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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나는 거지로소이다’

연암과 거지 광문, 1%의 우정

  • | 윤채근 단국대 교수

‘나는 거지로소이다’

조선 후기 한양의 생활상이 담긴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조선 후기 한양의 생활상이 담긴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어느 날 갑자기 한양성 전체가 나의 집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열광했고 내 손을 잡아보고 싶어 안달했으며 내가 부르는 노래에 덩실덩실 춤췄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연암 아우는 이야기의 힘이라고 했다. 세상이 더럭 안겨준 이 과분한 행운을 거지인 내가 감당할 수 있었던 건 오직 그와의 만남 때문이었다. 

우연히 행운이 찾아들기 전까지 나의 삶은 비참했다. 누군가 절 앞에 버리고 간 날 ‘복을 부르는 업’이란 뜻의 복업이라 부르며 키워주신 주지 스님이 돌아가시자 지옥이 시작됐다. 한양 대사찰의 말사인 절로 새로 부임한 젊은 주지는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놀고먹던 날 내쫓았다. 졸지에 부랑아가 되어 떠돌다 한양으로 흘러든 내게 세상은 더럽고 누추한 감옥이어서 어서 고통 없이 죽기만 고대할 따름이었다.


세상이 더럭 안겨준 행운

성균관 부근의 숭교방(崇敎坊) 사람들은 뜻도 모른 채 천축국 말로 불경을 외는 내게 먹을 것을 줬고 낙산 아래 건덕방(建德坊) 사람들은 덮고 자라며 거적을 내줬으며 흥인문에서 운종가로 들어서는 초입의 창선방(彰善坊) 사람들은 고뿔에 걸려 죽어가던 나를 혜민서까지 업고 가줬다. 낙산 맞은편 연화방(蓮花坊)에 살던 혜민서 의녀는 길거리에서 가끔 봤다며 굳이 나를 살려놨다. 

혜민서를 나와 양반들이 청풍계천이라 부르던 개천(開川)가에 주저앉았다.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 더러운 물에 빨래를 하고 몸을 씻고 밥을 지어 먹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바라보다 주지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노래를 흥얼대보았다. 지나가던 거지들이 주변에 몰려들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흥이 오른 난 거지들을 몰고 수표교로 걸어가며 주지 스님이 가르쳐주신 춤을 췄다. 수표교에서 놀다 지친 거지들이 제각기 자기 소굴로 돌아갈 즈음 달이 떴고 난 갈 곳이 없었다. 흩어지던 거지 중 일부가 되돌아와 함께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옛날 노래를 잘하고 불경에 나오는 온갖 인물 흉내도 낼 줄 알던 나는 마침내 구걸의 묘법을 터득했고 이내 거지들의 패두가 되었다. 하지만 지나친 즐거움은 명부(冥府)의 차사가 판 함정이라고 했던가. 병든 거지 아이 하나를 돌보며 소굴을 지키던 어느 날, 구걸 나갔던 거지들이 돌아와 잠든 나를 깨웠을 때 병든 아이는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있었다. 굶주림에 신음하던 아이가 안쓰러워 쒀준 겨죽이 기도를 막았던 모양이었다. 분노한 거지들은 살인자라며 날 걷어차기 시작했다. 영문도 모른 채 두들겨 맞던 난 온갖 변명을 늘어놨지만 한번 격정의 파도 위에 올라탄 무리는 멈출 줄 몰랐다. 

무리의 추적을 피해 산 아래 민가로 숨어든 난 어떤 집 지붕 위로 올라가 눕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 위로 별빛이 내리쬐자 눈물이 나왔다. 인생은 왜 내 뜻대로 흐르지 않으며 부처님은 어쩌다 이런 변덕을 부리신 것일까. 행운은 왜 불행의 짝이 되는가. 상념에 젖어 이번엔 반드시 죽어버리리라 결심할 때 개가 짖기 시작했고, 방문 밖으로 뛰어나온 집주인은 하인들을 풀어 나를 포박게 했다. 밤새 심문하던 주인은 날이 샐 무렵에야 나를 풀어주었다.


소문난 약방 일꾼

당나라 승려 습득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의 ‘습득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당나라 승려 습득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의 ‘습득도’.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죽은 거지는 다리 아래로 던져져 들개의 먹이가 되거나 불어난 물에 휩쓸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게 상례였다. 명색이 절밥을 먹던 내가 비록 실수일망정 내 손으로 죽인 아이를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수 없었다. 죽은 아이 시신을 다리 아래에서 끄집어낸 나는 아침에 풀려나며 집주인에게 얻은 멍석으로 둘둘 말아 끈에 묶어 등에 졌다. 묻어줄 자리를 찾아 하염없이 서쪽으로 걷다 서교(西郊) 공동묘지에 이르러 작은 몸뚱이를 소나무 아래 묻고 한참을 서럽게 울고 또 울었다. 태어나는 데 이유가 없듯 죽는 데 또 무슨 까닭이 있으랴. 하지만 태어나지 않음만도 못한 삶이란 도대체 왜 생겨나는 것일까. 주지 스님 얼굴이 문득 떠올라 어릴 때부터 외우던 ‘유마힐경’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다. 

행운은 불행을 틈타 살며시 다가왔다. 서교 공동묘지에서 울던 나를 멀리서 바라보던 한 사람, 멍석을 빌려주며 이상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던 그 집주인, 마포나루에서 세곡을 운반하며 큰돈을 번 권노인이 내 등 뒤로 살며시 다가왔다. 그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자그마한 봉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자넬 의심한 내가 한심하군. 나도 한때 거지 중 상거지였네. 서강과 용산방에서 세곡선을 부리며 죽어라 돈을 모았지. 자식이 셋이었지만 죄다 여기 묻어야 했어.” 

권노인이 왜 나를 미행했는지, 왜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주지 스님 말씀처럼 부처님께선 농을 좋아하시고 자유로운 무의미의 붓으로 세상을 그리시는 분인지도 모르겠다. 이후 권노인의 소개로 난 흥인문 밖 약령시에서 가장 큰 약방의 일꾼으로 고용됐다. 

약방 일은 재미있었다. 물욕이 없던 나는 그저 주인이 주는 대로 돈을 받았고 고객인 의원들에게 약을 내주며 노래를 불러 큰 인기를 얻었다. 의원들은 한양 대가와 종실 어른들을 진맥하며 내 이야기를 아름답게 포장해 전했다고 한다. 광문이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했다. 차츰 한양 사대부가 사이에서 내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할 무렵, 사람들에게 잠자리 얘깃거리를 제공해 돈을 벌던 유명한 이야기주머니들이 약방을 찾아왔다. 불면에 시달리거나 여항 얘기를 즐겨 듣는 사람들에게 장안의 소식을 제공하던 그들은 거지 광문이를 순식간에 유명 인사로 만들어놨다.


‘연암 아우’와의 만남

연암 박지원의 초상. 연암의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실학학회 제공]

연암 박지원의 초상. 연암의 손자인 박주수가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실학학회 제공]

한양의 기생들은 나와 교분을 터야 제대로 성가를 높일 수 있었고 저자에서 힘깨나 쓰던 왈짜패들도 나와의 친분을 앞세워야 관에 쉽게 접근했다. 나는 시장에서 노래하고 술 마시고 춤췄다. 나는 신분을 넘나들며 벗을 사귀었다. 가난한 자들의 빚보증을 서슴없이 섰고 목돈이 생기면 주변에 아낌없이 뿌렸다. 권문세가와 종실 어른들의 잔치에 자주 초대받던 내가 도성 각처에서 했던 일거수일투족은 곧바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광문이의 세상이었다. 아니, 광문이는 애초 있지도 않은 존재였으니 헛것인 내가 겁 없이 세상을 상대로 유희를 벌였다고나 할까. 

영혼 없는 광대의 삶이 차츰 두려워지기 시작할 무렵 연암을 만났다. 그는 소의문 근처 반송방(盤松坊)에 살던 소년이었다. 몸집이 제법 되고 눈매가 시원스러웠다. 가난한 아버지와 병약한 어머니를 둔 그는 할아버지 집에 얹혀 지내고 있었는데 그 후로도 형수와 처가에 차례로 의지하면서 글만 읽으며 살아갔다. 

연암을 처음 본 날 밤, 그의 야동(冶洞) 집 아래 미나리 밭을 내려다보며 내가 살아온 내력을 말해주자 그가 나를 형이라고 불렀다. 아저씨라 부르는 것보단 기분이 좋았다. 당시 그는 불면증으로 격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이야기꾼들을 불러들여 밤을 건너게 돕고 있었다. 내게 이 영특한 소년을 소개해준 자도 민옹이라 불리던 장안의 이름난 이야기꾼이었다. 그날 밤 연암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형은 세상의 재미난 이야기인 게죠. 그래서 얻은 명성이니 이야기가 사라지면 명성도 감쪽같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상대가 한 말의 뜻을 몰라 내가 물었다. 

“삶이 이야기라면 한낱 헛것일 텐데 그럼 나도 가짜란 건가?” 

조금 당황한 기색이던 소년은 두툼한 팔로 내 손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 세상이 본디 크나큰 이야기인 셈 아닌가요? 이 아우는 그 이야기가 덧없이 끝나버릴까 두려워 잠이 들지 못한답니다. 혹은 세상이 너무 재미없어질까 불안해 밤을 지키는 초병이라고나 할까요. 뭐 그렇습니다만.” 

순간 나는 소년의 눈가에 맺힌 이상한 기미에서 승려의 눈망울을 발견했고 이상하게 마음이 후련해지며 입에서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즐거움이 사라지려 했던 한양살이도 그날 이후 다시 흥미로워졌다. 우울증에 빠진 철없는 양반 소년을 구경하러 갔다가 되레 내가 구원받은 셈이었다.


가난한 괴짜 선비

그로부터 우리는 드문드문 만났는데 한양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봐둔 재밌는 장소를 연암에게 얘기하면 그는 반드시 그곳을 방문한 뒤 소감을 글로 적어 읽어주곤 했다. 돌이켜보면 훗날 혼인한 그가 옮겨 다닌 한양 셋방들은 죄다 내가 그때 일러줬던 곳들이다. 삼천동천 백련봉 아래의 초가집, 백탑 인근 대사동(大寺洞)의 헛간 같은 집, 전의감동(典醫監洞)의 빗물 새던 단칸방, 거지들이 득실대던 가회방(嘉會坊) 계산동(桂山洞)의 버려진 친척집. 그가 살던 허름하고 초라한 집들이 아직도 눈앞에 아련하다. 

평민과 어울리기 좋아하던 가난한 괴짜 선비가 세상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학자였다는 사실을 안 건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실은 내가 만났던 비범한 소년이 나중에 무엇이 됐냐는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 역시 돈 많은 벗이나 처가에 손을 벌려 생계를 유지하던 거지, 나의 빛나는 거지 친구였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실제로 그는 거지 흉내도 냈다. 

한양에서의 긴 놀이를 마치고 팔도를 유랑하다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오랜만에 도성을 밟은 때였다. 나의 친동생과 아들이라 사칭해가며 사기 행각을 일삼던 무리와 대질심문을 마치고 의금부를 나설 무렵, 오랜만에 나타난 날 구경하기 위해 한양 사람이 운집해 있었다. 옛 친구들과 두루 인사를 마치고 마침내 저물녘 홀로 광통교 아래 앉아있을 때 뚱뚱한 사내가 뒤뚱대며 다가와 옆에 앉았다. 넝마 조각을 이어붙인 옷을 걸친 틀림없는 거지였다. 거지가 거지를 만났으니 좀 즐겨볼 양으로 통성명을 하려는데 그 뚱보가 껄껄 웃었다. 

“갈(喝)! 거지중 주제에 아우를 모른다고 또 잡아떼려고? 이번엔 진짜 동생인걸.” 

상대를 한참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뼈대가 튼실하고 우람해진 연암을 알아봤다. 그동안 쓸데없는 공부를 하느라 머리가 세고 나이도 어린 것이 이마엔 주름까지 패어 있었다. 우리는 얼싸안고 백탑 근처 주막을 찾아 밤새 마시고 춤췄다. 문자깨나 하는 유식한 자 여럿이 들러 알아듣기 어려운 고담준론을 늘어놓다 어떤 자는 고꾸라져 잠들고 어떤 자는 갑자기 찾아온 마누라 손에 잡혀갔다. ‘미중(美仲)’이란 자로 부르던 소년을 연암이란 호로 부르게 된 게 그때부터였던가? 

몇 년을 더 한양에 붙어있던 나는 마침내 영원히 세속을 등지고 수십 년 떠돌이 중으로 살아왔다. 부질없는 명성 따윈 쉽게 잊혔지만 연암은 이상하게 그리워 틈나는 대로 언찰을 부쳤고 그때마다 꼬박꼬박 답장이 왔다. 그 탓인지 나는 그의 평생을 내 눈으로 본 것처럼 회상할 수 있다. 얼마 전 황해도를 유랑하면서는 그가 살아생전 그리도 갈망하던 길고 편안한 잠에 든 곳도 다녀왔다. 그는 무한한 잠 속에 빠져 있었다. 한참 넋 놓고 무덤을 바라보자니 서교에 묻어준 거지아이가 생각났다. 비대했던 연암의 체구와 걸맞지 않게 봉분은 앙증맞았고 묘석조차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대나무 한 그루가 마치 누가 꽂아놓은 것처럼 서 있었다.


‘습득’ 스님

연암 박지원의 대표작인 ‘열하일기’ 친필본.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제공]

연암 박지원의 대표작인 ‘열하일기’ 친필본.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제공]

대나무를 꺾어 지팡이로 만든 나는 내친김에 연암이 젊은 시절부터 들어가 살기를 꿈꾼 마음속 이상향 황해도 연암협으로 갔다. 노동하기를 즐겼던 그의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한때 머물며 그가 터를 닦은 집터도, 시범 삼아 개간하던 밭도, 저수지로 이어지던 도랑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긴 언젠가 그렇게 사라질 것들이었다.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바싹 말라버린 내 늙은 몸을 내려다보자니 대나무 지팡이와 별 차이도 없었다. 

세상을 돌고 돌다 보니 별별 뜨내기를 다 만났고 개중엔 신기한 물건들도 많았다. 올해 경기 땅 절들을 순력하다 만난 한 미친 화사 녀석은 뜬금없이 초상을 그려주겠다며 날 절 마당 구석에 돌아앉게 했다. 녀석은 내 뒷모습을 그려놓고 한참 낄낄댔다. 그림을 들여다보니 영락없는 거지꼴인 것이 나를 닮긴 했다. 그림을 주려다 도로 제 소매 안에 넣으며 녀석이 물었다. 

“길에서 주워 길러져 습득(拾得)이라 불린 스님을 혹 아시오?” 

천하의 대지식가 연암의 형이 습득을 모르겠는가? 당나라 때 절강 지역 국청사에 살던 유명한 바보 스님이 아니던가? 절 근처 동굴에 거지처럼 살던 한산(寒山) 스님에게 먹다 남은 절밥을 모았다가 공양했다던 마음 착한 그 스님, 거지들의 구원자. 화사 녀석이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렇게 씨부렁거렸다. 

“난 임금님 어진도 그리던 김홍도라 하오. 이젠 다 늙어 이 절 저 절 떠돌며 즐기며 산다오. 댁이나 나나 조만간 죽을 몸뚱이, 우리 한산과 습득이 되어 절밥에 탁주나 함께 해보겠소?”


※ 10대 시절의 연암 박지원은 한양의 유명한 거지 광문이를 입전(入傳)한 ‘광문자전(廣文者傳)’을 지어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0여 년 지나 문명을 떨치게 된 연암은 후일담 형식의 속편 ‘서광문자전후(書廣文者傳後)’를 지어 18세기 한양의 다양한 도시 풍정을 흥미진진하게 묘사했다. 위의 소설은 이러한 광문에 대한 연암의 관심과 애정을 단서 삼아 둘 사이의 우정을 허구적으로 상상해본 것이다. 비록 상상의 소산이지만 그 배경이 된 역사적 상황과 등장인물은 사실에 즉해 있다. 또 연암이 청소년기부터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그의 초기작 ‘민옹전(閔翁傳)’에 나타난다. 글 말미에 김홍도가 등장하는 장면은 허구지만 1810년경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홍도가 한양에서 갑자기 사라진 늙은 광문과 경기도쯤에서 만났을 개연성은 전혀 없지 않다. 그의 말년작인 ‘습득도’를 보면 중국 승려인 습득이 조선인처럼 짚신을 신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부정하게 앉은 습득의 뒷모습에는 천진난만한 백치성 속에 비범한 통찰력을 숨기며 살았던 한 조선 거지의 영상이 녹아 있다.


‘나는 거지로소이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신동아 2018년 7월 호

| 윤채근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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