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나의 삶 나의 이야기

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나는 왜 북한인권 운동가가 됐나

  • 한기홍 |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paul@nknet.org

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1/2
  •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노동운동을 했다. 용접 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업했고, 철도청 기능직 노동자로 일했다. 사상적 방황, 전환을 거쳐 북한인권 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북한의 인권은 진보·보수가 다툴 사안이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
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한기홍(오른쪽)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와 2016년 북한인권국제영화제 초청작 ‘더 월’의 데이비드 킨셀라 감독. ▶‘더 월’ 포스터

내아버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분으로 자수성가해 경기 수원시에서 LPG 가스 대리점과 한일전기 총판을 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9년부터 집에서 정부에 비판적이던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나는 신문을 열심히 읽었고 자연스럽게 정치·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78년 말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여당인 공화당에 득표율에서 앞서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강력한 투쟁에 나섰다. 박정희 정권과 신민당의 대결은 1979년 내내 긴장 속에 진행됐다. 박정희 정권은 뉴욕타임스 인터뷰를 문제 삼아 김영삼(YS) 신민당 총재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했다. YS 제명이 계기로 작용한 부마항쟁(부산·마산의 대규모 시위)이 10·26으로 이어지면서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해 나는 입시에서 떨어졌다.

1980년 봄, 전두환 신(新)군부의 집권 시도에 저항하는 시위가 각 대학과 거리에서 진행됐다. 내가 서울역 인근 입시학원에 다닐 때인데, 5월 중순에는 서울역과 남대문 일대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광주민주화운동도 발생했다. 나는 시위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재수생 신분인 터라 그러지 못했다. 학원 공부와는 별개로 백낙청, 리영희, 송건호, 한완상 등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나 해직 교수 등이 쓴 사회 비판서를 많이 읽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다

1981년 봄 연세대에 입학했다. 운동권 서클이던 탈춤반에 가입했다. 농악과 탈춤을 배웠으나 의식교육이 주였다. 2학년 때는 지하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학교 수업을 팽개치고 전업적 학생운동가가 됐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전환시대의 논리’ ‘8억 인과의 대화’ 같은 책을 섭렵했다. 운동권 동기들보다 이른 1학년 2학기부터 일본어 읽는 법을 배워 ‘경제사 입문’ ‘소유와 생산양식의 역사이론’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등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경제서적을 읽었다. 2, 3학년 때는 마르크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다양한 서적과 좌파적 혹은 민족주의적 인식에서 쓰인 한국 근·현대사 책을 독파했다.

교내·외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거나 비밀리에 유인물을 살포할 때마다 앞장서 참여했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충북 진천군에서 열흘 가까이 농촌활동을 했다. 그해 말 군사훈련 교육 때 시위를 주동했다가 난생처음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았다. 2학년 여름방학 때는 뚝섬에 있는 한 공장에 일주일간 취업해 공장 현실을 체험했다.

1983년 가을 교내 시위를 주동했다가 구속돼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사회 각 부문에서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는 분위기가 거세지기 시작할 즈음이다. 전두환 정권이 유화적 태도를 보이면서 이듬해 봄 수감된 학생들이 전원 석방된다. 나도 6개월 만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나는 학생운동과 수감생활을 거치면서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려면 단순히 민주화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현존 제도를 전복하는 혁명이 요구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돼 있었다.

철도청에 노동자로 취업

사회주의 이론에서 혁명의 주력으로 중요시하는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고, 의식화하고자 용접 기술을 배워 공장에 취직했다. 인쇄공, 철도청 기능직 노동자 등으로 취업해 노동운동을 지속했다. 1984년 봄부터 2년여간은 인천 부평구 일대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서울로 활동 지역을 옮겨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도한 서울노동운동연합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보안사의 추적을 받았다. 을지로, 충무로 일대의 인쇄공을 조직해 함께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1988년 여름 서울지역인쇄노동조합 결성에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3년간 일했다. 그러곤 철도청에 기능직으로 취업했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대안은 불확실했다. 철도청 노동자로서 노동운동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생활인으로 변해가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학생운동을 하던 때는 NL(민족해방) PD(민중민주) 등의 노선이 등장하기 전이다. 나는 리영희 교수가 쓴 책을 읽으면서 중국 혁명에 매력을 느꼈다. 훗날 문화대혁명이 명분과는 달리 권력투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까지는 중국 혁명을 동경했다. 그런 나에게 1989년 톈안먼 시위는 큰 충격이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시위를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주의에 의구심을 가졌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1990년대 초반에 걸쳐 옛 소련을 비롯해 현존하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사상적 방황이 시작됐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던져버렸으나 점진적 방식을 통해서라도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진보라는 생각은 버리지 못했다. 한번 약해진 혁명에 대한 열정이 사상적 측면에서도 회의감을 느끼게 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에는 사상적 공백을 메우고자 논어 맹자 한비자 등 중국 고전철학에 관심을 가졌고 스터디 그룹에서 혹은 현대판 서당에서 공부했다. 1996년 무렵에는 공부를 좀 더 심도 있게 하고자 중국으로 유학을 가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지내다 대선이 있던 1997년 말 철도청을 그만두면서 노동운동을 정리했다.

사상적 방황과 전환

1997년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일성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인민을 굶겨 죽이는가”였다. 나는 북한을 추종하던 이른바 주사파는 아니었기에 북한에 대해 약간의 비판적 의식을 갖기는 했으나, 북한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김일성 등 지도부가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해 북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주체사상을 만들었다는 황장엽 씨가 망명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가 북한 체제에 관해 쓴 글의 핵심은 ‘북한의 사회주의는 봉건체제에 가까우며 진보적인 체제가 아니라 낙후한 체제’라는 것이었다. 황장엽 씨의 글을 읽으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확대됐다. 탈북자들의 수기도 찾아 읽었는데 믿기 어려울 만큼 내용이 끔찍했다. 1998년에는 요덕수용소 출신 탈북자를 직접 만났는데 그가 전한 수용소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다.

1/2
한기홍 |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paul@nknet.org
목록 닫기

인민 굶긴 사회주의에 회의… 北 주민 ‘민주화 주체’ 되는 길 돕기로

댓글 창 닫기

2017/04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