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호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강원 평창·강릉 고랭지 배추 수확 현장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입력2013-09-24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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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강릉시 왕산면 안반데기의 고랭지 배추밭.

    배추는 특별하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빠져선 안 될 중요한 반찬, 김치의 주재료이니 우리에겐 말 그대로 독별(獨別)난 채소가 아닐 수 없다.

    배추는 힘이 세다. 해마다 널을 뛰는 배춧값에 재배농가도 소비자도 정부도 맥을 못 추고 ‘가격안정’을 외쳐대니 이만한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채소 지존(至尊)’이 또 있을까.

    ‘슈퍼 갑(甲)’ 배추의 위상은 올해도 흔들림이 없다. 끈질긴 장마와 40년 만의 기록적 폭염, 추석 대목 성수품 수요 증가에 따른 수급 부족 현상으로 가격이 급등했다. 지난해보다 무려 60% 이상 수직 상승했다.

    9월 2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8월 소비자물가지수는 107.7(기준은 2010년=100)로 전월대비 0.3% 상승했다. 전년 동월 대비로는 1.3% 올라 지난해 11월 1.6% 상승한 이후 10개월 연속 1%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는 긴 여름 세일 덕에 화장품 가격이 15.0%나 하락해 전월대비 각각 6.6%와 1.0% 오른 농산물 및 석유류의 상승 폭을 상쇄함으로써 물가상승률을 일시적으로 낮춘 데 따른 것이다.

    3포기 1만3000원. 올라도 너무 오른 가격에 서민들은 대형마트 채소 코너에서 배추를 들었다 놨다 하며 한숨을 내쉰다. 7월 중순만 해도 배추 10㎏(상품) 가격은 4000~5000원 선에 그쳤다. 그러나 8월 31일 서울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의 경매가는 평균 1만1233원까지 가파르게 치솟았다.



    배춧값이 급등하자 농림축산식품부는 8월 30일 제5차 농산물수급조절위원회를 열어 가격안정 대책을 논의했다. 수급조절위는 장마와 가뭄으로 인한 작황 부진, 개학에 따른 학교 단체급식 수요 등이 겹치면서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 생긴 것으로 파악하고, 9월 이후 공급 물량은 충분할 것으로 내다봤다.

    정부가 자신하는 건 나름대로 ‘비빌 언덕’이 있어서다. 비교적 생육 상태가 양호한 강원지역의 고랭지 배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센터가 8월 21일 발표한 ‘고랭지 배추·무 주산지 출하 속보’는 “9월 상순 배추 출하량은 평년보다 5%가량 적겠지만 물량 공급이 크게 부진했던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4% 늘어날 것”이라 전망했다.

    올해 고랭지 배추 산지(産地) 사정은 어떨까. 수확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뤄질까. 8월 26~27일 고랭지 배추 본격 출하철을 맞은 주산지인 강원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왕산면 일대의 배추 수확 현장을 찾아나섰다.

    ‘채소 지존’ 고랭지 배추

    늘 설레기 마련이다, 새로움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라면. 서울을 출발해 승용차로 3시간 남짓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여정도 따분하지 않다. 왜 안 그렇겠는가. 숙지지 않을 것만 같던 유난한 무더위도 한풀 꺾였겠다, 첩첩산중에 펼쳐진 아주 특별한 ‘채소 곳간’을 둘러보러 가는 길이니.

    8월 26일 오전 11시10분, 평창군 대관령면 유천리의 한 배추밭. 1만6500㎡(5000평)에 달하는 산비탈에서 인부 예닐곱 명이 뙤약볕을 고스란히 등에 진 채 배추 수확에 한창이다. 밑동을 잘라 밭이랑에 쭉 뉘여놓은 배추들을 출하용 플라스틱 상자에 가득 담고, 그 상자들을 1t 화물차 적재함에 차곡차곡 쌓는 일련의 작업이 2개 조(組)로 나뉘어 일사불란하게 진행된다.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건만, 대낮의 중노동이어선지 이마에 흐르는 구슬땀을 연신 훔쳐내기에 바쁘다. 상자를 잔뜩 쌓은 1t 화물차는 좁은 밭길을 용케 지나 밭 아래 대로변에 대기 중인 5t 화물차로 실어 나르길 반복한다.

    그런데 가만히 살피니 왠지 인부들 죄다 이방인 분위기가 묻어난다. 아니나 다를까, 작업반장으로 보이는 30대 남성에게 말을 붙여도 묵묵부답. 한참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그제야 수줍은 듯 “한국말 잘 못해요” 한다. 중국인이다.

    배추 수확 작업은 고되다. 한철 일거리인 데다, 일일이 사람 손이 닿아야 해서다. 팔다리와 허리를 장시간 써야 해 3D 업종으로 통한다. 자연히 한국 사람은 일을 꺼리고, 그만큼 일손 구하긴 버겁다. 빈자리는 중국인, 베트남인, 몽골인 등 외국인 노동자가 채운다.

    ‘가는 날이 장날’이란 옛말은 대체로 맞다. 때마침 같은 시각, 배추밭엔 추경호 기획재정부 1차관 일행이 현장 방문해 고랭지 배추의 생육 상황과 수급 및 가격 동향을 점검하면서 박병승 대관령원예농협 조합장의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이 배추들은 6월 22일 정식(定植·온상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내다 심는 일)한 것을 7월 22일 농협이 포전(圃田·남새밭)째 인수해 가꿔오다 오늘 출하하는 겁니다. 폭염과 가뭄으로 예년보다 이 일대 배추의 생육이 다소 부진하지만, 8월 말까지 대부분 출하를 끝낼 계획입니다.”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박 조합장은 “배추는 기상 여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 작물이다. 특히 7, 8월 평균기온이 20도 이하의 선선한 날씨에다 밤낮 기온 차가 커야 잘 자라고 수분 증발량도 적어 맛이 있다”며 “고랭지는 그런 기후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라 배추 재배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고랭지 배추 작황은 국민 가계와 직결된다. 그래서 배추밭엔 농업 관계자들의 방문이 잦다. 이상욱 농협중앙회 농업경제 대표이사가 7월 3일 평창의 고랭지 배추 포전을 방문한 데 이어, 8월 16일엔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도 평창의 배추 출하 현장을 방문했다.

    ‘꿀통 배추’ 없이 작황 좋아

    1시간 후 추 차관 일행이 가고 나서 기자는 배추 출하 작업에 뛰어들었다. 시퍼런 배추가 빼곡히 들어찬 밭이 마치 꽃밭 같다. 겉잎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한 포기씩 다듬은 뒤 한 상자에 6포기씩 채워 넣는다. 배추를 가지런히 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통통하게 살이 올라선지 상자 밖으로 잎사귀가 삐져나오기 일쑤다. 겉은 괜찮아 보여도 속은 짓무른 이른바 ‘꿀통 배추’는 찾아보기 힘들다. 배추가 무름병에 걸리면, 군데군데가 하얗게 물러져 땅바닥에 쓰러지거나 뿌리 부분이 누렇게 된다.

    한 줄 한 줄, 밭이랑마다 차례로 거둬들이니 힘이 꽤 든다. 사실 배추 밑동 절단 작업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이건 해가 뜨기 전에 해야 한다. 밑동이 잘린 배추가 강한 햇볕에 노출되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잎사귀가 퍼지고 생기를 잃어 신선도와 상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

    수확에 이어지는 상차(上車) 작업. 고랭지 배추는 2~3kg인 김장용 배추보다 크기가 좀 작다. 그래도 대략 한 포기에 1.5kg쯤 되니 6포기들이 상자 무게만 10kg이 넘는다. 어랏차차!

    한데, 아무리 용을 쓰며 열심히 상차 작업을 해봐도 뭔가 미진하다. 한 번 더 와서 수확 및 출하의 전 과정을 겪어봐야 마음의 허기가 가실 듯하다. 결국 다음 날 새벽을 기약한다. I´ll be back!

    배추밭 주인은 염동근(51) 씨. 염 씨는 이날 자신의 배추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출하 작업을 농협이 알아서 해주기 때문이다.

    염 씨는 고향 유천리에서 25년째 3만3000여㎡(1만 평) 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을 가꾸고 있다. 모두 농협과 계약재배하는 물량이다. 전량 계약재배를 시작한 건 6~7년 전. 그는 “3.3㎡(1평)당 8700원에 농협과 계약했는데, 산지 수집상에 팔 때보단 조금 낮은 단가지만 정식 후 30일이 지나면 농협이 직접 포전을 인수해 방제(防除), 시비(施肥), 양수, 제초 등 배추 생육 작업 전체를 맡아주므로 안심이 된다”며 “매년 작황과 관계없이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되니 배춧값의 극심한 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 데다, 판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 농민 처지에선 속이 편하다”고 했다.

    그는 또 “이론상으론 3.3㎡당 평균 12~13포기가 생산돼야 하지만, 잘해야 보통 7~8포기 나온다. 게다가 배추는 날씨에 민감해 수확 시기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사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언론이 고랭지 배추 작황이 안 좋네, 가격이 비싸네 하고 보도할 때면 많이 서운하다”며 “한여름 장마와 폭염을 이겨내며 길러낸 고랭지 배추가 그만한 값어치를 한다는 것을 꼭 좀 알려달라”고 덧붙였다.

    올해 고랭지 배추의 포전 거래 가격은 7월 출하분이 3.3㎡당 7500~8500원, 8월 출하분이 1만~1만2000원이다. 지난해보다 10% 정도 올랐다.

    ‘배추고도(高道)’ 안반데기

    오후 2시. 이왕 내디딘 걸음, 단순한 포전보단 파노라마로 펼쳐진 광활한 배추밭을 굽어보고 싶다. 내친김에 ‘구름 위의 땅’으로 통하는 속칭 안반데기 마을로 향한다. 유천리에서 차로 40여 분 달려 다다른 곳. 평창군과 강릉시 경계에 위치한 강릉시 왕산면 대기4리다. 해발 1100m 백두대간 고원지대에 자리한 산비탈 오지. ‘배추고도(高道)’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국내 최대 고랭지 채소재배단지다. 세칭, 하늘 아래 첫 동네. 굽이굽이 골을 이룬 배추밭 물결에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빙빙 돌아가는 하얀 풍력발전기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너른 구릉은 온통 푸른 하늘과 맞닿은 초록 배추밭. 남도나 제주도의 아기자기한 녹차밭과는 또 다른 푸릇함이다. 모진 여름을 버텨낸 배추들이 나날이 몸집을 불리며 부드럽고도 촘촘하게 등고선을 그린다. 수확을 기다리는 것이다. 잎을 살짝 만져보니 촉촉하게 수분을 머금었다. 보들보들, 좋은 감촉이다.

    멀리 운무(雲霧)에 감싸인 산들 위로 두둥실 구름이 떠간다. 가히 장관! 전국 어디에서나 산을 흔히 볼 수 있지만, 산 속 배추밭은 그렇지 않다. 강릉 사투리로 수도권에서 ‘가차운’ 곳이 아닌데도 왜 사진작가들이 계절을 불문하고 출사지로 이곳을 즐겨 찾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안반’은 떡메를 내리칠 때 밑에 받치는 오목하고 평평한 통나무 판을, ‘데기’는 둔덕을 뜻하는 ‘덕’의 강릉 사투리다. 조합하면 지형이 ‘안반처럼 평평한 둔덕’이라는 의미다. 요즘은 ‘안반덕’으로 불린다.

    피득령을 중심으로 남쪽의 옥녀봉(1146m)과 북쪽의 고루포기산(1238m)사이에 198만4000㎡(약 60만 평)의 고랭지 배추밭이 독수리 날개처럼 펼쳐진 안반데기는 평창의 육백마지기, 태백의 귀네미마을 및 매봉산고랭지채소단지와 함께 강원도를 대표하는 4대 고랭지 배추밭 중 하나다.

    안반데기는 우리나라에서 주민이 거주하는 가장 높은 마을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20여 농가가 감자와 배추를 재배한다. 감자도 배추도 사라져 안반데기가 헐벗은 살갗을 드러내는 겨울이면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는 맹추위와 폭설 때문에 주민들은 아랫마을로 내려간다. 봄이면 다시 올라와 감자와 배추를 심고 살아간다. 삶이란 그렇게 질긴 것이다.

    7~9월 출하되는 여름 배추

    ‘자연이 그린 풍경화’에 한참 빠져들다 문득 눈을 돌리니 그늘 한 점 없는 배추밭 한켠에서 30~40대 남녀 농민 4명이 배추좀나방을 제거하는 방제 작업을 하고 있다. 나방의 가루가 배추에 닿으면 무름병을 일으키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날씨 한번 고약하다. 내내 쾌청하더니 이내 먹구름이 낀다. 후두둑! 소나기다. 빗줄기가 굵다. “어이, 비 떨어진다!” 한 농민의 외침에 다들 서둘러 철수한다. 역시 산간지역에선 지형성 강수에 조심해야 한다. 하루에도 날씨가 수시로 변해 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안반데기가 척박한 고원에서 고랭지농업의 최적지로 탈바꿈한 건 1965년 정부가 주변 화전민들에게 국유지를 임대해주고 개간하게 하면서부터다. 사람과 소의 힘, 쟁기만으로 자갈투성이 황무지를 농경지로 일군 곳인 만큼 화전민의 고단한 삶과 애환이 배어 있다. 개척한 농경지는 1986년 경작자들에게 매각됐다.

    고랭지 배추는 통상 해발 600~1000m에서 재배된다. 글자 그대로 ‘고도는 높고(高), 기온은 낮은(冷)은 지역(地)’의 대표 작물이다. 고랭지는 1970년대 이후 근대화한 농업기술이 전파되면서 한여름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신(新)농업기지로 성장했다. 안반데기의 감자와 배추의 재배 비율은 한때 50대 50이었지만, 현재는 92%가 배추다.

    고랭지 배추는 강원지역 외에 전북 무주군의 고지대에서도 생산된다. 배추는 저장성이 약해 연중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별로 출하되는데, 고랭지 배추는 7~9월 출하되는 여름 배추다. 현재 전국에서 생산되는 배추 중 고랭지 배추의 비율은 약 15%.

    고랭지 배추는 1800년대 중반 외국에서 들여온 결구배추다. 육질이 단단하고 아삭아삭하면서 달다. 4월에 비닐하우스에서 배추 씨앗을 틔워 20~30일가량 모종으로 키운 후 5월 중순 고랭지밭에 심는다. 이후 60~70일이면 다 자라 7월 상순 이후부터 수확할 수 있다.

    무릇 모든 농사가 그렇듯, 고랭지 배추 농사의 성공 여부도 오로지 하늘에 달렸다. 수확시기도 날씨가 결정한다. 평생 배추 농사만 지어도 농민은 출하시기도, 배추 가격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게 하늘이 주는 만큼 먹고사는 농심(農心)이다.

    계약재배로 가격안정 도모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대관령원예농협 저온창고에 저장 중인 배추. 0.5℃에서 보관된다.

    고랭지 배추는 생산비가 많이 든다. 그래서 다른 배추보다 비싸다. 더욱이 안반데기 배추는 급경사의 비탈에서 수확해야 하므로 농기계를 사용하기 힘들다. 거의 수작업이고, 굴삭기도 동원된다. 굴삭기에 삽 대신 쇠로 만든 그물 틀을 단 뒤 배추 상자들을 담아 화물차로 운반한다.

    “풍광이 멋지죠? 무름병 같은 병충해가 없고 전반적으로 작황이 좋은 안반데기 배추는 9월 2일 첫 출하가 이뤄집니다. 7월 2일 정식한 배추인데, 1만2452㎡(약 3773평)에서 95t을 수확할 겁니다. 계약단가는 3.3㎡당 1만2000원으로 높은 편이죠.”

    이수희 농협중앙회 채소사업소장은 “수확하기 2∼3개월 전에 전국의 배추 재배농가와 일정량을 특정 가격에 구입하기로 개별적인 계약을 한다”며 “수확 당시의 작황이나 배추 시세와 관계없이 미리 정한 가격에 농협이 100% 구입하므로 농민들은 판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농협은 채소사업소가 계약한 물량의 수확 작업뿐 아니라 운반, 판매처 확보 등 배추를 파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책임진다. 수확한 배추는 채소사업소와 거래하는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이나 김치공장 등 대량 수요처에 직거래로 팔려나간다. 앞서 언급한 염 씨의 배추도 대관령원예농협을 거쳐 김치공장으로 옮겨졌다.

    농협중앙회가 채소사업소를 만든 것은 2011년 1월. 2010년 말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배추 파동이 계기다. 당시 장마와 태풍 ‘곤파스’가 겹치면서 무름병이 확산돼 생산량이 급감한 고랭지 배추 가격은 포기당 6배 가까이 뛴 1만3047원에 형성돼 ‘금(金)추’가 됐다. 소비자들은 김치를 깍두기와 묵은지로 대체하는 등 큰 혼란을 겪었다. 이에 배추 가격 안정화를 위한 직영사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농협중앙회가 기존 고랭지채소사업소를 채소사업소로 변경 설립했다.

    채소사업소는 농협중앙회 중앙본부 소속으로 전국의 배추·무 사업을 추진한다. 농협중앙회 직영 물량 확보를 통해 가격 급등락 때 배추·무 수급 및 가격 안정을 유도하는 게 주된 임무다. 일례로 고온 및 태풍, 추석 명절 수요 급증으로 배추 가격이 급등한 지난해 7~9월 채소사업소 계약물량 7578t을 도매시장에 출하했다. 즉, 가격폭등 때 직영 물량을 시장에 집중 출하함으로써 가격인하와 물가안정을 도모하고, 가격폭락 때는 직영 물량을 산지에서 폐기해 가격 지지 및 농가 소득안정을 꾀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인원은 소장을 필두로 사업추진팀 9명, 사업지원팀 4명 등 총 14명. 이들은 배추·무의 포전매취(圃田買取·밭떼기 매입) 계약과 매취한 포전의 관리(봄~겨울 4작기), 수확 작업 및 출하를 담당한다. 출하 때는 일손이 달릴 수밖에 없으므로 출하작업반은 23개 반, 184명으로 상시 운영된다. 1개 반 인력은 8~10명. 이들이 하루 수확하는 물량은 5t 화물차 3~4대분이다. 이처럼 산지에서 직접 출하 작업을 하면 노령화한 농촌의 일손도 덜 수 있다.

    채소사업소의 올해 배추 계약재배 사업실적은 1만3965t. 8월까지 9800t의 배추를 출하하거나 저온저장 물량으로 확보했다. 지난해 계약실적은 3만9139t. 내년 계약재배 사업계획 물량은 3만5000t에 이른다.

    이 소장과 얘기를 나누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햇볕이 내리쬔다. ‘알아서 배추와 무를 관리하고 실어가고 팔아주는’ 채소사업소는 계약재배 농민뿐 아니라 소비자에게도 도움을 주는 상생(相生) 시스템으로 평가받는다. 일반 유통업자들은 채소 가격이 오르면 물량을 시장에 내놓지 않고 가격을 더 올려 이득을 취하려 들지만 농협은 이익보다 소비자물가 안정을 우선시하기 때문.

    ‘소수정예’의 채소사업소

    농협중앙회 직영 물량 확보를 위한 채소사업소의 배추 계약재배 사업은 고랭지 배추에 국한되지 않는다. ‘전국구’다. 봄엔 강원·충청·영남·호남지역을, 여름엔 주로 강원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가을과 겨울엔 충청 및 호남이 주된 대상지역이다. 이 때문에 이 소장을 포함한 10명의 현장 직원이 전국 각지의 재배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계약, 포전관리, 출하 현황을 챙겨야 한다. 그러니 고충도 적지 않다. 한 달에 차로 돌아다니는 거리만 8000 km를 웃돈다. 자연히 일주일 중 사나흘은 늘 지방 출장. 숙소도 여관, 펜션 가리지 않는다. 특히 개인별로 각기 다른 지역으로 움직여야 하는 가을엔 각자 여관에서 독수공방 신세다.

    “자주 집을 비워야 하니 가족에게 늘 미안하죠. 부하 직원 8명의 연령대가 20대 중반~40대 중반인데, 일이 바쁠 땐 결혼한 사람도 집에 갈 수 없어요. 미혼 직원들도 연중 밭을 돌아다니니 아직껏 배필을 못 찾고 있습니다.”

    원주에 집이 있는 이찬옥 채소사업소 사업추진팀장은 겸연쩍어하면서도 “농민들이 힘들게 생산한 배추를 책임지고 팔아준 뒤 그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면 힘들다는 생각이 쑥 들어간다. 농민에 대한 안전판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했다.

    이튿날 새벽 4시. 염 씨의 배추밭을 다시 찾았다. 수확 작업이 새벽부터 이뤄지기 때문. 적막한 땅. 하늘엔 별이 총총. 도심에선 좀체 접하기 힘든, 그러나 어릴 적엔 자주 봤던 별자리들을 찾아본다. 오리온자리와 삼태성(三台星)이 몇 년 만에 동공에 박힌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시간이 아니다. 별빛이 쏟아지는 한밤의 배추밭. 이 진귀한 풍경 속에서 배추를 수확해야 한다. ‘체험, 배추 수확 현장’ 아닌가!

    “일찍 나오셨네요. 이렇게 칼로 배추 밑동을 조심스럽게 잘라야 합니다. 칼날 대신 칼끝만 사용하세요. 안 그러면 멀쩡한 잎까지 다 떨어져요. 그리고 김치공장으로 갈 거니까 청잎도 가급적 떼지 말고, 밑동에 흙이나 작은 돌도 묻히지 마세요. 안 그러면 김치공장 기계가 망가집니다.”

    작업반장은 옥경호(47) 씨. 옥 씨를 뺀 다른 인부는 모두 중국인이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 옥 씨는 개인사업을 하다 5년 전부터 농협이 인수한 포전을 돌며 자신의 인부들을 이끌고 배추 수확 작업을 해오고 있다.

    오전 11시까지 수확을 마쳐야 하는 물량은 5t 화물차 4대 분량. 옥 씨와 여성 1명을 포함한 8명의 인부는 저마다 경사진 밭에서 헤드랜턴 불빛에만 의지한 채 칼을 들고 바쁜 손놀림을 한다. 쓱싹쓱싹.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사위가 고요한데, 칼이 배추 밑동을 베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기분 참 묘하다. 날선 금속과 수분을 한껏 품은 유기체의 마찰음. 뱀도 조심해야 한다. 뱀들은 곧잘 배추 청잎 속에 뙤리를 틀고 숨어 있다.

    상자엔 6포기씩, 망(網)엔 3포기씩 나눠 담는다. 꽉 찬 상자와 망의 수가 늘어날수록 새벽이슬에 땀도 흠뻑 섞인다. 시간이 흐를수록 헤드랜턴 불빛도 반딧불이처럼 춤춘다.

    갓 수확한 배추를 살펴본다. 노란 속잎이 꽉 차 있다. 그 노란 속살을 살짝 맛본다. 아삭아삭하다. 달면서도 고소하다. 돼지고기 보쌈이 생각난다. 땀이 흐를수록 침도 고인다.

    하지만 일은 일. 허리도 다리도 아프다. 운동화도 흙투성이. 그렇게 밭일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어디선가 난데없는 경적소리가 알싸한 새벽 공기를 가로지른다. 배추밭 사이로 난 좁은 농로에 주차한 취재 차량을 빼달란다. 배추를 싣고 갈 5t 화물차들이 벌써부터 북적댄다. 이 화물차들이 서울로 떠나면 휑한 배추밭엔 곧 고요가 찾아올 것이다.

    옥 씨가 인부들을 불러 모은다. 승합차 트렁크에 부착된 부탄가스통과 압력솥을 이용해 아침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새벽이슬 머금은 배추 밤하늘 별빛에 물들다

    새벽의 배추 수확 현장. 칼로 배추 밑동을 자를 때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또 다른 ‘강원도의 힘’

    작업을 마치고 철수하는데, 어느덧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 낀 이국땅 밭에서 인부들은 이른 아침을 대충 때우고 다시 한바탕 배추와 씨름하리라. 삶의 무게란 건 세상 어디에서나 같다 싶다.

    고랭지 배추는 안개와 이슬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농심’이라는 영양제를 듬뿍 빨아들인다. 농민들이 다 자란 배추를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농민 처지에선 열악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자라준 배추들이 고맙고 기특할 터다. 어쩌면 고랭지 배추가 강원도의 또 다른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1박2일간의 ‘배추밭 사나이’ 변신이 준 교훈은 이렇다. 배추는 꽃보다 아름답다는 것. 그리고 배추를 사랑하는 이들은 배추보다 더욱 아름답다는 것.

    가을이다.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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