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호

新東亞 | 초대석

“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 펴낸 자현 스님

  • 입력2017-02-28 13: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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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절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칠성각으로도 불리는 삼성각(三聖閣)이다. 보통 절 뒤쪽에 세워진 이 사당은 불교와 무속신앙이 결합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삼성각일까. 일부에서는 그 사찰이 세워진 곳의 산신(山神)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七星), 홀로 깨우쳤다 하여 독성(獨聖)으로 불리는 나반존자, 이 셋을 모시는 경우가 많아 그런 호칭이 생겼다고 본다.

    하지만 양산 통도사나 순천 송광사의 삼성각에 가면 세 승려의 초상화를 만나게 된다. 지공 선현(指空 禪賢), 나옹 혜근(懶翁 慧勤), 무학 자초(無學 自超)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세 번째 무학(1327~1405)일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을 풀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새 도읍지로 한양을 추거했다는 조선의 왕사(王師)다. 나옹(1320~1376)도 유명하다. 공민왕의 왕사에 임명된 고려 말의 고승이다. 하지만 지공(1300~1361)이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국적 풍모로 눈길을 끄는 그는 인도 출신의 승려다.

    언뜻 활동 무대가 달라 보이는 이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뭘까. 세 사람은 사제(師弟) 관계다. 지공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수만㎞를 주유편력(周遊遍歷)한 세계인이다. 인도 중북부에서 태어나 스리랑카와 티베트를 거쳐 몽골제국(元)의 수도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불력을 펼치다 고려까지 휘젓고 간 인물이다. 경남 합천의 통도사에도 머물렀다 하니 그의 이동거리는 당의 현장이나 신라의 혜초를 능가한다.



    삼성각의 진짜 주인공들

    원 태정제를 대신해 금강산 명찰에 향공양을 올리기 위한 어향사(御香使)로 고려에 파견될 당시 지공의 나이는 스물여섯. 하지만 푸른 눈을 지녔다 알려진 이 인도 승려는 ‘살아 있는 부처’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2년 7개월이나 머물렀다. 벽안의 젊은 수행자라는 점에서 얼핏 우리 시대의 현각(玄覺)을 떠올리게 하지만 당시 그가 누린 위상은 오늘날의 달라이 라마에 비견될 정도였다. 개경 감로사에 머물 땐 그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고 하루에 수만 명에게 계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지공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 원으로 돌아간 뒤로도 그의 문도가 되려는 고려 유학승이 줄을 이었다. 그런 지공이 자신의 제자 중 최고로 꼽은 인물이 나옹이고 그 나옹의 제자가 무학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인도의 최고승, 고려의 최고승, 조선의 최고승 셋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불광출판사)를 펴낸 자현(玆玄·46) 스님은 “삼성각의 성은 ‘성인 성(聖)’자로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쓰는 한자라는 점에서 지공, 나옹, 무학 세 고승을 모시는 사당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율경), 동국대 미술사학, 고려대 철학(선불교)과 역사교육학까지 박사 학위만 4개를 지닌 그의 책에는 한국 조계종의 법맥(法脈)에 오류가 있다는 비판도 담겨 있다. 그는 조계종 소속 오대산 월정사의 교무국장이다.

    ▼ 지공, 나옹, 무학을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사찰을 세우거나 불교의식을 치를 때 그것이 불법(佛法)에 부합함을 인증하는 3명의 승려라는 말입니다. 대규모 불교의식을 거행하는 사찰마다 삼성각에 이 세 분의 초상화를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도 마가다국의 왕자 출신이라 밝힌 지공은 자신의 부계(父系)는 붓다와 이어지고 모계(母系)는 달마와 이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붓다는 불교의 창시자고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불교 최고의 혈통임을 자부한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내공이 상당했음은 도처에서 확인됩니다. 당시 고려 최고 문신이던 민지(閔漬)는 일흔아홉 나이에 이 스물여섯 지공을 만나 그의 문도가 되고 그 가르침을 정리한 ‘지요서(旨要序)’ 집필을 간신히 마치고 6개월 뒤 숨을 거둘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최고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옹은 고려의 왕사가 되고, 지공과 나옹을 함께 사사한 무학은 조선의 왕사가 됩니다. 그러니 이들 셋의 인가를 받았음을 내세우는 것만큼 확실한 정통성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여말삼사(麗末三師)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구성원이 다르다.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白雲 景閑·1298~1374)과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입니다. 백운은 그 유명한 ‘직지심경’의 저자이고 보우는 공민왕 집권 초 국사(國師)에 임명된 분입니다. 세 사람 모두 득도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강남지역에서 유행하던 임제종 계파의 고승들에게서 이를 인정받는 오후인가(悟後認可)를 받았습니다. 나옹은 평산 처림(平山 處林·1279~1361)의 인가를 받았고, 백운과 보우는 석옥 청공(石屋 淸珙·1272~1352)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나옹과 백운은 지공의 인가도 받습니다. 무학은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고려로 돌아온 뒤 사형이기도 한 나옹의 제자가 돼 그의 인가를 받습니다.”



    조계종 법맥의 뿌리

    ▼ 오후인가라는 절차가 왜 중요했나.

    “선불교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을 중시합니다. 깨달음의 등불을 전수한다 하여 전등(傳燈)이라 할 정도지요. 한국의 선종은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으로 건너가 남종선의 법맥을 받아온 아홉 고승이 연 9산선문(九山禪門)을 기원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몽골 간섭기를 거치면서 선문은 남았지만 정작 법맥은 끊겨버립니다. 여말삼사는 중국에 가서 전등을 다시 받아옴으로써 그 끊긴 법맥을 되살려냈다고 평가받는 것입니다.”

    ▼ 과거엔 전남 순천의 길상사를 송광사로 바꾸면서 그 뒷산을 조계산으로 명명한 보조 지눌(普照 知訥·1158~1210)이 조계종의 창시자로 알려졌는데 요즘은 태고 보우를 중흥조(中興祖)로 부르며 그의 법맥만을 정통으로 인정한다.



    “조계종이 종단의 종지를 뚜렷하게 밝혔다 하여 중천조(重闡祖)로 받드는 지눌은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점에서 대단한 분이지만 오후인가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에 전파된 남종선의 돈오돈수(頓悟頓修·단박의 깨달음으로 수행이 완성된다)가 아닌 돈오점수(頓悟漸修·깨닫더라도 수행을 계속해야 이를 유지할 수 있다)를 주장했다 하여 후대의 성철 스님으로부터 ‘이단아’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여말삼사의 계보 중 살아남은 법맥을 찾으니 환암 혼수(幻菴 混修·1320~1392)의 것인데 그가 태고 보우의 제자라는 점에서 보우를 중흥조로 받들게 된 것입니다.”

    ▼ 환암 혼수는 나옹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나옹 - 혼수의 법맥을 정통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계에선 1980년대 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님이 이를 주장한 이래 일반화한 주장입니다. ‘나옹행장’과 ‘혼수비문’ 모두에 두 사람이 오대산에서 사제관계를 맺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혼수는 나옹이 공민왕의 초빙으로 교종과 선종을 통합한 최고의 승과시험인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했을 때 유일무이한 합격생이었습니다. 나옹 사후 ‘나옹어록’ 편찬을 주도한 인물도 혼수입니다. 나옹과 혼수가 9산선문 중에서 사굴산문 출신만 맡을 수 있는 송광사 주지를 맡은 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보우는 가지산문 출신입니다. 보우의 대표 제자는 혼수가 아니라 목암 찬영(木庵 粲英·1328~1390)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불교의 숨겨진 신화, 나옹

    ▼ 그런데 왜 보우의 법맥만 이어받았다는 평가가 나오게 됐나.

    “동아시아 종교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습니다. 조선 건국 후 이성계의 왕사가 된 무학은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이용해 혼수를 밀어내고 나옹의 맏상좌 자리를 빼앗습니다. 나옹이 말년에 심혈을 기울여 중창한 양주 회암사는 한국불교의 총본산 역할을 하는데 무학이 그 주지 자리를 꿰찹니다. 이후 회암사가 조선 명종 때 불타 없어질 때까지 무학의 제자가 이를 독점합니다. 반면 혼수는 고려의 마지막 국사로서 1392년 조선 건국 직후 바로 숨집니다. 이후 무학의 문도가 나옹의 법맥을 독차지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 그 법맥이 끊기면서 비주류로 밀려 있던 보우-혼수 법맥이 주류가 돼버린 겁니다.”

    ▼ 유독 나옹을 정통으로 봐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보우나 무학은 권력과 결탁한 권승(權僧)에 가깝습니다. 반대로 백운과 혼수는 청정 수행에 주력했습니다. 나옹은 수행승의 청정함을 지키면서도 권력을 통해 민중에 다가서려 했습니다. ‘공부선’을 통해 선종통합을 이루고, 불교개혁의 중심지로 회암사를 중창하며 불교를 민중 친화적으로 바꿔나갔습니다. 원의 라마교의 영향으로 고려 말 승려의 절반이 아내를 둔 재가승이었는데 나옹의 개혁으로 이런 풍토가 사라집니다. 나옹의 민중친화적 행보는 문학에서도 확인됩니다. 가사문학의 효시로 거론되는 ‘서왕가’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로 시작하는 한시도 나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모든 사찰에서 새벽예불 때 읊는 발원문도 나옹이 쓴 것입니다. 나옹은 회암사 중창 때는 한국불교사상 최초로 민간모금운동도 펼쳤습니다. 회암사 중축 문제로 탄핵당한 빌미도 ‘나랏돈을 축냈다’가 아니라 ‘회암사로 너무 많은 사람을 끌어 모은다’였습니다.”

    ▼ 그런 대중적 인기로 인해 한국불교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후 신격화가 이뤄졌다는데.

    “나옹은 한국불교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 있는 붓다(생불)’로 추앙받은 인물입니다. 신라 때 의상도 상당한 신격화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지만 나옹의 경우엔 석가모니의 화신으로 비견될 정도로 체계적 신격화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할 수 있습니다. 나옹을 화장한 뒤 수습한 치아가 석가모니와 같은 40개라는 기록과 석가모니가 나옹의 출현을 예언했다는 ‘치성광명경’이란 조작된 경전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까요.”

    ▼ 나옹의 부상에는 고려에서 슈퍼스타 대접을 받던 지공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게으른 늙은이’를 뜻하는 나옹이란 호 때문에 그가 고령에 숨졌다 생각들 하시지만 열반할 때 나이가 56세에 불과했습니다. 평민 출신으로 승과도 거치지 않은 나옹이 그 짧은 시간에 생불의 반열에 오른 데는 그 자신의 불력(佛力)이 뛰어난 점도 있지만 지공의 후광효과도 컸습니다. 10년간 중국 대륙을 주유하다 돌아온 나옹은 보우와 신돈에게 밀려 큰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다 1370년 공부선의 주관자로 전격 발탁되며 급부상합니다. 이는 그해 초 펼쳐진 흥미로운 이벤트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9년 전 열반한 지공의 영골(靈骨·사리) 일부가 고려로 옮겨지는 사건입니다.”



    승부사 기질도 닮은 지공과 나옹

    ▼ 지공에 대한 평가가 고려와 조선에서 바뀌면서 나옹에 대판 평가절하도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지공에 대한 고려 민중의 열기는 원의 치세가 오래가면서 중국 선불교를 주도한 한족(漢族)의 위상이 낮아진 것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능력 위주로 다양한 민족을 우대한 원의 영향으로 인도 승려인 지공을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원명 교체가 이뤄지고 성리학 국가로서 조선 건국과 함께 한족 위상이 다시 높아지면서 지공은 ‘오랑캐 승려’라고 폄하하는 분위기가 확산됩니다. 그로 인해 나옹 역시 순혈성이 떨어진다고 본 것 같습니다. 나옹은 지공뿐 아니라 평산의 법맥도 계승했지만 석옥의 법맥만 계승한 보우가 오히려 순수한 정맥이라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 책에서도 비판을 했지만 지공의 주장 가운데 상당수가 ‘설정’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지공은 나란타 사원 출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란타 사원은 당의 현장법사가 유학하고 돌아온 인도 최대 사찰로 유명한 곳입니다. 하지만 인도 불교사는 1203년 이슬람군의 비크라마쉴라 사원 파괴로 종지부를 찍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후 100년가량 지나 태어난 사람이 나란타 사원에서 수학할 수 있었을까요? 지공은 부계로는 석가국 왕자 출신인 붓다의 삼촌 핏줄이며 모계로는 역시 왕자 출신인 달마의 모국인 향지국 왕실의 혈통이라고 주장합니다. 기원전 500년 전후 존재했던 석가국과 기원후 500년 전후 존재한 향지국이 다시 800년 뒤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또 중국 선불교는 달마를 24조로 삼는데 지공은 자신이 108대라 주장했습니다. 붓다에서 달마까지 1000년간 24대인데 달마에서 지공까지 800년간 84대라는 불균형이 발생합니다.”

    ▼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지공을 높이 평가했다.

    “지공은 한때 최대의 경장을 갖춘 나란타 사원에서 교종을 익혔고 다시 인도 남부 스리랑카에서 선승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와 중국 남부까지 순회하며 다양한 불교 종파의 교리를 체득했습니다. 그는 이를 토대로 신분과 성별을 구별하지 않고 무생계(無生戒)라는 계를 주는 식으로 무수한 사람을 불제자로 끌어들였습니다. 나옹도 여덟 살에 지공의 무생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습니다. 자칫 ‘퍼포먼스’처럼 비칠 수 있는 것에 권위를 부여하는 게 바로 선승으로서의 내공입니다. 그 무기 중 하나가 바로 ‘계율의 청정성’입니다. 지공은 취처를 일반화한 라마승과 대결도 불사하며 계율의 청정성 회복에 주력했습니다.”

    ▼ 지공은 고향을 박차고 나와 수만㎞를 횡단해 당시 세계의 중심지(원)에서 승부를 걸었다. 고려에서 아무런 배경이 없던 나옹 역시 고려에서 원으로 유학이란 승부수를 뒀다는 점에서 닮았다.

    “교승(敎僧)이 학자에 가깝다면 선승(禪僧)은 예술가에 가깝습니다. 과거에 훌륭한 교승은 많은 책을 접할 수 있는 부귀한 가문 출신이 많았습니다. 미천한 집안 출신은 출발선상에서부터 뒤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옹이 그러했습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몽골제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승부수를 뒀고 지공의 인도선과 평산의 중국선이란 두 마리 토끼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고려 불교의 ‘청정’과 ‘통합’이란 두 마리 토끼사냥에도 성공합니다. 그 정신이 바로 오늘의 조계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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