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박상희의미술과 마음 이야기

마음의 기하학 구의 궤적

김수자

  • 박상희 |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입력2016-12-20 17: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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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코너를 쓸 때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은 감성과 이성, 느낌과 생각의 총체이면서 참으로 신비한 존재입니다. 마음은 나를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자유롭게 만들기도 하고 근심스럽게 구속하기도 합니다. 마음이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은 육체로부터, 물질로부터, 가족과 친지 등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자율성이 부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가 고통스럽더라도, 물질이 빈곤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힘들게 하더라도, 마음은 그 고통과 빈곤과 고난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세상사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이를 뜻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은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지름 19m 캔버스

    마음의 문제를 오랫동안 숙고해온 분야는 종교입니다. 이 코너에서 크레타 출신의 매너리즘 화가 엘 그레코를 다루며 기독교 신앙과 마음을 살펴보기도 했지요. 모든 종교의 화두는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인 저는 불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마음’ 하면 떠오르는 사람 중 한 분이 법정 스님입니다. 스님의 책 ‘무소유’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법구경’에 이런 비유가 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점점 그 쇠를 먹는다.’ 이와 같이 그 마음씨가 그늘지면 그 사람 자신이 녹슬고 만다는 뜻이다.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



    ‘내 마음을 내가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내가 내 마음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마음이 느낌·생각·정신을 포괄하는 것이라면, 느낌이든 생각이든 정신이든 그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나는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일 뿐입니다. 이처럼 자율적인 내가 올바르게 서 있을 때에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오늘은 마음의 모양을 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설치미술가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2017년 2월 5일까지)되고 있는 ‘마음의 기하학’ 작가 김수자(1957~)가 그 주인공입니다. ‘마음의 기하학’이라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그가 전달하려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김수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술가입니다. ‘보따리 트럭-2727킬로미터’와 ‘바늘 여인’ 등이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요. ‘보따리 트럭-2727킬로미터’가 보따리를 싸서 트럭에 실은 채 전국을 돌아다닌 퍼포먼스에 대한 기록이라면, ‘바늘 여인’은 중국·인도 등의 순례 기록입니다.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보면 작가가 화실 안에서 작업한 전통적인 화가가 아니라 삶 속에서 활동한 미술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기하학’은 상당히 신선하고 경이로운 작품입니다. 지난 초가을 어느 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이 전시를 보러 간 기억이 생생합니다. 1층에서 티켓을 끊고 지하로 내려가 전시실을 찾았습니다. 들어가 보니 한가운데에 큰 타원형 탁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지름 19m인 이 탁자는 거대한 캔버스와도 같았습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다

    안내에 따라 저는 전시실 안쪽 입구 옆에서 찰흙 덩어리를 하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탁자 앞에 앉아 찰흙을 둥근 공 모양으로 빚었습니다. 작가가 관람객에게 요청한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그 둥근 공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레 굴렸습니다.

    이 전시실에는 ‘마음의 기하학’ 말고 또 하나의 작품이 있었습니다. 공을 만들어 굴리는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작가가 클레이 볼을 굴리는 소리와 입 안을 가글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사운드 작품인 ‘구의 궤적’(15분 31초)인데요. 다소 어두운 실내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제 마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줬습니다. ‘마음의 기하학’과 ‘구의 궤적’은 참여자로 하여금 시각·촉각·청각을 모두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마음의 기하학’은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서 작품을 완성합니다. 작가는 우리가 손으로 찰흙을 떼어내 공을 만들고 굴리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게 하려는 것일까요. 국립현대미술관 측이 제공한 자료에는, ‘이 작품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 물질적 상태에서 비물질적 상태로 변화되고 상반되는 대칭의 힘을 정신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설치미술에 대해 그렇게 큰 호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설치미술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직업이 상담사라 그런지 모르지만 어떤 미술이라 하더라도 대중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많은 이에게 공감을 주지 못하는 작품이라면 걸작이라 하더라도 대중이 성공한 작품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느껴왔습니다.

    ‘마음의 기하학’에 담겨 있다는 물질과 비물질에 대한 해석도 제겐 다소 심오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참여하는 저의 행위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나름대로 이 작품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이 작품은 대중과 가깝게 호흡하려는 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손으로 빚은 마음

    전시실에 입장하자마자 저는 건네받은 찰흙을 갖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크기로 찰흙을 떼어냈습니다. 순간 이 찰흙이 내게 무엇일까하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작품의 제목이 ‘마음의 기하학’이니 이 찰흙이 내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찰흙을 찬찬히 바라봤습니다.

    ‘그래, 만약에 마음이라는 게 눈에 보이거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이라면 나도 가끔 내 마음을 떼어내 부드럽고 둥글게 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빚고 싶었던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두 손으로 조심스레 찰흙을 공 모양으로 만드니 어느새 내 마음도 부드럽고 둥글게 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상담사로서 종종 미술치료를 경험했지만, 이번 관람은 거대한 미술관에서의 예술적 의식이라는 행위가 더해져서인지 미술치료보다 더 묵직하게 느껴지고 깊게 몰두할 수 있었습니다. 바쁘게 사느라 나도 모르게 모났던 내 마음이 고요 속에서 내 손의 위로를 받아 둥근 공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곱고 정성되게 빚어진다면 마음속 불안이나 상처도 치유되고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도 줄겠네…’ 싶었습니다.

    작은 공을 만든 다음 탁자 저 안쪽으로 굴리려고 하자 소리가 들렸습니다. 딱딱한 것을 굴리는 소리와 입안을 가글하는 소리였습니다. 생각해보니 전시실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이 소리는 들려왔었습니다. 다만 찰흙을 받고 빚느라 제대로 듣지 못했을 뿐이지요.

    무엇인가 구르고 가글하는 소리 속에 내 공이 탁자 안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저는 눈앞에 펼쳐진 타원형 탁자가 마치 우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실을 가득 채운 그 소리는 내 마음의 공이 우주로 굴러가는 소리처럼 느껴졌습니다. 작은 존재의 외침 같기도 했고, 외로운 존재의 절규 같기도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가글하는 소리였습니다. 공을 굴린 다음 저는 작가가 왜 가글하는 소리를 ‘구의 궤적’에 담았는지를 생각해봤습니다. 가글은 목과 입을 청결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또 목과 입은 말을 처음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타인에게 의미를 전하는 말은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목과 입을 통해 표현됩니다. ‘구의 궤적’에 가글하는 소리를 넣은 것은, 공으로 빚어진 마음이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의 의미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시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마음의 기록 보관소

    작가는 왜 이 작품에 ‘기하학’이란 말을 썼을까요. 기하학이란 공간을 연구하는 수학의 한 분야입니다. 이 작품에서 제 시선을 끈 것은 영어 제목입니다. ‘마음의 기하학’의 영어 제목은 ‘Archive of Mind’입니다. 아카이브란 기록을 보관하는 곳을 말합니다. 영어 제목을 우리말로 하면 ‘마음의 기록 보관소’입니다.

    이 글을 쓰기 직전 저는 다시 전시장에 다녀왔습니다. 글로 정리하기 전에 그때의 느낌을 되살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티켓을 사서 지하로 내려가 전시실을 찾았습니다. 모든 게 지난번 초가을에 찾았을 때와 같았습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더 이상 진흙으로 공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탁자가 공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번과 다른 새로운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탁자 위에 수많은 마음이 한가득 놓여 있었습니다. 저 안 어딘가에는 초가을에 빚은 제 마음도 있겠지요.

    지난번 방문에선 내 자신의 마음을 만나고, 빚고, 위로했다면 이번 방문에선 ‘우리의 마음’ 혹은 ‘공동체의 마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음의 기하학’에는 정말 수많은 마음이 보관돼 있었습니다. 제게 감동적이었던 것은, 탁자 위에 있는 수많은 마음이 찢겨지거나 뜯겨진 모습이 아니라 둥글고 고운 모습이었다는 점입니다.

    어두운 전시실 안에서 저 탁자 위 어딘가에 놓여 있는, 초가을에 빚어두고 온 제 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에는 여러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기쁨의 마음과 슬픔의 마음, 분노의 마음과 즐거운 마음, 행복한 마음과 불행한 마음. 이런저런 마음 나무가 모여 마음의 숲을 이루는 게 바로 인간의 내면이자 삶이 아닐까요. 마음의 숲에선 그 마음의 나무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론 부딪히거나 화음을 이루어 합창하기도 합니다.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자기 마음의 주인이 돼 마음과 함께 살아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의 모양을 돌아보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겠지요. 오늘, 나의 마음은 어떤 모양인지 그 마음이 내게 하는 소리는 무엇인지 귀를 열어 들어볼 수 있길 바랍니다.



    박 상 희
    ● 1973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문학박사,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방문학자
    ● 現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JTBC ‘사건반장’ 고정 패널
    ● 저서 : ‘자기대상 경험을 통한 역기능적 하나님 표상의 변화에 대한 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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