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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 펴낸 자현 스님

“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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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

[조영철 기자]

한국 절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공간이 있다. 칠성각으로도 불리는 삼성각(三聖閣)이다. 보통 절 뒤쪽에 세워진 이 사당은 불교와 무속신앙이 결합한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삼성각일까. 일부에서는 그 사찰이 세워진 곳의 산신(山神)과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七星), 홀로 깨우쳤다 하여 독성(獨聖)으로 불리는 나반존자, 이 셋을 모시는 경우가 많아 그런 호칭이 생겼다고 본다.

하지만 양산 통도사나 순천 송광사의 삼성각에 가면 세 승려의 초상화를 만나게 된다. 지공 선현(指空 禪賢), 나옹 혜근(懶翁 慧勤), 무학 자초(無學 自超)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세 번째 무학(1327~1405)일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꿈을 풀어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새 도읍지로 한양을 추거했다는 조선의 왕사(王師)다. 나옹(1320~1376)도 유명하다. 공민왕의 왕사에 임명된 고려 말의 고승이다. 하지만 지공(1300~1361)이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국적 풍모로 눈길을 끄는 그는 인도 출신의 승려다.

언뜻 활동 무대가 달라 보이는 이 셋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뭘까. 세 사람은 사제(師弟) 관계다. 지공은 몽골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절 수만㎞를 주유편력(周遊遍歷)한 세계인이다. 인도 중북부에서 태어나 스리랑카와 티베트를 거쳐 몽골제국(元)의 수도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불력을 펼치다 고려까지 휘젓고 간 인물이다. 경남 합천의 통도사에도 머물렀다 하니 그의 이동거리는 당의 현장이나 신라의 혜초를 능가한다.

삼성각의 진짜 주인공들

원 태정제를 대신해 금강산 명찰에 향공양을 올리기 위한 어향사(御香使)로 고려에 파견될 당시 지공의 나이는 스물여섯. 하지만 푸른 눈을 지녔다 알려진 이 인도 승려는 ‘살아 있는 부처’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2년 7개월이나 머물렀다. 벽안의 젊은 수행자라는 점에서 얼핏 우리 시대의 현각(玄覺)을 떠올리게 하지만 당시 그가 누린 위상은 오늘날의 달라이 라마에 비견될 정도였다. 개경 감로사에 머물 땐 그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고 하루에 수만 명에게 계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지공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 원으로 돌아간 뒤로도 그의 문도가 되려는 고려 유학승이 줄을 이었다. 그런 지공이 자신의 제자 중 최고로 꼽은 인물이 나옹이고 그 나옹의 제자가 무학이다. 따라서 삼성각은 인도의 최고승, 고려의 최고승, 조선의 최고승 셋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한국 선불교의 원류 지공과 나옹 연구’(불광출판사)를 펴낸 자현(玆玄·46) 스님은 “삼성각의 성은 ‘성인 성(聖)’자로 신이 아니라 사람에게 쓰는 한자라는 점에서 지공, 나옹, 무학 세 고승을 모시는 사당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율경), 동국대 미술사학, 고려대 철학(선불교)과 역사교육학까지 박사 학위만 4개를 지닌 그의 책에는 한국 조계종의 법맥(法脈)에 오류가 있다는 비판도 담겨 있다. 그는 조계종 소속 오대산 월정사의 교무국장이다.

▼ 지공, 나옹, 무학을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이라고 부른다. 무슨 뜻인가.

“사찰을 세우거나 불교의식을 치를 때 그것이 불법(佛法)에 부합함을 인증하는 3명의 승려라는 말입니다. 대규모 불교의식을 거행하는 사찰마다 삼성각에 이 세 분의 초상화를 모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도 마가다국의 왕자 출신이라 밝힌 지공은 자신의 부계(父系)는 붓다와 이어지고 모계(母系)는 달마와 이어진다고 주장했습니다. 붓다는 불교의 창시자고 달마는 중국 선불교의 창시자라는 점에서 동아시아 불교 최고의 혈통임을 자부한 것입니다. 사실인지는 의문이지만 그의 내공이 상당했음은 도처에서 확인됩니다. 당시 고려 최고 문신이던 민지(閔漬)는 일흔아홉 나이에 이 스물여섯 지공을 만나 그의 문도가 되고 그 가르침을 정리한 ‘지요서(旨要序)’ 집필을 간신히 마치고 6개월 뒤 숨을 거둘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최고의 법통을 이어받은 나옹은 고려의 왕사가 되고, 지공과 나옹을 함께 사사한 무학은 조선의 왕사가 됩니다. 그러니 이들 셋의 인가를 받았음을 내세우는 것만큼 확실한 정통성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여말삼사(麗末三師)라는 표현도 등장하는데 구성원이 다르다.

“나옹 혜근과 백운 경한(白雲 景閑·1298~1374)과 태고 보우(太古 普愚·1301~1382)입니다. 백운은 그 유명한 ‘직지심경’의 저자이고 보우는 공민왕 집권 초 국사(國師)에 임명된 분입니다. 세 사람 모두 득도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강남지역에서 유행하던 임제종 계파의 고승들에게서 이를 인정받는 오후인가(悟後認可)를 받았습니다. 나옹은 평산 처림(平山 處林·1279~1361)의 인가를 받았고, 백운과 보우는 석옥 청공(石屋 淸珙·1272~1352)의 인가를 받았습니다. 나옹과 백운은 지공의 인가도 받습니다. 무학은 지공의 가르침을 받고 고려로 돌아온 뒤 사형이기도 한 나옹의 제자가 돼 그의 인가를 받습니다.”

조계종 법맥의 뿌리

“조계종 법맥은 태고 보우가  아닌 나옹 혜근 것”

지공의 유력 과정. 인도 중북부 마가다국에서 출발해 스리랑카, 티베트, 몽골제국을 거쳐 고려 남부에 이른다.[불광출판사]

▼ 오후인가라는 절차가 왜 중요했나.

“선불교는 스승과 제자로 이어지는 법맥을 중시합니다. 깨달음의 등불을 전수한다 하여 전등(傳燈)이라 할 정도지요. 한국의 선종은 통일신라시대 중국 당으로 건너가 남종선의 법맥을 받아온 아홉 고승이 연 9산선문(九山禪門)을 기원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몽골 간섭기를 거치면서 선문은 남았지만 정작 법맥은 끊겨버립니다. 여말삼사는 중국에 가서 전등을 다시 받아옴으로써 그 끊긴 법맥을 되살려냈다고 평가받는 것입니다.”

▼ 과거엔 전남 순천의 길상사를 송광사로 바꾸면서 그 뒷산을 조계산으로 명명한 보조 지눌(普照 知訥·1158~1210)이 조계종의 창시자로 알려졌는데 요즘은 태고 보우를 중흥조(中興祖)로 부르며 그의 법맥만을 정통으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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