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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한중韓中 5000년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

  • | 백범흠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울루스부카의 아들 이성계, 조선을 개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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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계 일가는 원나라 지방군벌 테무게 왕가의 가신(家臣)으로 천호장 겸 다루가치 지위를 세습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고려인과 여진인을 지배했다. 1392년 조선 건국은 원나라 지방군벌과 고려 성리학자의 합작품이면서 명나라와 만주의 몽골 세력이 새로운 관계를 정립한 것이다.
몽골족이 세운 원(元)의 중국 지배를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은 원나라를 중국 왕조의 하나로 보나, 몽골은 원을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한 칭기즈칸 제국의 일부로 본다. 몽골족이 세운 여러 나라 중 원나라만 하더라도 중국 본토뿐 아니라 몽골과 만주, 티베트, 북베트남, 고려 등을 직·간접 지배했다.


원나라가 중국 왕조라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청말(淸末) 황흥, 장병린, 추용 등 많은 한족 출신 혁명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국 왕조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나라 또한 중국이 아니라 몽골 왕조의 하나로 봐야 한다. 중국은 아전인수(我田引水)에서 벗어나 원과 요(遼)의 역사를 몽골에 돌려줘야 할 것이다. 현재 중국 영토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중국 역사라는 베이징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도 거란족의 요나라나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해 역사적 권리의 일부를 주장할 수 있다. 요나 금(金), 원은 함경도와 평안도 일부를 영역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원나라 이전 화북을 정복한 흉노, 선비, 저·강 등과 달리 몽골인은 중국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한 중앙아시아 문명국 호레즘의 사마르칸트, 부하라 같은 대도시를 보고 온 후 중국에 진입한 까닭에 중국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갖지 않았다. 몽골족은 오히려 ‘땅에 엎드려 밭이나 가는’ 한족을 경멸했다. 4세기 모용선비 전연(前燕) 황제 모용준이 생포한 한족 염위(冉魏) 황제 염민을 노복하재(奴僕下材)라고 경멸했듯이 몽골족도 한족을 멸시했다. 

쿠빌라이(1215~1294)는 몽골인을 1등급, 서역인을 2등급, 한인(거란, 여진, 금나라 치하 한족)을 3등급, 남인(남송 치하 한족)을 4등급으로 구분하는 등 민족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장관에는 몽골인이 임명되고, 차관에는 서역인이 임명됐으며, 한인이나 남인에게는 말단직만 주어졌다. 유교(儒敎)의 정치·사회적 지위도 격하됐다. 한화파(漢化派)가 권력을 잡았을 때만 겨우 몇 번 과거가 치러졌다. 이처럼 민족차별 정책은 소수 몽골인이 다수 한족을 통치하기 위한 몽골판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단이었다. 한인(漢人)과 남인(南人) 간 차별도 심했는데, 이는 남인의 수가 한인의 7~8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의 명령으로 옌징(베이징)에 막부(幕府)를 차린 무칼리는 잘라이르부 살레타이에게 고려 공략을 맡겼다. 무칼리는 칭기즈칸과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함께 마신 사구(四狗), 사준(四駿) 중 하나로 칭기즈칸에게는 형제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사구, 사준은 충견 넷과 준마 넷을 뜻하는 말로, 칭기즈칸을 도와 몽골제국을 이룬 8명의 장수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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