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설탕 탄 탕국’ 서민 기호품 되다

한국 커피 현대사(광복~1960년대 말)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입력2016-12-22 11:17:38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우리나라에선 일제강점기 후반 들어 커피 대중화 움직임이 보였다.
    • 6·25전쟁 땐 인스턴트 커피가 물꼬를 텄고, 종전 이후엔 커피가 서민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 시대의 변곡점마다 변신을 거듭하며 생명력을 이어온 대한민국 커피 현대사.
    커피가 처음 한국에 전해진 것은 기록상으로 구한말이다. 이어진 일제강점기에 일부 지식인이 다방을 열어 계몽의식을 불어넣고자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하루 각박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커피는 부자나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비칠 뿐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후반부터 작지만 의미 있는 커피 대중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6·25전쟁 때는 미군을 통해 인스턴트 커피가 물꼬를 텄다. 종전(終戰)과 함께 커피는 서민의 일상까지 깊이 파고들었으며, 반세기를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지칠 줄 모르고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시대의 변곡점마다 기발한 변신으로 생명력을 이어온 한국 커피의 현대사를 되짚었다.

    3·1운동 이후와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민족말살정책을 펴기 전까지 10여 년의 시대적 공간은 암흑 속에서 미약하나마 문화예술의 숨통이 트인 시기로 기록된다. 이때 한국인들은 속속 다방을 열었으며, 상인들이 커피를 팔기도 했다.



    접대용 ‘인삼커피’

    1926년엔 ‘위생대감(衛生大鑑)’ 증보판에 처음으로 커피의 효능을 소개하는 내용이 실렸다. 1913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종두법을 최초로 도입한 지석영과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 박영효가 서문을 썼는데, 가정 비치용 의학백과사전이다.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백과사전 편찬을 통해 “지식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시민의 뇌리에 깊이 새김으로써 대혁명을 이끌어낸 것처럼, 우리 지식인들도 비슷한 노력을 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커피가 전해진 모든 나라에서 그러했듯, 조선 땅이 일제의 지배를 받는 와중에도 커피는 일단 발을 들여놓자 후퇴를 모르고 급속히 퍼졌다. 커피는 곧 다방을 벗어나 가정에까지 파고들었다. 미국의 외교관, 선교사 행렬에 섞여 들어온 커피 브랜드 ‘맥스웰(Maxwell)’은 1930년부터는 전단지를 만들어 서울 광화문과 종로 일대에 뿌리는 등 적극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핵심 메시지는 ‘가정에서 즐기는 커피, 맥스웰’이었다. 조선인삼원은 커피를 섞은 인삼커피(Ginseng Coffee)를 선보였다. 물에 타 손쉽게 내놓을 수 있는 인스턴트 인삼커피라 주부들 사이에선 손님 접대용으로 인기를 누렸다.

    상인들도 커피를 비즈니스에 활용했다. 프랑스 출신의 폴 안토니 푸레상은 만리동 고갯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래상(富來祥) 상회’를 열고 남대문시장으로 가던 나무꾼들을 길목에서 채갔다.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면서 흥정을 유리하게 이끈 것. 그는 화살통만한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멀리 무악재까지 나가 고개를 넘어오는 나무꾼들도 사로잡는 재주를 부렸다. 이때가 1910년쯤으로, 푸레상은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휴대용 보온병을 사용해 커피를 홍보 도구로 활용한 인물로 기록됐다. 장터에서 작은 수레를 끌고 다니며 인스턴트 커피를 파는 ‘시장 바리스타’의 원조가 푸레상인 셈이다. 하지만 그는 욕심이 지나쳐 가짜 화장품을 만들어 팔다 붙잡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커피를 즐기기 위한 용품도 기지개를 켰는데, 1930년대 평북 정주의 유기공장들은 커피 잔과 드립용 주전자는 물론 휴대용 커피 보온병까지 만들어냈다. 내수 및 해외시장 문을 두드리다 유기로 만든 한국형 커피잔 세트를 미국에 수출하기도 했다.



    최승희 스타 마케팅

    1940년대에 들어서면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탓에 커피 문화를 추적하기 힘들다. 한동안 꽃을 피우던 지식인들의 다방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커피, 설탕 등의 수입이 막히면서 거의 폐업 상태로 빠져들었다. 다만 조선호텔이 카페를 알리려 일종의 스타 마케팅을 한 흔적이 보인다.

    1940년 29세의 최승희가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내 썬룸에서 커피를 마시는 장면이 호텔 측 카메라에 포착됐다. 전설적 무용가로서 최신 유행의 상징이기도 하던 그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당시 젊은이들로 하여금 커피를 마셔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데 한몫한 듯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왕의 종전 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면서 한국에선 근대사가 마감되고 현대사가 열렸다. 커피를 통해 본 한국사에서 광복은 곧 현대의 시작이자 인스턴트 커피가 등장한 전환점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다방 레지’

    대체로 대중화에 따르게 마련인 ‘격조의 하락 현상’은 커피의 경우엔 예외였다. 커피는 값어치 있는 소중한 문화의 징표로서 기품을 잃지 않았다. 대통령의 선물이 커피용품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7년 로버트 가드 중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면서 준 선물이 커피잔 세트다. 이 대통령 부부가 각료들과 커피를 즐기는 장면도 언론을 통해 자주 전해졌다.

    당시 2인자로 군림한 이기붕 부통령은 1939년 유학에서 돌아와선 지식인의 대열에 서서 다방을 열기도 했다. 그의 아내 박마리아는 다방 일을 적극적으로 거들었는데, 그래서 일각에선 그녀를 한국 최초의 ‘다방 레지’로 기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박마리아 개인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나 비하에 그치지 않고, 일제강점기에 다방을 운영하던 여주인을 모두 폄훼하는 관점인 만큼 적절하지 않다. 당시 다방 여주인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나 예술문화인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살롱 문화를 다방에 접목하고자 애쓴 선각자들이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열고 연대감을 나누며 다방을 살롱처럼 가꾸려 노력했고, 그 밑바닥엔 국민을 상대로 계몽의식을 싹틔우려는 열망이 흘렀다.

    이기붕 부통령과 박마리아가 반애국적 행동으로 지탄받았다고 해서 일제강점기의 다방 여주인을 싸잡아 레지로 취급하는 건 부당하다. 그러한 시각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의 다방을 업신여기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레지’는 출입자 명부를 작성해 돈을 계산해주는 ‘레지스터(Register)’를 일본인이 줄여 부른 데서 비롯된 용어다. 점차 ‘다방 따위에서 손님을 접대하며 차를 나르는 여자’로 굳어졌다. 일제강점기에 이런 역할을 한 여종업원은 일본인들이 운영하며 커피뿐 아니라 술도 팔고 남녀가 어우러져 춤도 추던 ‘카페’에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커피를 팔던 공간은 이와 구분하기 위해 ‘다방’이라고 따로 불렀다.



    ‘제25 강의실’ 학림다방

    다방 문화의 주체가 지식인에서 대중으로 바통을 건네주는 구실을 한 건 대학생들이다. 1956년 서울대 문리대가 있던 동숭동에 ‘학림다방’이 문을 열었다. ‘학림(學林)’은 ‘학자, 지식인이 모이는 곳’이란 뜻이다. 이름에 걸맞게 국내 최고 학부의 학생들이 드나들던 이곳은 단지 커피를 즐기며 잡담을 나누던 공간이 아니었다. 당시 문리대엔 24개 강의실이 있었는데, 학림다방은 ‘제25 강의실’로 불릴 만큼 진지함이 묻어나는 지성의 공간이자, 청춘의 영원한 강의실 기능을 톡톡히 해냈다. 문리대 학생회는 1962년부터 축제를 열었는데, 그 명칭을 다방 이름을 딴 ‘학림제’라고 할 정도였다.

    학림다방이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껏 많은 사람에게 잊히지 않는 건 단지 서울대생의 사랑방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1960년 봄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대규모 부정·불법선거가 판을 치면서 국민의 불만이 극에 달했을 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한 거국적 민중봉기의 불을 지핀 아지트들 중 하나가 학림다방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다방에선 낭만의 바람도 불기 시작했다. 1960년에 접어들면서 대학 교재엔 커피 끓이는 법이 실리고, 커피 예절은 여대생이 갖춰야 할 교양처럼 자리를 잡아갔다. 커피 추출법이 실린 새로운 가정요리전서는 신혼집들이 선물로 인기를 끌었다. 이즈음 다방에 모여 포커놀이를 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신문에 실리는 등 커피는 바야흐로 일상이 됐다.

    대학생들이 몰리면서 다방에서 틀어주는 음악도 팝송으로 바뀌어갔다. 1950년 10월 미군 위문용으로 방송을 시작한 AFKN은 전쟁이 끝난 뒤부터 프로그램의 80~90%를 팝송으로 편성했다. 당시 한국의 라디오는 팝송을 소개하지 않았기에 미국 대중음악을 감상하려 다방을 찾는 젊은이도 적지 않았다.

    1962년 KBS 라디오가 ‘금주의 히트 퍼레이드’, MBC 라디오가 ‘한밤의 음악편지’를 통해 팝송을 소개하면서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카, 패티 페이지, 팻 분, 비틀스, 밥 딜런 등 외국 가수들은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음악은 다방 역사에서 1960년을 정의하는 하나의 코드다. 팝송을 들으려는 사람이 늘자 청계천에선 불법 음반이 대량 거래됐다. 다방들도 라디오 방송에 의존하지 않고 언제든지 원하는 음악을 제공하려 전축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60년대 중반 명동과 종로, 충무로 등지에 DJ박스를 설치한 음악다방이 등장한다. 명동에 있던 ‘심지다방’은 좌석이 400석 규모로, 보유 음반이 2000장에 달했다.

    지지 않는 해처럼 보이던 음악다방도 그러나 위기를 맞는다. 1960년대 음악다방 전성기에 통기타로 생음악을 들려주던 ‘세시봉’이 기지개를 켰고, 국내 최초 커피회사인 동서식품이 문을 열면서 다방은 큰 도전을 받는다. 커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거대한 대중화라는 변곡점을 넘고 있었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