다. 하지만 이런 장애가 그의 창작혼을 잠재우지 못한다. 

“제가 허리가 꼿꼿한데, 건방지게 지팡이 짚고 다닌다고 할까 봐 걱정입니다, 하하. 잘 안 보이는 게 불만이긴 합니다. 하지만 제 나이에 어떡하겠어요. 느낌이나 생각은 머릿속에 다 저장돼 있어요. 생각나는 대로 토해내면 그림 작업이 돼요.”


내가 곧 흙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현대미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메시지를 담고 철학을 이야기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그린다. 이 화백의 그림 앞에 서면 아름다움보다 아픔, 감동, 따뜻함, 휴머니티를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그는 쓰고 버린 것들, 메마른 것, 노인들, 가장 힘겨운 곳에서 거칠게 사는 사람들을 그림의 대상으로 포착해왔다. 그것을 화가의 눈으로 재구성해서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이상원미술관 개관전 제목이 ‘버려진 것들에 대한 경의’였다. 그 맥락이 새 전시회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4월 3일~8월 31일 이상원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회 제목은 ‘歸土(귀토)’다.(40쪽 관련 기사) ‘귀토’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도 있지만, 죽음이라는 뜻도 담고 있다. 이번 ‘귀토’ 전은 화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인 생명, 근원, 삶의 현장을 상징한다. 특히 이 화백은 기존 작품 재료로 주로 사용해오던 먹과 유화물감에다 ‘흙(황토)’을 추가해 제작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황토를 화폭에 물감처럼 사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예술적 요소로서 흙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요. 

“평소 우리가 밟고 서는 땅, 흙에 대한 고마움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흙은 그림 재료로서도 훌륭하기 때문에 2년 가까이 화폭에 사용하는 실험을 했지요. 그런데 생각보다 색깔이 더 잘 살아나 매우 놀랐습니다. 저의 흙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 나이가 되면 땅속으로 들어가야 하거든요, 하하. 내가 갈 곳은 땅속밖에 없어요. 그림의 명제가 제 처지와 너무 딱 맞아떨어져요.”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그의 말이 농 반 진 반으로 들렸지만,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의 어느 젊은 여성 CEO가 “훌륭한 CEO가 되려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최고의 조언이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내가 곧 죽는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오르고,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지며, 일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화백은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흙의 색감과 질감을 캔버스로 옮겨온 것 아닐까.


흙의 색감 1000년 가기를

-신작 그림을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원작 앞에서 보니 따뜻한 느낌이 훨씬 강한데요. 

“부드럽죠. 그런 흙색에 제가 반한 것입니다. 흙은 빨간색이 아닌데도, 그것보다 더 강렬해요. 흙 아니면 낼 수 없는 느낌을 발견한 것이 하나의 성과라면 성과입니다.” 

신작은 색소폰, 전쟁, 바퀴, 생명과 관련된 그림 80여 점이다. 모두 그의 삶과 연관 있는 소재들이다. 색소폰은 예술가(이상원)를 상징한다. 전쟁은 그가 학도병으로서 직접 겪은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자동차 타이어는 그의 이름을 크게 빛낸 ‘시간과 공간’ 연작의 연장선이다. 바퀴는 문명 발전의 기폭제가 된 대표적 발명품이고, 인류에게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다. 생명체는 결국 흙에서 잉태되고,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가장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작품은 색소폰 연작이다. 귀로도 감상이 가능할 듯해 작품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아봤다. 눈으로 본 이미지의 잔영이 어떤 멜로디와 함께 어우러지는 느낌이 든다. 

-흙의 색감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아무래도 조금은 희미해지겠지요.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그 색감은 더 좋아질 겁니다. 퇴색하는 느낌도 좋잖아요. 아마 1000년은 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명화는 작가가 죽은 다음에 더욱 빛나는 것이니까 제가 죽은 뒤 한 50년 지나면 가치가 더 있을 겁니다, 하하.” 

-극사실주의 작가라는 호칭이 붙어왔는데요. 이번 그림에서는 그런 특성이 완화된 느낌입니다. 


“사실 저는 극사실주의 작가는 아닙니다. 초기에는 그런 면이 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추상화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어떤 이미지를 그릴 때 전체를 다 그릴 수 없고 특정 부분에서 풀어야(생략하거나 여백으로 남기는) 하거든요. 그런데 그 작업이 상당히 어려워요.” 

-흙 묻은 타이어도 그림의 대상이 된다는 게 ‘어,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우리가 늘 타고 다니던 자동차의 바퀴입니다. 현대 문명에서 그처럼 공로가 많은 것을 헌신짝 버리듯 하니 안타깝습니다. 1990년대에 그린 ‘시간과 공간’ 연작에서는 타이어가 땅과 눈을 밟고 지나간 흔적을 그렸지요. 그 연장선에서 그런 흔적을 남긴 타이어를 그린 겁니다. 

그런데 흙이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겁니다. 흙을 그림 재료로 가져오는 것을 더 일찍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재능을 알아준 사람들

이상원 화백은 1990년대 한국화 양식에 극사실주의 기법을 가미한 ‘동해인’ 인물 연작을 내놓았다.

이상원 화백은 1990년대 한국화 양식에 극사실주의 기법을 가미한 ‘동해인’ 인물 연작을 내놓았다.

이상원 화백은 1935년 강원 춘천 신북읍 유포리에서 태어났다. 소양강댐 근처 오지 마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농사 외에는 다른 생업을 꿈꿀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는 화가의 꿈을 키웠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랐는데 무엇이 그림에 대한 환상을 갖게 했는지요. 

“여섯 살 땐가 할아버지가 돋보기를 코에 걸고 뭔가 읽고 있는 것이 재미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다락에 올라가 몰래 할아버지 모습을 여러 장 그리곤 했어요. 어느 날 할아버지가 그걸 보시고는 ‘우리 집안에도 천재가 나왔네’ 하시는 겁니다. 그 말씀이 신기해서 빈 종이만 있으면 자꾸 그림을 그렸지요. 동네 사람들도 제 재주를 알고는 그려달라고 하는 분이 많았어요. 그림을 그려주면 아주머니들이 쌀도 갖다주곤 했지요.” 

고교를 다니던 중 6·25전쟁이 발발해 그는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했다.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막노동을 시작했는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은 그곳에서도 다른 사람의 눈에 띄었다. 

“잘 곳도 없고 해서 공사판에서 먹고 자고 일했지요. 인부들이 점심을 먹고 잠시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연필과 종이가 있기에 콧수염을 길러 눈에 띄는 페인트업자를 그려봤어요. 그분이 제 그림을 보고는 그곳에 있기에는 아까운 천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극장 간판용 페인트를 공급하는 업자인데, 극장 간판부에 추천해줄 수 있다고 해요. 그래서 그와 함께 동양극장으로 가서 간판부장에게 제 그림을 보여줬지요. 간판부장은 저와 제 그림을 번갈아보더니 젊은 사람 그림이 아니라며 칭찬했어요. 그렇게 간판 그리는 일을 시작했지요.” 

그는 2년 정도 영화 간판을 그렸는데, 정점은 영화 ‘벤허’ 그림이었다. 당시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개봉하면서 다른 극장 소속인 그에게 간판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등장인물이 많고 웅장한 장면을 제대로 그리려면 많은 노력과 재능이 필요했다. 

“그 영화 간판이 장안에 화젯거리가 됐어요. 제가 전차 경주를 아주 실감 나게 그렸거든요. 사실 그 간판 때문에 아내를 만났어요. 제 친구 여동생인데, 어릴 때 보고 만난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간판을 보고 제게 전화를 해서 간판 그림이 화제라면서 빵을 사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만나기 시작해 나중엔 결혼까지 하게 됐지요.”


미군부대에 성화 납품해 큰돈 벌어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이상원 화백이 그린 영정이 전시됐다. [이상원미술관 제공]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이상원 화백이 그린 영정이 전시됐다. [이상원미술관 제공]

그의 그림 실력은 미8군에 초상화·성화(聖畵)를 납품하는 양모 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특히 성화 작업이 큰돈이 된다며 설득하는 통에 그는 2년 만에 간판화가 생활을 그만뒀다. 

“성화 주문은 보통 몇 백 장씩 들어왔어요. 그때 작업실에서 일하는 40명이 며칠 일하면 집 한 채 값을 벌었지요. 그림 한 장에 10달러, 20달러짜리도 있었고, 그보다 비싼 것도 있었습니다.” 

돈을 달러로 받아서 환전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는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젊은 사람이 달러를 뭉치로 갖고 다닌다고 소문이 나면서 그 출처에 대한 의구심이 만든 해프닝이었다. 돈이 생기면 그는 부동산을 사뒀다. 나중에 그것이 이상원미술관을 짓는 밑천이됐다. 

-안중근 의사 영정은 어떻게 그리게 됐는지요.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초상화를 그린 게 계기가 됐어요. 양씨가 자신의 사업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니까 사령관 그림을 아주 잘 그려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사령관 집에 들른 노산 이은상 선생이 그 그림을 보고 제게 연락해 왔습니다.” 

이후 그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 외국 국가원수급 인사들의 초상화 등을 제작하면서 상업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런데 당시 알게 된 노산 선생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어느 날 노산은 그에게 ‘厚岩藝術世界(후암예술세계)’라는 휘호를 써주면서 순수 미술을 해보라고 권했다. 

“노산 선생님은 제게 ‘당신, 그림 그리는 기술이 정말 좋지만, 기술자지 작가는 아니야. 작가는 사상을 가지고 있어야 해. 마음속에 있는 것을 토해낼 수 있는 그런 게 있어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자꾸만 그 말이 마음에 걸리는 겁니다. 그때 나이가 40이었어요. 제 마음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진짜 예술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다행히 아내도 제 생각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았던 시절

이후 이 화백은 독학으로 전통 수묵화를 연마했고,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해갔다. 1975년 나이 마흔에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시간과 공간 속으로’라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했다. 이 작품은 대상 부여 여부를 두고 심사위원 간에 큰 논쟁거리가 됐다. 1978년엔 제1회 동아미술제에서 동아미술상을, 중앙미술대전에선 특선을 거머쥐었다. 

이 화백은 수묵을 기본으로 하고 유화물감을 함께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극사실주의 기법을 만들어갔다. 최초의 개인전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86년 서울갤러리에서 열렸다. 이때 그의 대표작이 된 ‘시간과 공간’ 연작, ‘마대의 얼굴’ 연작을 작업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이 그대로 반영된 ‘동해인’이라는 인물 연작을 내놓았다. 이런 화풍은 이후 인도 바라나시 여행에서 길어 올린 ‘영원의 초상’ 인물화 연작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국내 화단보다 해외 화단에서 더 반응이 좋았다. 1998년 연해주 주립미술관 초대전을 시작으로 프랑스 세인트 살페트리에 성당 전시회(1999년), 국립러시아미술관 전시회(1999년), 2001년 중국 상하이미술관 초대전 등이 한국 언론에 소개되면서 ‘입지전적 독학 화가’로 다시 조명받았다. 

“국립러시아미술관에서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나라를 위해 뭔가 큰일을 하는 태몽을 꾸었다고 했어요.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그곳에서 생존 작가로는 처음으로 제 작품을 전시했으니 국가 외교에 도움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미술관은 저의 자동차 바퀴 그림을 구입했어요.”


마음속 응어리와 야심

이 화백은 그동안 줄곧 사람들의 시선에서 소외된 쇠락하고 버려진 대상을 그림 소재로 삼아왔다. 요즘 보기 드문 입지전(立志傳)의 주인공이 된 자신도 그런 환경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걸까. 

“작가 마음속에는 어떤 응어리가 있어요. 뭔가를 이뤄보겠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떤 야심(野心)이 있어요. 그래서 멈출 수가 없어요. 앞으로 죽기 전에 제 그림에서 또 다른 혁명이 일어나야 되는데…. 작가는 자기 그림에 불만이 많아야 해요. 만족하면 끝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작업이 하나 있어요. 상상력을 좀 발휘해야 하겠지만, 구름 위에 찍힌 바퀴 자국을 그리고 싶어요. 어떤 형태가 될지 흥미롭지 않은가요? 

그림 그리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껴요. 요즘도 저녁 먹고 뭔가 떠올라 잠시 화구 앞에 앉아서 손질하다 보면 날이 훤히 밝아오기도 합니다. 죽는 날까지 작업에 몰두할 겁니다. 그림 작업하다가 미완성인 상태에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게 제 소원이에요. 남이 그리지 않은 것을 처음으로 독창적으로 그리는 게 중요해요. 작가 근성을 갖고 파격적으로, 사람의 감동을 끌어내야 해요. 그게 제가 끝까지 붙들고 있는 화가의 신조입니다.”




신동아 2019년 6월호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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