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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카리스마’ ‘신의 세 수’ 불멸의 기록 쓰다

파이널 시리즈 11전11승 타이거즈의 힘

  • 기영노|스포츠평론가 kisports@naver.com

‘코끼리 카리스마’ ‘신의 세 수’ 불멸의 기록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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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 달러의 사나이’ 김민식

2017년 10월 30일 서울 잠실야구장. KIA 타이거즈와 두산 베어스의 한국시리즈 5차전 9회말, 7대 0으로 앞서다 6점을 내주며 쫓긴 김기태 KIA 감독은 승부수를 던졌다. 6, 7차전까지 가면 우승한다는 보장이 없기에 오늘 끝내야 한다고 판단해 2차전에서 눈부신 투구를 하면서 완봉승을 거둔 양현종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당시 KIA는 선발 헥터 노에시에 이어 심동섭 김세현 김윤동 등 승리조 불펜을 소모한 상태였다. 

양현종은 몸이 풀리지 않았는지 두산 4번 타자 김재환을 맞아 초구는 스트라이크를 던졌으나 볼넷을 허용했다. 이때 포수 김민식이 마운드를 찾아갔다. “대(大)투수가 왜 쫄아요.” 양현종은 이후 1사 만루 위기를 맞았으나 박세혁과 김재호를 잡아내 타이거즈의 11번째 우승을 견인했다. 새카만 후배 김민식의 “왜 쪼느냐”는 한마디가 양현종의 투지를 불러일으킨 격이다. 

김민식은 선동열, 김성한, 양현종 같은 순종 호랑이가 아니라 트레이드해온 선수다. SK 와이번스에서 백업 포수로 뛰다가 4월 7일 KIA로 이적하면서 안방자리를 꿰찼다. 타이거즈의 11번째 우승은 한국시리즈에서 1승 1세이브를 올려 최우수선수(MVP)에 오른 양현종, 0.526의 고타율을 기록한 외국인 선수 로저 버나디나 등이 크게 기여했지만 김민식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수 있다. 김민식은 한국시리즈에서 타율(0.167)은 낮지만 강한 어깨로 상대 도루를 저지하면서 투수 리드를 잘했다. 경험이 적어 단기전에 약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안정된 인사이드 워크와 몸을 아끼지 않는 블로킹으로 타이거즈의 안방을 책임졌다. 구단에서는 벌써부터 김민식을 ‘200만 달러의 사나이’라고 부른다. 

타이거즈가 ‘11회 우승 왕국’을 건설하기까지 김민식 같은 이적생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프로야구 트레이드 1호는 서정환이다. 1982년 12월 7일 서정환은 1600만 원에 삼성 라이온즈에서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됐다. 서정환은 국가대표 출신 유격수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삼성의 두터운 선수층, 즉 천보성·배대웅·오대석의 그늘에 가려 난생처음 벤치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해태는 1루 김봉연, 2루 차영화, 3루 김성한 등 막강 내야진을 구축했으나 유격수가 아쉬웠다. 




화룡점정, 한대화

1987년 한국시리즈를 마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이 광주구장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앞이 선동열 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뉴시스]

1987년 한국시리즈를 마친 해태 타이거즈 선수단이 광주구장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 맨 앞이 선동열 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뉴시스]

김응용 감독은 서영무 삼성 감독에게 서정환 트레이드를 요구했고, 서 감독은 선수의 활로를 열어준다는 의미에서 트레이드에 동의했다. 서정환의 가세는 수비 쪽에서 특히 천군만마였다. 공격진은 김일권, 김성한, 김봉연, 김준환, 김종모 등 ‘김씨들’로 막강 전력을 갖췄으나 수비에서 구멍이나 마찬가지였던 유격수 자리를 서정환이 메워줌으로써 전력이 완성된 것이다. 

서정환의 트레이드가 타이거즈 초창기 전력 강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한대화의 트레이드는 타이거즈 왕조 구축의 화룡점정이었다. 한대화는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의 실질적 결승전이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 3점 홈런을 터뜨려 주가를 올린 선수다. 한대화는 그해 동국대를 졸업하고 계약금 1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에 OB(현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한대화는 1983년 OB 베어스와 MBC 청룡과의 시즌 개막전에서 4회 초 좌완 유종겸으로부터 3점 홈런을 터뜨려 ‘3점 홈런의 사나이’라는 자랑스러운 별명을 얻었으나 시즌을 거치면서 별 볼일 없는 타자로 전락했다. 첫해 기록은 타율 0.272에 홈런도 5개뿐이었다. 1984년에는 74게임에 출전해 0.238, 1985년에는 38경기에 나와 0.226을 기록했다. 젓가락 타율로 떨어지기 일보직전까지 간 것이다. 

1985년에는 대전에서 홀로 동계훈련을 하다가 간염에 걸렸는데, OB 베어스는 치료비를 대주기는커녕 개인적 질병에 의한 부상이라는 이유로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그에게 연봉 지급을 중단했다. 당시 OB는 한대화 외에 구천서, 이종도, 유지훤 등이 3루수를 봤는데, 박창언이라는 재일동포 선수를 데려와 한대화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해태 타이거즈에는 이순철이라는 걸출한 3루수가 있었다. 이순철은 신인왕에 골든글러브까지 거머쥔 최고 유망주였다. 마침 투수가 필요하던 OB는 해태에서 투수 황기선과 3루수 양승호를 받고, 한대화를 보내는 1대 2 트레이드를 했다. 당시 창단을 준비하던 고향팀 빙그레 이글스로 이적하기를 바라던 한대화는 야구를 안 하면 안 했지 해태로는 안 간다고 버텼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트레이드 거부 의사를 확인하고는 1986년 1월 8일 한대화에 대해 임의탈퇴 공시를 했다. 1984년까지 OB 연고지였다가 1985년 OB가 서울로 옮겨가 프로야구 연고팀이 없어진 대전·충청에서는 한대화를 야속하게 해태로 보낸 OB를 성토하면서 그를 다시 불러오자는 가두서명이 진행됐다. 

한대화는 간염 치료용 약값마저 궁해 우울한 세월을 보냈는데, 해태 타이거즈가 1986년 창단을 앞둔 빙그레 이글스와 연습경기를 하고자 대전관광호텔에 묵었고, 김인식 해태 투수코치가 한대화를 불렀다. 김 코치는 한대화에게 “어디 가든 야구만 잘하면 되지 않느냐”고 설득했고, 한대화는 자신을 동국대로 스카우트한 은사 김인식의 조언을 받아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1986년 한대화는 간염을 언제 앓았느냐는 듯 타격 5위(0.298), 홈런 5위(14개), 장타율 2위(0.503), 출루율 5위(0.372)를 기록하며 1989년까지 해태가 한국시리즈 4년 연속 우승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천하의 이순철이 한대화에 3루 자리를 내주고 중견수로 수비 위치를 옮겨야 했다. 


10월 30일 KIA 양현종(가운데)이 한국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한 후 서울 잠실구장에서 동료들과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뉴시스]

10월 30일 KIA 양현종(가운데)이 한국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한 후 서울 잠실구장에서 동료들과 우승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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