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봄 서울 성북구 공릉동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캠퍼스. 며칠 전 중간고사를 치른 전자공학과 2학년 학생들은 느닷없는 ‘전원 재시험’ 통보에 의아해했다. 문제의 과목은 ‘공학수학’. 당시 공대 학생들에겐 필수과목이었는데, 수학이라면 난다 긴다 하는 공대생들도 치를 떨 만큼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요즘 서울대에 들어오는 학생 중에선 30% 정도만이 이 과목 수학능력을 갖췄다는 게 교수들의 귀띔이다).
그런데 전자공학과 학생들에게 ‘공학수학’을 가르치던 수학과 교수는 첫 중간고사를 치른 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체 50명 중 무려 30여 명이 만점을 받은 것이다.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이라 꽤 까다롭게 문제를 냈는 데도 그렇듯 ‘참담한’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변별력이 없는 시험은 무용지물. 고민 끝에 교수는 재시험을 보기로 결정했다. 점수가 너무 좋아서 재시험을 치르게 된 초유의 ‘사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1960년대 말부터 국내 전자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전자공학과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 대목에서 한국의 공과대학 ‘인기 변천사’를 잠깐 살펴보자.
광업이 주요 산업이던 해방 무렵까지는 광산과의 인기가 높았다. 그러다 1950년 전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화학공학과가 ‘물 만난 고기’였다. 치약, 비누 같은 생필품이 귀하던 시절인데, 이런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대형 설비가 필요치 않아 산업화 초기에 각광을 받을 만했다. 그래서 화공과 졸업생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다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뒤따라 화공과의 주가 상승을 부추겼다.
하지만 1965년 IC(집적회로) 시대가 열리면서 1960년대 말부터는 전자공학과가 정상에 등극했다. 그후 발전소 건설 붐이 일었을 때는 원자핵공학과가, 선박 수주 열기가 뜨거웠을 때는 조선공학과가 반짝 특수를 누리긴 했어도 전자공학과는 최근까지 30여년간 최고 인기학과로 장기 집권했다.
전자공학과 중에서도 서울대 전자공학과는 인문계, 자연계를 막론하고 수재 중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전국 최고의 인기학과였다. 지금의 수능시험 격인 대입 예비고사에서 못해도 전국 순위 200위 안에는 들어야 합격을 기대할 수 있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전자회사에 취직해 생산라인으로 파견을 나가면 여공들이 요즘 영화배우 장동건, 권상우를 대하듯 몰려와서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며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곤 했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서울대에 다닌다고 다 같은 서울대생이 아니다’는 특유의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 여느 서울대 학생이 ‘평민’이라면 공대 학생은 ‘진골’, 전자공학과 학생은 ‘성골’로 쳤다. 요즘은 어느 대학에서나 의예과가 톱을 달리고 있으나,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서울대 자연계열 19개 학과 중 전자공학과가 단연 수위였고 의예과 커트라인은 7∼8위, 치의예과는 공대 최하위 학과보다 커트라인이 낮았다.
“당시 서울대는 계열별로 신입생을 선발, 1학년을 마친 뒤 성적순으로 학과를 배정했는데, 정원이 50명인 전자공학과에 들어가려면 공대·자연대·사범대 이과 신입생 1120명 가운데 상위 5% 이내에 들어야 했다. 그러니 전자공학과에 맨 꼴찌로 붙은 학생의 학점도 4.3점 만점에 3.8점이 넘을 정도였다.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2학년 1학기까지는 대부분 4.0대 학점을 유지하지만, 우등생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2학기에는 난생 처음 2.0대의 충격적인 학점을 받고 실의에 빠지기도 했다. 학생들이 하도 어이없어 하니까 교수님이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해라. 여기에서 꼴찌해도 다른 데 가면 1등이다’며 격려해주던 기억이 난다.”
전자공학과 74학번인 서울대 이범희 교수(전기공학부)의 회고다. 내로라하는 공부벌레들 사이의 경쟁이라 한 순간만 방심해도 성적이 뚝뚝 떨어지기 때문에 졸업할 때까지 엎치락뒤치락 예측불허의 ‘공부전쟁’을 거듭했다. 시험 전날이면 통금(通禁) 직전까지 함께 술을 퍼마시는 등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눈치작전도 치열했다. 선의의 경쟁은 바람직한 결과를 낳았다. 이 교수의 입학 동기생 중 절반에 가까운 20여명이 현직 대학교수이며, 나머지 동기생들도 대기업 임원이나 중소기업 대표 등 굵직굵직한 포스트에서 활약하고 있다.
동문 장관 3인 동시 재임
서울대 공과대학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미군정 법령에 근거해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대 이공학부 이학계를 모체로 출범했다. 당시 공과대 9개 학과 중의 하나로 전기공학과를 뒀는데, 전기공학과에는 강전(발전설비·산업용 전기기기) 전공과 약전(전자·통신기기) 전공이 있었다. 1947년에는 약전 전공을 전기통신학과로, 강전 전공은 전기공학과로 분리했으며, 전기통신학과는 1948년 통신공학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59년에는 다시 전자공학과로 개칭됐다. 그러다 1995년에 이르러 전자공학과, 전기공학과, 제어계측공학과가 전기공학부로 통합됐다.
전자산업의 외연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면서 전자 분야로 진출하는 전기공학도들이 늘어난 데다, 최근에는 약전에 비해 강전 분야의 커리큘럼이 많이 줄어들어 ‘3당 통합’은 매우 순조롭게 이뤄졌다고 한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들은 학창시절이나 지금이나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다. 1960∼70년대에 서울대 공대에 다니던 학생들은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배지를 마다하고 ‘S’자 좌우에 각각 ‘工’ ‘大’라고 써넣은 공대 배지를 만들어 달고 다니며 차별화를 겨냥했다. 이 배지가 당시 서울공고 배지와 디자인이 비슷해 “너희가 공대생이냐, 공고생이냐”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하지만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한술 더 떴다. 서울대 배지에는 펼쳐놓은 책 양면에 ‘VERITAS LUX MEA(진리는 나의 빛)’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 글 대신 ‘전’자와 ‘자’자를 써넣은 사제(私製) 배지를 달고 다님으로써 한 차원 더 높은 차별화를 기도한 것이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대부분 산업현장이나 대학, 연구소 등에 진출해 주로 R&D(연구·개발) 업무에 종사했다. 그들은 자본, 기술, 숙련인력 등이 태부족해 황무지와도 같았던 산업여건에서 한국을 세계적인 전자산업 강국으로 키워낸 주역이라 자처한다. 자신들의 두뇌와 근면으로 가전, 반도체, 정보통신 등 국가 생존전략과 직결된 첨단 전자산업 발전을 견인, 막대한 국부(國富)를 창출한 공적을 제대로 평가받고 싶어 한다. 전자공학과 출신의 한 기업인은 “서울대 전자공학과가 지금까지 배출한 인력은 2000명 남짓하지만, 1900억 달러에 달하는 우리나라 수출실적 가운데 이들이 직·간접적으로 기여하지 않은 부분은 드물다”고 했다.
최근에는 이들의 자부심을 또 한번 고양시킬 만한 일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개각에서 두 명의 전자공학과 출신 장관이 탄생한 것. 오명(吳明·64·62학번) 과학기술부 장관과 이희범(李熙範·55·67학번) 산업자원부 장관이 그 주인공. 이로써 진대제(陳大濟·52·70학번)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정부 연구·개발 예산의 85% 이상을 쓰는 세 부처 수장을 모두 전자공학과 동문들이 차지했다.
오명 과기부 장관은 육군사관학교(18기)를 졸업한 후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 김영삼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을 지내 이번에 네번째 입각이다. 1981년부터 8년간 체신부 차·장관을 지내면서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하고 통신산업 재편을 주도했다.
이희범 산자부 장관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이듬해인 1972년 제12회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 상공부 사무관으로 공직의 길에 들어섰다. 대학시절의 전공을 살려 정보기기과장, 전자정보공업국장 등을 지낸 후 산업정책국장, 자원정책실장, 차관 등 요직을 차례로 거치면서 무역, 산업정책, 통상, 자원 분야를 폭넓게 경험했다.
진대제 정통부 장관은 별명이 ‘미스터 디지털’이다. 미국 메사추세츠주립대에서 석사,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휴렛팩커드와 IBM에서 일하다 1985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뒤 16메가·64메가·256메가·1기가D램 개발에 잇따라 성공, 한국을 반도체 선진국으로 끌어올렸다.
삼성전자에서 그의 직위는 그가 개발한 반도체 용량만큼이나 수직 상승했다. 40세에 상무, 41세에 전무, 44세에 부사장을 거쳐 48세 때인 2000년 정보가전총괄담당 사장에 올랐다. 2002년 12월 디지털미디어네트워크총괄 사장으로 발령난 지 두 달 만에 노무현 정부의 초대 정통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지난해 12월 개각에서는 이들 말고도 또 한 사람의 전자공학과 출신 장관이 나와 4명의 동문 장관이 함께 재임할 뻔했다. 김재창(金在昌·64·62학번)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유력한 국방부 장관 후보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명 장관과 육사 및 서울대 전자공학과 동기인 김 전 부사령관은 합참 작전기획국장, 6군단장, 국방부 정책실장을 거쳐 1993년 김영삼 정부 시절 연합사 부사령관에 올랐으나 하나회 회원을 지낸 전력 때문에 옷을 벗었다. 당시 미군측은 군내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알려진 그의 전역을 적극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방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이들 외에는 차양신(車亮信·49·73학번) 정보통신부 부이사관, 송정희(宋正姬·46·77학번) 정보통신부 장관 정책자문관 등을 전자공학과 출신의 고위 공직자로 꼽을 수 있다.
차양신 부이사관은 행정고시 25회 출신으로 정통부에서 통신업무과장, 방송위성과장, 정보보호기획과장을 지내다 현재는 정보통신연구진흥원 수석전문위원으로 파견됐다. 행정고시 24회 선배들과 같이 서기관이 되는 등 승진이 빨랐다.
송정희 자문관은 다양한 커리어의 소유자. 미국 텍사스대에서 석사, 카네기멜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서울대 최초의 여성 공학박사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에서 부장까지 지내다 1999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옮겼고, 2001년에는 멀티미디어 교육솔루션 벤처기업 텔레젠을 창업했다. 지난해 6월 진대제 장관의 정책자문관으로 정통부에 들어갔다. 그의 직책은 ‘마스터 PM(Master Project Manager)’. 진 장관은 취임후 기술마케팅, 이동통신, 디지털 TV, 지능형 서비스 로봇, 반도체 등 10개 프로젝트에 대해 PM제도를 도입했는데, PM은 각 프로젝트의 기획단계에서 완료후 기술이전까지의 전 단계를 총괄관리하는 책임자다. 마스터 PM인 송 자문관은 이들 PM을 총지휘하는 책임자로 그 영역과 권한이 막강하다.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변리사로 활동하는 백만기(白萬基·50·72학번)씨의 경력도 이채롭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78년 특허청 심사관에 특채됐다. 이후 공직생활 22년 중 15년을 전자·정보통신 분야 특허업무에 매달렸다. 산업자원부에서 정보기기과장, 반도체과장, 산업기술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9년 특허청 심사4국장(이사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접고 로펌 소속 변리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유효경(兪孝卿·47·75학번) 아주종합법무법인 변호사는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다 졸업 10년 만인 1989년 행정고시(33회)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인 1990년엔 사법시험(32회)에도 합격했다. 변호사와 변리사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유혁(柳爀·36·87학번)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는 사법시험 36회 출신이다.
최근 몇 년 동안엔 사법시험에 응시하는 전자공학과 재학생 및 졸업생이 크게 늘었으며, 합격률도 비(非)법대 출신 중 가장 높은 축에 든다고 한다.
홍석현(洪錫炫·55·68학번) 중앙일보 회장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는 유일한 언론사 사주. 스탠퍼드대에서 산업공학 석사와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은행(IBRD) 경제조사역으로 활동하다 귀국, 5공 때 재무부 장관 비서관과 대통령비서실장 보좌관을 지냈다. 1986년 삼성코닝 상무로 기업 경영에 나섰고 1994년 중앙일보 부사장으로 옮겨와 사장, 회장에 올랐다. 고(故)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남으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미술관장의 동생이다.
금성·삼성의 블랙홀 효과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들이 주류를 형성한 곳은 아무래도 업계와 학계로 양분된다. 업계의 경우 초기에는 보잘 것없었다. 업계 진출 1세대라 할 통신공학과 졸업생들은 전공지식을 활용할 만한 직장이 없어 대개 체신부 직원으로 채용됐다. 맨홀을 드나들고 전신주를 오르내리며 전화선을 잇거나 전화국에서 교환수 노릇을 하는 등 명색 최고 학부 출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을 했지만, 이들이 훗날 한국의 전자산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초석을 다졌다.
그러다 1958년 금성사(LG전자 전신)가 설립되면서 체신부나 KBS에서 기술직으로 일하던 통신공학과 출신들을 대거 스카우트했다. 본격적인 민간기업 진출의 효시였다. 비슷한 시기에 대한전선(대우전자 전신)도 설립됐다. 금성사는 1959년 국내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를 생산한 이래 전화기(1962년), 냉장고(1965년), 흑백TV(1966년) 등 국내 1호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초기 전자산업 발전을 주도했다. MBC에 이어 TBC(동양방송)가 창립되는 등 민간 방송국도 생겨나 스카우트 열풍이 불었는데, 후발주자인 TBC는 오너인 삼성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업계 최고 대우를 조건으로 내걸어 화제를 모았다. 금성사보다 11년이나 늦은 1969년에 설립된 삼성전자도 이처럼 파격적인 대우로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후 전자업계의 양대 산맥인 금성사(이하 LG전자)와 삼성전자는 급속한 사세(社勢) 확장을 위해 전자 분야의 최고 인재들인 서울대 전자공학과 졸업생들을 싹쓸이하다시피 하면서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았다.
LG전자의 1세대급 원로로는 통신공학과 10회 동기생인 이희종(李喜鍾·71·52학번) LG산전 고문과 김용선(金容善·71·52학번) 전 LG인화원장(사장)을 들 수 있다.
이희종 고문은 통신공학과 졸업후 국방부 과학연구소 등에서 근무하다 1962년 금성사에 입사, 설계 및 생산파트를 이끌며 전무까지 올랐다가 LG산전 부회장(그룹 기술자문위원장 겸직)으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김용선 전 사장은 체신부 설비담당관으로 있을 때 금성사에 스카우트되어 개발담당 상무, 부사장, 금성통신 사장을 지냈다.
LG전자의 현역 CEO 중 대표주자는 김종은(金鍾殷·55·67학번) 정보통신사업총괄 겸 이동단말사업본부장(사장), 박문화(朴文和·54·68학번) 정보통신사업본부장(사장), 이희국(李熙國·52·70학번) 전자기술원장(사장), 황운광(黃雲光·49·74학번) CDMA단말사업부장(부사장) 등이다.
김종은 사장은 그룹 회장실 소속 경영기술부문 이사와 기획팀장을 거쳐 LG전자 기술지원담당 상무, 멀티미디어사업본부장, 단말사업본부장 등을 지냈다. ‘제임스 김’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해외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나는 평생 1등을 놓쳐본 적이 없고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승부욕이 강하다고 한다.
이희국 사장은 스탠퍼드대 박사 출신으로 미국 휴렛팩커드 연구원으로 일하다 1983년 금성반도체 본부장으로 입사했다. 15년 동안 LG반도체에서 연구·개발을 담당하다 1999년 ‘빅딜’로 LG반도체가 현대전자에 합병된 후 LG전자 종합기술원 부사장으로 옮겨왔다.
청계천 부품 모아 방송국 개국
삼성은 후발업체로 전자업계에 뛰어들었지만 첨단 기술 개발을 선도하면서 국내 1위를 탈환한 것은 물론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다. 그 밑바탕은 강진구(姜晉求·77·48학번) 전 삼성전기 회장, 윤종용(尹鍾龍·60·62학번) 삼성전자 총괄 겸 생활가전총괄 부회장, 이윤우(李潤雨·58·65학번)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부회장,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현 정통부 장관), 임형규(林亨圭·51·72학번) 삼성전자 전사 CTO(사장) 등으로 이어지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인맥이 탄탄하게 받쳐 왔다.
강진구 전 회장은 졸업후 국내 최초의 TV방송국인 HLKZ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가 KBS를 거쳐 1963년 삼성 계열사인 동양방송 TV기술부장으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정부는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TV방송 허가를 내주면서 특정 시점까지 TV 전파를 쏘아올리지 못할 경우 허가를 취소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면서도 외화 환전과 해외 송금 편의를 봐주지 않아 필요한 방송 기자재를 수입할 수 없었다. 약속된 시한이 다가오자 강 전 회장은 하는 수 없이 청계천을 이 잡듯 뒤져가며 부품들을 구한 뒤 직접 기자재를 만들었다. 시한을 불과 몇 달 앞두고 마침내 전파를 쏘았는데, 시청자들로부터 “KBS보다 화질이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이병철 회장의 눈에 든 그는 1974년 삼성전자 사장으로 발탁됐다.
당시 삼성전자는 매출액이 60억원에 불과하고 해마다 적자가 쌓여가는 형편이었다. 이 회장은 “1년만 해보고 안 되거든 회사를 접어도 좋다”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콘세트 건물에서 모기떼에 뜯겨가며 먹고 자면서 제품 개발에 매달렸다. 외국 회사들이 기술이전을 거절하면 그 회사 제품을 사다놓고 해체와 조립을 거듭한 끝에 독학으로 제조기술을 익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삼성전자는 매출 43조6000억원, 순이익 6조원에 이르는 세계적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윤종용 부회장은 1966년 삼성그룹 공채로 입사한 뒤 주로 삼성전자 가전 분야에서 청춘을 보냈다. 국내 제조업체 사상 첫 200억달러 수출 돌파, 반도체·정보통신·디지털 가전의 황금분할체제 구축, 인텔 등 세계 유수 IT 기업들과의 전략적 제휴 등을 주도했다. 1990년대 초 김광호 부회장 등 반도체 전문가들에게 밀려 삼성전관 사장, 일본 본사 사장 등으로 떠돌았으나 1997년 삼성전자 사장으로 권토중래했다.
이윤우 부회장은 해외 유학파가 허다한 삼성전자 반도체 인맥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순수 토종파. 1968년 삼성전관에 입사했다가 1976년 삼성반도체 생산과장으로 반도체와 인연을 맺었다. 기흥공장 건립 초기부터 관여해 공장장을 지냈고 반도체총괄 대표이사까지 지냈으니 ‘삼성 반도체 신화’의 산 증인이나 진배없다. 1980년대 중반 반도체 경기가 침체해 투자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나왔음에도 과감하게 256KD램과 1메가D램 양산체제를 구축, 훗날 시장을 선점하는 호기를 맞았다.
지난 1월 전사 최고기술책임자(CTO)라는 보직을 받은 임형규 사장은 삼성반도체가 자체 양성한 해외 박사 1호(미국 플로리다대)다. 신기술 개발 의지가 강한 학구파로, 삼성전자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비(非)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상당한 연구 성과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자공학과 동문들 간에는 여느 동문들처럼 선후배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끈끈한 정이 약하다고 한다. 머리 좋고 재주 많은 이들이 대개 그렇듯 전자공학과 출신들도 ‘저 잘난 맛’에 사느라 남을 챙기는 데 별 관심이 없고, 남한테 아쉬운 소리도 잘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관계(官界)나 정계로 많이 진출했으면 학맥을 관리하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대부분 기업, 그것도 삼성과 LG에 집중적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삼성에선 학맥을 끼고 도는 행태가 철저히 금기시된다.
뿐만 아니라 두 회사가 막 용틀임을 시작하던 1960∼70년대에는 인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서울대 공대, 그 중에서도 전자공학과 출신들을 입도선매하다시피 대거 채용한 탓에 이들이 메인 스트림을 형성했다. 그러니 회사에 가면 ‘발에 채이는 게 동문’인지라 누구를 챙기고 말고 할 분위기가 못 됐다고 한다.
삼성과 LG 외에도 식품회사에서 휴대전화 단말기 회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에서 탄탄한 기업을 꾸려가는 동문이 많다.
김정식(金貞植·75·48학번) 대덕전자 회장은 1972년 회사 설립 이래 32년간 인쇄회로기판(PCB) 한 분야에 전념해 왔다. PCB는 PC, 휴대전화 등 각종 디지털 기기와 네트워크 장비에 반드시 들어가는 핵심 부품. 국내 최대의 PCB 메이커인 대덕전자는 지난 2000년에 2억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했고, 미국의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계 200대 우수 중소기업에 2년 연속 선정됐다.
노키아는 핀란드에 본사를 둔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메이커다. 그런데 노키아가 주 생산거점을 한국에 두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남 마산에 자리잡은 노키아티엠씨는 노키아 휴대전화의 40% 이상을 만들어내는 세계 최대의 휴대전화 제조플랜트다. 연 수출액이 25억달러로 마산 자유무역지역 총 수출액의 58%를 차지한다. 종업원 1인당 연 매출액이 42억원에 달해 생산비용이 중국보다도 훨씬 낮다. 이재욱(李梓旭·63·61학번)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은 1974년 대우전자 전신인 대한전선에 입사해 라디오, 흑백TV, 컬러TV 등을 개발하다 1986년 노키아티엠씨 사장으로 영입돼 적자투성이이던 기업을 반석 위에 올려놨다.
이용경(李容璟·61·60학번) KT 사장은 미국 오클라호마대에서 석사, 캘리포니아 버클리대에서 박사를 받고 일리노이주립대 교수, 엑슨 및 AT&T 벨 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 1991년 한국통신으로 옮겼다. 이후 연구개발원장, 연구개발본부장, KTF 사장을 거쳐 2002년, 유·무선통신망과 초고속 인터넷망을 아우르는 국내 최대 통신업체인 민영 KT의 초대 사장에 올랐다.
벤처창업 전진기지
정재은(鄭在恩·65·57학번) 조선호텔 명예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사위다. 이병철 회장의 5녀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부인. 미국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하던 1969년 삼성전자에 입사, 부회장까지 올랐다가 1992년부터 조선호텔과 신세계백화점 경영에 나섰다. 현재 장남 용진씨가 신세계 경영지원실 부사장으로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데, 지난해 탤런트 고현정씨와 전격 이혼해 화제를 낳았다.
박진선(朴進善·54·68학번) 샘표식품 사장은 부친(박승복 샘표식품 회장)의 가업을 물려받기 전까지는 미국 빌라노바대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해 석사를 딴 뒤 ‘사람 사는 길을 배우는 학문’인 철학에 매료돼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샘표식품은 2세를 일찌감치 회사에 들어앉혀 경영수업을 시키지 않고 외부에서 경력을 쌓은 후 능력을 검증받으면 경영을 맡기는 전통이 있는데, 박승복 회장도 국무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지내다 55세에 이르러서야 샘표식품 경영에 나선 바 있다.
스탠퍼드대 전자공학 박사 출신인 송문섭(宋文燮·52·70학번) 팬택&큐리텔 사장은 1989년부터 2000년까지 삼성그룹 회장 비서실과 삼성전자에서 삼성의 통신사업 전반을 조율했고, 2001년 말까지까지는 하이닉스전자의 휴대전화 사업을 총괄했다. 그러다 하이닉스반도체가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팬택으로 넘기자 사의를 표명했으나 팬택 박병엽 부회장이 “송 사장이 그만두면 큐리텔을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티자 결국 뜻을 꺾었다.
정일모(鄭一謨·72·57학번) 회장이 경영하는 유니모테크놀로지(구 국제전자)는 무전기, CCTV 카메라, 등 각종 유·무선 통신기기 전문회사. 국내 무전기 시장에서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코스닥 주가가 바닥을 기고 있어 요즘은 여건이 그리 좋지 못하지만, 서울대 전자공학과는 벤처창업 기지로도 성가를 높였다.
이범천(李凡千·54·69학번) 동문은 ‘원조 벤처’로 일컬어지는 큐닉스컴퓨터 창업자.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재직하다 1981년 후배, 제자들과 뜻을 모아 회사를 설립, 창업 1년 만에 흑자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다. PC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그 시절에 한글, 한자, 영어를 자유자재로 처리하는 워드프로세서 ‘글마당’을 개발해 수동식 타자기가 주종을 이루던 사무기기 업계에 충격을 던졌다. 이후 24핀 도트 프린터, 레이저빔 프린터 등을 잇따라 선보였으나 1997년 외환위기의 파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최초의 ‘벤처 대박’ 신화의 주인공은 메디슨을 창업한 이민화(李珉和·51·72학번)씨다.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MRI(자기공명영상) 촬영기를 연구하다 아날로그 MRI 촬영기를 개발한 그는 이 제품을 팔아 얻은 수익으로 디지털 MRI 촬영기 개발에 몰두했다. 아날로그 방식 제품으로는 도시바, GE 등과 도저히 경쟁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마침내 아날로그 제품보다 값은 훨씬 저렴하면서도 화질은 더 선명한 디지털 제품을 개발해 시장점유율을 90%까지 끌어올리는 개가를 올렸다. 하지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2002년 부도사태를 맞았다. 그는 “헬스케어산업의 전망, 노령화 사회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 유비쿼터스 시대를 맞기 위한준비 등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이밖에 리니지 게임을 만들어 국내외 게이머들을 열광시킨 김택진(金澤辰·37·85학번) 엔씨소프트 사장, 서울대 전자공학과 최초의 여학생으로 ‘게임업계 대모’로 불리는 장인경(張仁敬·52·74학번) 마리텔레콤 사장, 차량용 오디오 앰프와 위성방송 수신기 수출업체인 청람디지털 김만식(金萬植·50·73학번) 사장, 컴퓨터 보안업체 시큐어소프트의 김홍선(金弘善·44·79학번) 사장, 광(光) 인터넷 장비 연구·개발·제조업체인 네오웨이브 최두환(崔斗煥·50·72학번) 사장 등이 대표적인 벤처기업인으로 꼽힌다.
‘교수 양성소’
전국 대학의 전자·전기·전산·컴퓨터 관련학과 교수들은 태반이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특히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의 관련학과에 집중돼 있다.
서울대 전기공학부에는 민홍식(閔弘植·61·62학번/반도체 잡음), 김원찬(金元燦·60·65학번/집적시스템 설계), 성굉모(成宏模·57·65학번/음향공학), 하인중(河仁重·53·69학번/비선형 시스템), 이병기(李秉基·53·70학번/통신 및 광대역 통신망), 이재홍(李在弘·51·72학번/디지털 통신, CDMA), 김태정(金泰正·51·72학번/신호처리), 서광석(徐光錫·49·72학번/초고속 소자), 전국진(全國鎭·49·73학번/멤스), 김성준(金成俊·50·74학번/생체전자공학), 이범희(李範熙·49·74학번/지능로봇), 성원용(成元鎔·49·74학번/디지털 신호처리), 최기영(崔起榮·49·74학번/컴퓨터 이용 설계), 남상욱(南相郁·45·77학번/전자파 수치해석), 정덕균(鄭德均·46·77학번/집적시스템 설계) 교수 등이 재직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전기 및 전자공학과에는 변증남(卞增男·61·62학번/Fault-tolerant 제어이론), 권영세(權寧世·59·64학번/반도체), 박규호(朴圭皓·54·69학번/병렬처리 컴퓨터 구조 및 OS), 엄효준(嚴孝俊·54·69학번/전자파산란 및 회절), 김형명(金炯明·52·70학번/화상처리), 경종민(慶宗旻·51·71학번/CAD알고리즘), 김병국(金炳國·51·71학번/제어공학, 로봇공학), 나종범(羅鍾範·51·71학번/영상처리, 영상시스템), 성단근(成檀根·51·71학번/B-ISDN, 개인휴대 통신망), 이귀로(李貴魯·52·71학번/무선 멀티미디어를 위한 RF 및 Baseband기술), 이수영(李壽永·51·71학번/신경회로망 이론, 응용 및 VLSI 구현), 김성대(金聖大·51·73학번/영상통신), 이희철(李熙哲·50·74학번/초고속 전자소자), 조동호(趙東浩·48·75학번/통신, 프로토콜 공학), 김종환(金鍾煥·47·77학번), 송익호(宋翊鎬·44·78학번/신호검파이론, 대역확산 다중통신시스템), 홍성철(洪聖喆·46·78학번/MMIC 및 OEIC) 교수 등이 있다.
포항공대 전자전기공학과에는 김범만(金氾晩·54·65학번/반도체, 초고주파회로), 김영수(金榮洙·52·70학번/초고주파, 레이더 원격탐사), 오세영(吳世泳·52·70학번/신경망 컴퓨터, 로보틱스), 이필중(李弼中·53·70학번/통신시스템, 정보보안), 이진수(李振秀·51·71학번/자동제어, 로보틱스) 교수 등이 가르치고 있다.
전자공학과를 나와 경제학 교수로 변신한 이도 있다. 이승훈(李承勳·59·63학번)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와 윤창호(尹暢皓·55·67학번)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가 그들. 이승훈 교수는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경제학 석·박사학위(미시경제학)를 받았고, 1977년부터 서울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윤창호 교수는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1982년부터 고려대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인식(李仁植·59·64학번) 과학문화연구소장은 과학 저널리스트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금성반도체 개발부장, 대성산업 상무를 거쳐 50세에 퇴직한 뒤 동아일보에 ‘이인식의 과학생각’이라는 일간지 최초의 과학칼럼을 연재했고, 1991년부터 지금까지 17권의 과학 저서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