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밭갈이는 종에게 길쌈은 여종에게 묻는다

무신 김세적의 승지 임명

  •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밭갈이는 종에게 길쌈은 여종에게 묻는다

1/2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쓰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도 골치 아픈 문제다. 사실 원칙은 단순하다. 그 임무를 처리할 수 있는 적합한 사람을 임명해야 하고, 그 임명 과정이 공정해야 한다. 원칙이 단순한데도 종종 논란이 생기는 이유는 적합성과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성종 12년(1481) 5월 25일, 왕은 병조참지(兵曹參知) 김세적(金世勣)을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승정원에 전교를 내렸다.

내가 김세적을 승지에 임명한 것은 그의 무예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등용할 만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신의 직책을 거치지 않아서 경험해본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니, 다른 승지들이 각자 그에게 업무를 가르쳐주도록 하라. <성종실록 12년 5월 26일>

이어서 김세적에게는 따로 전교를 내렸다.

그대는 잘 모르는 것이 있거든 반드시 다른 승지들에게 물어본 뒤에 처리하라. <성종실록 12년 5월 26일>

성종이 왜 이런 전교를 내려야 했는지 사관의 논평에 단서가 보인다.


[일러스트·이부록]

[일러스트·이부록]

김세적의 활쏘기와 말타기 실력은 당시 사람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학식은 없었다. 역대 조정에서 무사로서 승지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주상께서 처음으로 변수(邊脩)를 승지로 임명했다. 이어 김세적까지 승지에 제수되자 여론이 더욱 동요했으나,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반대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사간(司諫) 경준(慶俊)이 “이것이 김세적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나라에는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큰소리치기는 하였으나, 그도 과감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후에 예조 판서 이파(李坡)가 주상에게 아뢸 일이 있어 승정원에 갔는데, 김세적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파는 승정원을 나와 사람들에게 말했다. “밭갈이에 대해서는 종에게 물어봐야 하고, 길쌈에 대해서는 여종에게 물어봐야 하는 법인데, 어째서 이런 사람을 승지의 자리에 등용한 것인가?” <성종실록 12년 5월 26일>

승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의 고위직이다. 높은 학식과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 등용되는 자리이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직책이다. 그만큼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해서 등용해야 한다. 김세적은 성종 5년(1474)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북방의 건주야인(建州野人·중국 명나라 때 남만주 건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을 정벌하는 등, 충분히 높은 지위에 오를 만한 능력과 실적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인이었고, 수많은 공문서와 행정 업무를 감당해야 하는 승지의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에 성종 앞에서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을 뿐 조정의 여론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성종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선택을 되돌리려 하지 않았다. 관건은 김세적이 직책에 걸맞은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종 12년(1481) 6월 8일, 중국 사신을 따라온 광대들의 공연을 세자가 보고 싶어 하자 왕이 승정원 승지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승지들이 반대하자 왕은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공연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 일을 기록하면서 사관의 붓은 뜬금없이 김세적을 겨냥한다.

승지들이 회의할 때 김세적은 머리를 푹 숙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김세적은 무사이니 세자를 지키고 키우는 올바른 길을 어떻게 알겠는가? 무릇 승지의 자리는 적합한 사람을 잘 선택하여 제수해야 한다. 그런데 변수, 양찬(梁瓚), 오순(吳純), 이공(李珙), 변처령(邊處寧) 같은 자들이 번갈아 승지가 되니, 어찌 왕명의 출납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는가? <성종실록 12년 6월 8일>

사실 김세적은 좀 억울할 수도 있다. 세자 교육이 중요한 나랏일이기는 하지만 승지가 본래 담당한 업무는 아니다. 세자시강원이라는 세자 교육 전담 부서가 엄연히 따로 있었다. 김세적이 뭘 하든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로 사관에게 제대로 밉보인 모양이다. 여기서 이름이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무신으로, 김세적과 같은 이유로 승지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성종은 어째서 반발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무신들을 승지의 자리에 등용한 것일까? 사실 여기에는 ‘문무일체(文武一體)’ 인식에 기반을 둔 성종 나름의 인사 원칙이 작용하고 있었다.


1/2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연재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더보기
목록 닫기

밭갈이는 종에게 길쌈은 여종에게 묻는다

댓글 창 닫기

2017/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