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학 강의 콘서트를 기획한 표창원 경찰대 교수.
끔찍하고 잔인하게 부녀자를 살해한 화성 사건의 진범은 누굴까, 그는 왜 아무런 원한관계나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죽였을까. 남자아이 5명을 한꺼번에 살해해 암매장한 범인은 한 명일까, 동네 지리를 잘 아는 아이들은 왜 위험한 순간에 도망치지 못했을까.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끝나버린 사건은 갖가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2000년대 들어서는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사건,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 사건, 서래마을 영아살해유기 사건 등 세상을 발칵 뒤집은 잔인한 사건이 많았다. 2004년 1월부터 2006년 4월까지 수도권에서 13명의 목숨을 앗아간 연쇄살인범 정남규는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부자를 더 해치지 못해 안타깝다” “살인에 대한 배고픔이 여전하다”고 말해 지켜보는 이들을 경악케 했다. 법정에서조차 태연히 살인 욕구를 내비친 그의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었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이처럼 범죄에 대해 갖가지 호기심을 품은 사람들이 매달 셋째 주 금요일 저녁 서울 서초동에서 열리는 ‘범죄학 강의 콘서트(이하 콘서트)’에 몰려들고 있다.
‘김길태’ 이름 바꾼 까닭
한국경찰과학연구소(KIPS·소장 조권탁 변호사)가 주최하는 콘서트는 지난해 9월 이창무 한남대 교수의 ‘패러독스 범죄학-상식 속에 가려진 범인의 진짜 얼굴’ 강의로 문을 열었다. 10월에 열린 2회 강의는 KIPS 부소장인 경찰대 범죄심리학 담당 표창원 교수가 맡았다. 자신의 저서 ‘한국의 연쇄살인-희대의 살인마에 대한 범죄수사와 심리분석’을 토대로 강의에 나선 그는 이날 연쇄살인범의 심리와 시대 변화에 따른 살인범죄의 경향, 영화 속 연쇄살인범과 현실의 연쇄살인범의 차이점, 국내 대표적 연쇄살인사건 사례에 대한 분석 등을 소개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화성경찰서에서 1년간 현직 경찰로 근무했던 그가 직접 겪은 사건 뒷이야기, 미궁에 빠질 뻔한 전북 고창 남매살인사건 수사에 대한 감춰진 얘기를 실제 현장기록 사진을 보여주며 풀어놓자 객석은 열띤 반응을 보였다.
실질적으로 콘서트를 이끄는 표 교수는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사건의 내막과 배경을 알고 싶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이나 ‘묻지마 살인’ 같은 흉악범죄는 시간이 지나도 사람들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법원에 따르면 부산 여중생 납치 성폭행 살해사건의 범인 김길태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 중 14명이 법원의 허가를 받아 이름을 바꿨다. 연쇄살인범 강호순과 동명이인 19명도 개명했다. 잔혹한 살인범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껴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만큼 살인사건의 여파가 사회에 남기는 후유증이 큰 셈이다.
KBS 드라마 ‘아이리스’를 쓴 드라마 작가 김재은씨는 지금껏 열린 네 번의 콘서트 중 표 교수 강의를 포함해 3번 참석했다. “김태희씨가 맡은 아이리스 주인공의 직업이 프로파일러였는데 드라마 속에서 그 부분을 충분히 다루지 못해 아쉬웠다. 앞으로 범죄 관련 드라마를 쓰기 위해 취재 중인데 이번에는 프로파일러를 좀 더 잘 다루고 싶어 강의를 들었다”고 했다.
주부부터 대학교수까지
‘거룩한 속물들’ 등 여러 권의 소설집을 낸 오현종 작가는 “전문가들이 사건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고 당시 상황과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까지 들려주기 때문에 나중에 범죄 관련 소설을 쓸 때 치밀한 묘사를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범죄 영화를 준비 중인 영화감독 겸 시나리오 작가 하준원씨도 “수사과정의 얘기를 전문가들로부터 듣다 보면 여러 가지 관련 지식이 쌓이고 그 안에서 자극을 받아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다양한 직업·연령대의 수강생으로 가득 찬 범죄학 강의 콘서트 강의실 모습.
서양은 “DNA 검사 결과를 분석한 자료들과 사건 포트폴리오, 현장 사진 등을 통해 DNA가 어떻게 증거로 활용되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동안 본 범죄학 관련 책은 너무 학술적이거나 과장된 내용이 많았는데, 오늘 강의는 흥미진진했다. 반드시 내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대학교 3학년생 민정원씨는 3회 강의 때 참석했다. 경찰대에서 강력범죄수사학과 과학수사학을 가르치는 유제설 교수가 강사로 나선 날이다. ‘한국의 CSI’라는 주제로 진행된 이날 강의는 1954년 미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정형외과 의사 샘 셰퍼드의 아내 살해사건과 현재 국내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노파 살해사건이 사례로 제시됐다. 민씨는 “혈흔과 시체에 남은 상처자국 등 증거를 놓고 법정에서 벌어진 실제 다툼을 중심으로 강의가 진행돼 인상적이었다”며 “원래 전공이 독문학인데 심리학 쪽으로 다시 공부해서 범죄심리 관련 직업을 갖고 싶다”고 했다.
한국의 CSI
표 교수는 “강의가 끝난 뒤 개인적으로 찾아와 범죄는 왜 일어나며, 범죄를 예방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사람도 많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모범적인 시민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며 뿌듯해했다.
첫 회에 수강생 40명으로 시작한 콘서트 참석자 수는 회를 거듭할수록 급증하고 있다. 협소한 공간 때문에 3회 때 ‘선착순 70명 접수’라는 제한이 생겼는데 1시간 만에 마감됐을 정도다. 이 때문에 KIPS 홈페이지 게시판은 항의성 글과 읍소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주최 측은 1월21일로 예정된 5회 콘서트를 100석 규모의 서울역 대회의실로 장소를 옮겨 열기로 했다. 물론 이미 접수는 마감된 상태다. 콘서트를 기획한 표 교수는 이처럼 단기간에 열띤 호응을 얻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며 “범죄학 관련 학술대회 참가자는 대부분 30명도 안 된다”고 했다.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범죄학’이라는 타이틀을 단 강의콘서트가 예상밖의 호응을 얻은 데는 국내에서 인기리에 방영된 ‘CSI’, ‘멘탈리스트’, ‘크리미널 마인드’같은 미국 범죄수사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연쇄살인과 ‘묻지마 살인’ 사건이 늘고,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가진 사이코패스에 대한 언론보도가 늘면서 일반인이 불안과 위험을 느끼는 사회 분위기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표 교수는 “우리 사회의 안전을 지키려면 경찰 발전과 과학화가 필요하다. 그걸 현실화하려면 예산 확보와 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공감대를 마련하기 위해 대중에게 경찰에 대한 이해를 확산시키고, 범죄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기 위해 콘서트를 연 것”이라고 소개했다.
콘서트 운영비용은 전액 한국경찰과학연구소가 낸다. 참가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연구소 홈페이지(www.kips.re.kr)를 통해 신청한 뒤 무료로 수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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