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호

이영미의 스포츠 ZOOM 人

“요즘 선수들? 너무 풍요로워, 간절함 없으면 성공 못해”

한국 축구 대부 김호

  • 이영미 | 스포츠 전문기자 riveroflym22@naver.com

    입력2017-02-28 13:2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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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축구 꿈나무’ 키워
    • “축구 감독은 지도자가 아니라 기술자”
    • “슈틸리케? 축구觀 평범한 데다 소극적”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가득하다. 73년 동안 겪은 인생의 굴곡이 주름으로 남았다. ‘한국 축구의 대부’로 불리는 그는 용인시축구센터 기술 총감독을 맡고 있다. 석현준(FC 포르투), 오재석(감바 오사카) 등을 배출하며 유소년 축구 육성의 요람으로 떠오른 곳에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선수 시절 아시아 최고의 수비수로 이름을 날린 김호. ‘도하의 기적’을 일으키며 극적으로 진출한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지도자로서 감동적인 경기를 선보였다. 1995년 수원 창단 감독으로 부임한 후 지휘봉을 내려놓은 2003년까지 정규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1회, 아시아챔피언십 우승 2회, 1999년 프로축구 전관왕 달성 등 무수한 기록을 남겼다. 1월 31일 용인시축구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축구 지도법’ 가르쳐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향인 경남 통영에 줄곧 머물다 용인시축구센터를 맡아 이곳으로 온 지 얼마나 됐나요.

    “1년 6개월 정도 지났을 거야. 어느 날 정찬민 용인시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 용인축구센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도와달라고 하더라고.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한 인재 양성이 목적이라는데 내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했지. 정 시장이 기술 총감독을 맡아달라고 했고, 흥미로운 경험일 것 같아 오래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어.”



    ▼ 한국 축구가 정체기에 있는 느낌입니다.

    “한국 축구가 과거의 명성에 비해 비약적 발전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문제를 제기할 기회와 통로가 많지 않아서야. 어떤 분야이든 협회나 조직은 변화를 두려워해. 축구인들이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할 계기도 없었어. 자리에 연연하다 보니 그런 거지. 난 지도자를 기술자라고 말하거든. 선수들이 가진 다양한 능력을 기술로 승화시키는 게 지도자의 몫이야. 기능을 가르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용인축구센터에서 내가 주로 하는 건 유소년 지도자들을 상대로 축구 지도법을 가르치는 건데 이게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려. 타성에 젖어 있으니 변화가 더딜 수밖에 없어.”

    ▼ 축구센터를 맡은 후 갈등도 있었다면서요.

    “답답했던 건 날 한 번도 만나 보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큰소리를 내는 거야. 그들에게 내 뜻을 설명할 기회조차 없다는 게 참으로 이상했어. 용인시축구센터가 발전하려면 서로 생각을 공유해야 하거든. 개인적인 주장을 토대로 전체를 바꾸려 하면 안 되지.”

    김호 총감독은 2015년 용인시의회 A의원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다. 김 총감독이 센터 산하 팀의 중요한 경기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출근하는 날이 적다는 등의 이유였다. 김 총감독은 스카우트 대상을 물색하고 학생들의 진학 문제를 상담하려고 외출한 것으로 A의원은 자신을 직접 만나 얘기도 들어보지 않았다고 했다.



    기다림의 미학

    ▼ 상황이 여러 가지로 꼬였나봐요.

    “프로팀 감독에서 물러난 후 오랫동안 어린 선수를 지도하는 일로 시간을 보냈어. 지금도 내 꿈은 한국 축구의 미래와 맞닿은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는 거야. 그런 점에서 용인시축구센터는 내게 안성맞춤인 곳이지. 나를 공격할 때 그 생각 하나로 버텼어. 나이 많은 지도자를 데려다놨으면 그 지도자로부터 뭔가를 빼내야 하는 거잖아. 이상한 얘기를 자주 하면 그 피해는 선수들한테 돌아가는 거 아닌가. 난 이곳 지도자들과 아침부터 토론을 시작해 점심 먹고도 축구에 대해 토론해. 축구와 관련된 얘기라면 하루 종일 토론해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야. 토론에서 나온 내용을 자료로 만들어 공유하고 현장에 적용하도록 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고. 외부에선 그런 노력을 잘 모르니까 이상한 소문을 내는 거지. 지도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경륜이 필요하다고.”

    ▼ 현재 이곳에서 일하는 지도자는 몇 명인가요.

    “열두 명. 좀 더 많은 구성원이 모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예산 문제가 있어 아쉬운 대로 이끌어가고 있지. 축구는 전문성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야 질적 성장을 이룬다고. 센터에 좀 더 많은 조력자가 모여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실행에 옮기길 바랄 뿐이야. 운동선수 부모님께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

    ▼ 어떤 말씀인가요.

    “기다려달라는 것. 운동선수의 부모들은 결과에 예민하고 조급해. 그런데 축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과 인내, 노력이 필요한 거잖아.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결과만을 기대하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다고. 난 늘 5년 정도의 시간을 두면서 계획해. 그걸 준비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단축될 수도 있거든. 기다림의 미학이란 말의 의미를 곱씹어봤으면 좋겠어. 그런 점에서 난 용인시축구센터의 지도 시스템을 잘 구축하고 싶어. 내가 있는 동안 모든 걸 다 이룰 순 없겠지만 차근차근 길을 놓는 게 내가 할 일이야. 그래야 내 뒤를 잇는 지도자가 좀 더 편하게 일할 테니까.”

    ▼ 흔히 ‘요즘 선수들’이란 표현을 쓰곤 합니다. 프로팀이든 대표팀이든 요즘 선수들이 하는 축구에 어떤 견해를 가졌나요.

    “너무 풍요로워. 풍요로움 탓에 선수들이 망가질 때도 있거든. 선수라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걸 해결해나가는 방법을 경험으로 터득해야 하는데 과정을 무시하고 빠르게 올라가기만 하려다 보니 탈이 나는 거지. 선수들은 어떤 상황이 돼도 간절함이 뒷받침돼야 해. 간절함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해.”



    ‘아, 기적이란 게…’

    ▼ 김호 감독 하면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떠오릅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하기까지 드라마 같은 예선전이 펼쳐졌어요.

    “사실 당시엔 아시아 축구가 세계무대에서도 통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어. 시간이 부족한 나머지 내내 쫓기는 처지였거든. 우리가 상대팀보다 월등히 잘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예선전에서 이란과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를 상대하며 첫 3경기에서 2승1무를 목표로 삼았는데, 1승2무를 한 거야. 그런 다음 일본을 만났는데 당시 대표팀은 베테랑들이 모두 은퇴하고 대부분 신인들로 구성됐거든. 아니나 다를까. 일본한테 0대 1로 지면서 본선 진출이 불투명해졌는데 마지막 남은 북한을 3대 0으로 이겼어. 같은 날 일본이 후반전 종료를 앞두고 동점골을 허용해 이라크와 2대 2로 비기면서 극적으로 본선 무대에 진출한 거야. 북한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도 웃을 수가 없었는데 일본, 이라크전이 무승부로 끝났다는 소식이 전해져 눈물이 날 뻔했다니까. ‘아, 기적이란 게 이런 거구나’ 생각했지.”

    ▼ 기적적으로 본선에 올라갔으나 16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났습니다.

    “가능성만 확인한 셈이야. 대표팀 운영에도 문제가 많았어요. 경험이 부족했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쉬움이 크게 남은 월드컵이었어. 그때는 외국 나가서 공부하거나 축구를 볼 기회가 흔치 않았거든. 선수 시절 독일에서 유럽 축구를 볼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때 현장에서 축구를 보며 배운 게 정말 많았어. 그 경험이 지도자 생활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봐요. 대표팀에 있으면서 배운 것의 3분의 1도 써보지 못하고 그만둔 게 못내 아쉬웠지. 협회에선 대표팀 감독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잘 몰라. 무조건 좋은 성적을 내기만을 바라니까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지. 대표팀 감독은 지도자를 은퇴할 무렵에 맡았어야 했어. 그랬다면 더 잘했을 것이라는 여운이 남아.”



    ‘수원의 아버지’가 되다

    ▼ 수원 감독으로 부임해 성과를 거두면서 ‘수원의 아버지’란 호칭을 얻었죠.

    “1969년 독일 유학 시절 재독 축구인이던 윤성규 씨를 만난 게 인연으로 작용했어. 둘이서 훗날 프로팀이 생기면 같이 일하자고 약속한 게 1995년에 이뤄진 거야. 그는 수원 초대 단장으로, 난 초대 감독으로. 수원에서 보낸 8년은 최고의 순간이었어. 그중 2001년이 특히 기억에 남아. 고종수, 데니스, 산드로로 구성된 ‘고데로 트리오’의 활약에 힘입어 정규 리그 3위, 컵 대회 우승, 아시안챔피언십 우승을 견인했지.”

    ▼ 당시 수원의 외국인 선수들 기량이 뛰어났죠.

    “공감하는 바야. 18세의 산드로, 19세의 데니스를 데려왔지. 난 외국인 선수 영입 문제로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어. 에이전트가 건네준 비디오 영상으로 선수들을 파악한 후 영입했는데 결과적으로 스카우트가 잘 된 거야. 당시 외국환 거래 규정에 따라 30만 달러를 넘길 수가 없었거든. 외국인 선수들의 몸값이 그만큼 쌌다는 얘기지. 저렴한 비용으로 많은 선수를 데려와 한국의 젊은 선수들이 그들을 보며 많은 걸 배우길 바랐어. 에닝요 알지?”

    ▼ 전북에서 뛰었던 에닝요 말인가요.

    “응. 수원에 있을 때 내가 마지막으로 데려온 외국인 선수였어. 처음에는 조광래 안양(현 FC서울) 감독이 먼저 에닝요를 불러 입단 테스트를 치렀다가 그냥 돌려보내려 한 걸 내가 붙잡았지. 그런데 수원에선 1년밖에 뛰지 못했어. 적응하기가 어려웠는지 실력 발휘를 못하더라고. 다른 리그를 떠돌다 2009년 K리그 복귀 후 승승장구했지. 에닝요의 귀화 문제가 이슈가 됐을 정도로 말이야.”

    ▼ 김호 하면 이 선수 이름이 뒤따라와요. 수원에서 코치하고 있는 고종수.

    “종수는 천부적 재질을 가졌어. 그런데 절제하는 면이 부족했지. 사춘기 때는 무조건 튀려고 했다고. 물론 스타플레이어의 기질이 있었기에 조금만 변화했다면 더 큰 선수로 성장했을 거야.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돈과 인기가 많아져 힘든 삶을 산 게 아닌가 싶어. 선수 때의 그 같은 경험이 지도자 생활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



    MR. 쓴소리

    ▼ 한국의 축구 문화는 겉으론 빠르게 성장했으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이런 걸 생각해보자고. 우린 2002년 월드컵을 치른 나라야. 월드컵 경기를 위해 각 도시에 경기장을 건립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축구장이 축구장의 기능을 못하는 거야. 수익 구조를 맞추기 위해 예식장, 컨벤션센터를 운영하고 가수들의 콘서트를 유치하는 등 축구장이 시민들의 여가 생활을 위해 사용되고 있어. 비싼 주차요금으로 인해 어느 경기장에선 축구 관람 티켓보다 주차요금이 더 많이 나오는 황당한 경우도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축구를 보러 오는 사람이 늘어날까. 잔디를 잘 관리하고 보호해 선수들이 뛰기에 부족함이 없어야 하는데 그라운드 관리보다 수익 사업에 열중하는 현실이 안타까워요. 축구 문화는 저절로 발전하는 게 아니야. 월드컵 유치보다 더 중요한 게 경기장 관리야.”

    ▼ 어록 중 유명한 문구가 있습니다. ‘나는 감독을 기술자라고 부른다.’ 왜 이런 시각을 갖게 됐습니까.

    “예컨대 사진기자는 순간을 포착해 셔터를 누르잖아. 사진을 보면 그 사진기자의 감각이 나타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사진기자만 갖고 있는 감각 말이야. 글이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지. 그런데 세상은 글이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은 잘 인정하지 않아. 학문, 이론만 앞세우면서 문제점을 해결하려 하니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거지. 프로에 대한 개념을 모르는 사람도 너무 많아. 선수들이 맞춤옷을 입고 경기에 뛰도록 지도자들이 더 많이 공부해야 해. 난 고졸 출신 감독이었어. 대졸 출신보다 준비와 노력을 몇 십 배는 더 기울여야 했지. 처음엔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오히려 고졸 출신이라 학연에 얽매이지 않고 지도자 생활을 해나간 것 같아.”

    ▼ 감독께서는 축구협회나 프로축구연맹을 향해 꾸준히 쓴소리를 해온 몇 안 되는 축구인 중 한 분입니다. 그런 목소리들이 어느 정도 반영됐나요.

    “5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비슷해. 양적 팽창만 있을 뿐 질적 팽창이 거의 없어. 축구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진심으로 축구를 사랑해야 해. 축구에 대한 애정 없이 개인적 이익을 취하려다 보면 축구의 발전을 저해하게 마련이야. 축구협회나 연맹의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는데 그런 노력이 부족하니 여전히 말이 많을 수밖에.



    축구와 현대家

    내가 가장 가슴 아픈 게 연습생 선수들이 받는 월급 문제야.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공만 차고 살아온 선수에게 연습생이란 규제를 두고 한 달에 100만 원만 주는 거야. 프로 선수의 가치는 돈인데 연봉이 1200만 원이란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보다 더 적은 돈을 받고 뛰는 거라고. 협회, 연맹이나 구단 직원들 중에서 연봉 1200만 원 받고 일하는 사람이 있을까. 단 한 명도 없을 거야. 관리자가 주인처럼 행세하면 안 돼. 신인 선수들 평균 연봉이 2400만 원이야. 난 이 액수도 적다고 생각해. 우리 세대가 어렵게 살았다고 후배들도 그렇게 살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

    ▼ 최근 프로축구연맹 총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신문선 전 성남FC 대표가 단독 입후보했다 낙선했습니다. K리그 개혁과 변화를 위해 나섰다는데 선거 기간 내내 감정적 대립을 벌이다 결국 낙마했죠. 신 전 대표가 축구계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현대가(家)와의 전쟁’을 선언했는데 그 대목을 어떻게 봅니까.

    “난 회장이 누가 되든 상관없어요. 운영만 잘한다면 말이야. 현대가가 계속 운영해도 돼요. 운영만 잘한다면. 난 그들을 싫어하지 않아. 그런데 운영을 잘못해왔다면 도전도 받아들여야지. 단, 현대 인맥이 축구계에 존재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야. 기본적으로 한국 축구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 내 재산이 축구뿐인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자 취미인데, 이 축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백 번 천 번이라도 쓴소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잘못돼가는 축구를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슴 아픈 일이니까.”

    ▼ 이 얘기를 꼭 묻고 싶었어요. 수원 시절 최강희 전북 감독이 트레이너를 거쳐 수석코치를 맡았습니다. 당시 최 감독이 수원을 나올 때 감독과의 불화로 해고됐다고 들었어요. 사실인가요.

    “연봉 때문에 구단과 갈등을 겪었고 최강희한테 ‘네가 나보다 더 많이 받아도 좋다’고 말하면서 기다렸던 일이야. 그런데 최강희가 구단과 딜을 했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 그래서 그 친구에게 ‘내가 더 이상 널 보호하지 못할 것 같다’고 얘기했어. 솔직히 서운하면 내가 더 서운해. 난 그 친구를 영국, 스페인 등으로 유학도 보내줬어. 난 후배를 자르는 지도자가 아니야. 최강희는 팀을 떠나면서 한 마디 말도 없이 나갔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일에 대해 다른 얘기를 하더라고. 그러면 안 되지.”



    “이건희 회장이 잘 챙겨줘”

    최강희 감독이 수원을 떠날 때의 과정을 두고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주장을 편다. 수원에서 7년간 코치를 하다 2002년 1월 13일 해임 통보를 받았다고 말하는 최 감독은 당시 세상과 등지고 살고 싶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 감독이 기자에게 털어놓은 당시의 얘기는 다음과 같다.

    “2002년 1월 13일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코치를 자를 때 보통은 12월 이전에 통보한다. 그래야 다른 팀이라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단들이 모두 전지훈련을 떠난 1월에 해임 통보를 받았다. 해임 사유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라 그 후유증이 꽤 깊고 길었다. 무작정 가족을 데리고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축구의 나라’에 가서 두 달 가까이 축구를 보지 않고 지냈다. 한국을 떠날 때는 보는 눈도 있고 해서 축구 유학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내 머릿속에서 축구란 단어를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최 감독이 연봉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어 계약을 하지 않고 나갔다는 김호 감독의 설명과 12월도 아닌 1월에 갑작스레 해임 통보를 받았다는 최강희 감독의 얘기 중 진실은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김호 총감독은 삼성과 인연이 깊다. 동래고 시절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하며 주가를 날릴 때 명문대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 했지만 제일모직에 입단하면서 ‘고졸 출신’이란 꼬리표를 달게 됐다. 지도자 데뷔 후 수원의 창단 감독으로 삼성과의 인연을 이어간 그는 “나랑 수원은 참 잘 맞았다”면서 “돌아가신 이병철 전 회장, 이건희 회장 등이 날 많이 챙겨줬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고 회상했다.

    김호 총감독은 어린 시절 통영에서 축구를 하다 부산 동래고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거기서 현재 대한축구협회 전무인 안기헌 씨의 아버지 안종수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은 “안 선생이 내게 수비 훈련을 시키셨어. 이기고 있으면 수비를, 지고 있으면 공격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뛰어다녔지”라고 회상했다.

    “동래고 출신들이 돈을 모아 선생님 흉상을 만들어 학교에 기증했어. 내 스승님이 영원히 학교에 남아 계시도록 하고 싶었거든. 그분은 내게 정신적 지주였어.”



    “요즘 선수들 인성이…”

    ▼ 수원 감독직을 그만둔 후 대전을 맡았는데 취임 일성이 ‘네덜란드 아약스처럼 훌륭한 선수를 키워 공급하는 명문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했습니다. 100만 원 받는 선수를 1억 원 받는 선수로 키우겠다는 얘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대전과는 인연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어요.

    “대전은 삼성이 운영하는 수원과 달리 대전광역시가 운영하는 팀이라 모험을 해봤던 거야. 도·시민 구단이 어떻게 팀을 운영하는지 직접 경험하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상식 밖의 짓을 많이 벌이더라고. 재정이 빈약하다고 명색이 프로팀 선수들에게 말도 안 되는 연봉을 책정하는 거야. 연맹에서 엔트리 선수 18명의 연봉이 평균 어느 정도에 도달해야 1부 리그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제도로 만들었다면 훨씬 질 높은 축구를 했을 거야. 연맹이 도·시민 구단을 관리하고 챙겨줘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지.”

    ▼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어떤 항로로 항해할까요. 잘할 것 같습니까.

    “일단 내가 슈틸리케를 잘 몰라요(웃음). 대신 이런 얘긴 할 수 있겠네. 축구를 보는 시각이 좀 평범한 것 같아.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팀을 운영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성격이라면 지도자를 하면 안 되는 거지. 해외파 선수들한테도 문제가 있다고 봐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다는 순간 개인이 아닌 대표팀을 위해 모든 걸 맞춰야 하는데 요즘 선수들은 그렇지 않아. 대표팀에서도 자유를 누리려고만 하고. 그렇게 살길 원한다면 자리 내놓고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박지성만한 스타플레이어가 안 보이는 것도 실력보단 인성이 부족한 탓이야. 자유는 도덕과 질서를 지킬 때 주어지는 법이라고.”

    김호 총감독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뤘을 때 그가 대표팀에서 한 일들을 더 많은 축구인이 공유했어야 축구 발전과 연결됐을 텐데 일부 관계자만 그 자료를 공유했다는 게 아쉽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 있나요.

    “아까 말했지. 지도자로 은퇴할 무렵 대표팀을 맡았더라면 더 잘했을 것 같다고. 1994년 미국 월드컵 대표팀을 이끌던 때로 돌아가고 싶기도 한데 월드컵 마치고 보름 동안 식음을 전폐한 기억이 떠올라서… 당시의 아픔을 생각하면 다시는 맡고 싶지 않은 게 대표팀이지. 그런데도 1994년 이전으로 되돌아가 대표팀을 멋지게 이끌어보고 싶기도 해. 말의 앞뒤가 좀 안 맞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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