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철 기자
1995년 10월의 일이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 베이징특파원 부임을 앞두고 있었는데, 마침 동아일보 초청으로 중국 ‘인민일보’의 판징이(范敬宜) 총편집이 서울에 왔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중국 최고의 권위지이고, 신문 제작의 총책임자인 총편집은 경영을 맡은 사장과 동격으로 장관급이다.
판징이 총편집의 한국 체류 기간 그를 안내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서울에서의 일정이 끝난 후 판 총편집은 제주에 가보기를 원했다. 20년 전 일이라 당시 제주에서의 세세한 일정은 대부분 잊었지만 그를 분재예술원으로 안내한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정원에 전시된 분재 작품들을 감상하고, 원장과 대화를 나눴으며, 붓글씨로 방문 기념 휘호를 남겼다. 판 총편집은 유명한 서예가이기도 했다. 분재예술원을 방문한 그날 밤 숙소에서 내게도 붓글씨 작품을 써줬다.
그 후 20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분재예술원을 잊고 있었다. 성범영 원장이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다. 더욱이 분재예술원은 2007년 ‘생각하는 정원’으로 개명한 터라 관련 뉴스가 보도돼도 잘 모르고 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서두에 언급한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한번 방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중국 교과서에까지 소개됐을까. 성범영 원장은 어떤 사람일까.
盆栽와 자연의 조화
20년 만에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의 ‘생각하는 정원’을 찾았다. 마치 옛 성벽처럼 쌓아올린 멋진 돌담부터 인상적이었다. 20년 전의 분재예술원이 분재 작품 위주로 진열한 평면 정원이었다면 생각하는 정원은 입체 정원이었다. 높고 낮은 돌담과 돌탑, 제주 특유의 오름 이미지를 구현한 작은 언덕들, 인공폭포와 연못,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이어지는 관람로가 잘 조화된 풍경으로 다가왔다.
분재는 야트막한 능선을 따라 지그재그로 설치한 좌대 위에 놓여 있다. 살아 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함께 어울려 서로를 감고 있는 기묘한 형태의 주목, 돌과 한 몸이 돼 돌을 껴안은 형태로 자란 느릅나무, 뿌리 부분을 잘라 거꾸로 심고 접을 붙여 기른 모과나무 등 작품 하나하나 절묘한 자태를 보여준다.
땅에 뿌리를 박은 정원수도 분재와 잘 어우러지도록 배치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스듬히 선, 600년쯤 됐다는 향나무 등 정원수 역시 분재 기술로 가꿔 보는 이들의 시선을 머물게 한다. 이뿐이 아니다. 국내외에서 수집했다는 기묘한 모양의 돌이며 바위가 곳곳에 놓여 신비감을 더해준다. 생각하는 정원의 아름다움은 이 모든 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느낌이 든다.
생각하는 정원은 36000㎡(약 1만2000평) 규모로, 정문을 들어서면 관람로를 따라 환영의 정원, 영혼의 정원, 영감의 정원, 철학의 정원, 감귤의 정원, 비밀의 정원, 평화의 정원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소정원마다 자세한 해설을 해놓은 것은 물론, 각 분재 작품에 설명문이 함께 전시돼 관람객들이 ‘생각하며’ 정원을 감상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도 이채롭다.
생각하는 정원의 아름다운 자태 못지않게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곳을 방문한 저명인사들의 기념사진을 모아놓은 전시실이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 주룽지 전 총리, 리자오싱 외교부장, 츠하오텐 국방부장 등 중국의 전·현직 장관, 지방정부 지도자, 중국 유수의 박물관장, 미술관장, ‘붉은수수밭’의 작가 모옌(莫言)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망라돼 있었다. 시진핑 현 국가주석은 저장성 서기 시절 방문했고, 북한 김용순 서기의 모습도 보였다. 물론 중국인 이외에 세계 각국의 유명인사와 분재전문가들도 눈에 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곳에 중국 지도부 인사들이 앞다퉈 몰려온 것일까. 성범영 원장의 설명을 듣고 나니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20년 전 10월 판징이 인민일보 총편집이 이곳을 다녀간 뒤 신병매관기(新病梅館記)라는 글을 써서 인민일보에 게재한 것이 발단이 됐다.나무를 더 강인하게
그는 이 글에서 “…이처럼 천태만상의 많은 분재를 보고 나니 분재에 관한 종전의 내 관점이 크게 달라졌다. 분재에 관한 나의 보잘것없는 지식은 어릴 적 공즈전의 ‘병매관기’를 읽고 난 후 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었다”며 성 원장과의 대화를 통해 분재는 나무를 오히려 강인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예술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강조했다. “분재를 기르는 일이 나무를 괴롭히는 일이라면 그 나무는 일찍 죽었어야 한다. 하지만 나무들은 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제한된 공간에서 생존해내고 더 훌륭하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성 원장의 설명에 공감한 것이다.
판 총편집이 읽었다는 ‘병매관기’는 청나라 때의 유명한 작가 공자진(공自珍)이 쓴 글로, “곧은 것을 찍어내고 촘촘한 것을 쳐내고, 바로 선 것을 솎아내게 하여, 매화를 일찍 죽게 하고 병들게 하는 것”이라고 분재를 비난하는 내용이다. 이 글은 당시 청나라 권력층이 백성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해 입맛에 맞는 인물로 만들어가려는 의도를 비판한 것이기도 했다. 판징이 총편집의 ‘신병매관기’는 분재의 발상지 중국에서 분재 문화의 복권(復權) 신호탄이 됐다. 많은 중국인이 공자진의 ‘병매관기’ 이후 비딱하게만 보던 분재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됐다는 것이다.
‘신병매관기’는 1995년 11월 17일자 인민일보에 실렸고, 그날 장쩌민 국가주석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장 주석은 방한 기간 중 제주로 와 분재예술원을 찾았다. 장 주석은 전시된 분재를 일일이 살펴가며 수형(樹形)과 수세(樹勢)를 관찰했고 설명서도 꼼꼼히 읽는 등 관심을 보였다.
성범영 원장으로부터 분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정원을 감상한 장 주석은 귀국 후 간부들에게 “한국 제주도에 있는 분재예술원은 일개 농부가 정부의 지원 없이 혼자서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들어낸 곳이다. 그곳에 가서 개척정신을 배우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원장에 따르면 장 주석의 정원 방문은 판징이 총편집이 다녀간 뒤 주석에게 보고해 결정됐다고 한다.
“가서 개척정신을 배우라”
인민일보에 ‘신병매관기’가 실리고, 장쩌민 주석이 분재예술원을 방문하자 성범영 원장과 그의 분재정원은 순식간에 중국에서 유명세를 타게 됐다. 국가 지도급 인사들부터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각종 언론매체마다 탐방 기사를 싣기에 이르렀다. 인민일보에만 6차례나 보도된 것만 봐도 중국인의 관심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다녀간 중국의 정관계 고위직 인사만 6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성범영 원장은 중국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중국의 각 기관이나 대학 등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고, 이에 따라 성 원장은 바쁘게 중국을 드나들어야 했다. 지금까지 중국 방문횟수만 100차례가 넘고 많은 중국인, 특히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깊은 교분을 맺게 된다. 성 원장이 중국 지인들로부터 기념으로 받은 글과 그림만도 1000여 점에 달한다.
성 원장과 그의 생각하는 정원이 중국에 소개된 지 20년이 된 올해에는 마침내 교과서에 등재됐다. 중3 ‘역사와 사회’ 교과서 하권 제5단원에 한국의 발전상을 소개하면서 한국인 ‘민족정신의 전범’으로 성 원장을 거론했다.
“성범영은 예전에 서울의 한 셔츠 회사 사장이었다. 1963년 그는 처음으로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일본 식민통치의 약탈과 착취가 남긴 황량한 민둥산을 바라보며 그는 도시생활을 버리고 제주도를 개간하기로 결심했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돌이 많고 흙이 적다. 물도 전기도 없는 초라한 거주 여건 속에서 성범영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나무를 심었다. 20여 년 동안 그는 모두 15만t의 돌과 흙을 운반했다. 나날이 다달이,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1992년 마침내 전체 면적 3만여 ㎡의 정원을 열었다.
開拓進取 堅忍不拔 自强不息
성범영 원장의 사연이 실린 중국 교과서.
성 원장이 실린 교과서는 올해 2학기부터 일제히 중국 전역의 중학교에 배포됐고, 5000만 명이 넘는 학생이 배우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설가 이호철 씨는 잡지 ‘좋은 생각’에 기고한 글에서 중국 지도층이 인민에게 모범적인 사례를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성 원장을 주목한 것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과거 마오쩌둥 시대에는 이상적인 노동영웅으로 뇌봉이라는 근로자를 내세웠으나, 장쩌민 정부에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인물을 찾아내지 못하다가 제주도에 와서 성범영을 만나 ‘이 사람이다!’ 하고 낙점했다는 것이다.
성범영의 생각하는 정원이 이처럼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까닭은 단순히 분재 기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분재 자체만 놓고 보면 이곳이 아니어도 멋진 분재 작품은 흔하다고 할 수 있다. 성 원장 자신도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정원이라고 칭찬들을 하지만, 분재만 놓고 보면 사실 부끄러운 점도 많다. 향나무 분재만 하더라도 일본에는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작품도 많지만 우리 정원에는 그런 고가의 분재가 없다. 소나무 분재도 우리 정원에 수억 원짜리는 없다. 대신 모과 분재나 한국향나무는 우리 것이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다고 본다. 분재와 정원수와 돌과 오름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구도로 만들어진 분재정원은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라고 자평한다.
필자 역시 생각하는 정원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은 분재 작품의 뛰어난 미적 성취와 함께 정원을 이루는 각 요소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기에 더해 근 50년에 걸쳐 황무지를 낙토로 바꾼 성범영 원장의 불굴의 개척정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하는 정원이 주는 감동의 9할은 눈에 보이는 작품보다, 이를 만들어낸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쯤 해서 정원 개척의 스토리를 들어보자.제주에 매료되다
1998년 제주도에 와서 생각하는 정원을 둘러본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 사진제공·생각하는 정원
1962년, 군 제대 후 1년이 지난 어느 날 청년 성범영은 라디오 좌담 방송을 듣게 된다. 제주도를 방문하고 돌아온 대학교수들이 출연해 한라산의 수려한 경관과 천지연 폭포의 웅장함, 사철 푸른 상록수 등등 아름다운 제주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순간 문득 군대에서 만난 제주 출신 친구를 떠올렸다. 틈만 나면 고향 제주도 이야기를 해준 그 친구 덕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제주도가 친근하게 느껴졌는데, 그 방송을 들으니 친구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기차를 타고 목포로 내려가 하루를 묵고 제주도행 연락선을 탔다. 파도에 시달린 끝에 제주항에 내리자 초겨울인데도 푸른 잎이 울창한 상록수들이 보였고 올망졸망한 돌담을 끼고 파랗게 자라는 채소, 처음 보는 밀감나무에 노랗게 달린 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친구가 사는 저지리는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다. 친구와 함께 제주도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제주의 이국적인 환경에 매료된 그는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곳에서 농사짓고 나무도 가꾸면서 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쇠망치로 돌 깨며 개간
다시 서울로 올라온 성범영은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노점을 열어 몇 가지의 옷을 팔았다. 그렇게 1년 반쯤 지나 돈이 약간 모이자 이번에는 전문성을 갖춘 남성복을 취급해보기로 작정하고 와이셔츠에 매달렸다. 미제 와이셔츠를 구해다가 국산과 비교하는 등 품질 좋은 국산 와이셔츠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분주하게 와이셔츠에 매달리던 그에게 제주도 친구에게서 편지가 왔다. 1500평 정도의 밀감나무밭을 사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미래를 위해 저축한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다 털어 그 땅을 샀다. 그가 저지리에 산 최초의 땅이었다.
와이셔츠 사업은 번창일로를 걸었다. 단골이 된 주한 미8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소개로 주한 외국인은 물론, 국무위원들을 비롯해 청와대 직원들까지 단골이 됐다. 조선호텔 앞을 비롯해 몇 개의 점포와 대지를 마련할 수 있었고, 반월공단 부근에 공장 부지를 매입하기도 했다.
와이셔츠 공장을 운영하면서도 제주도를 왕래하던 그는 황무지였던 지금의 정원 땅을 전에 사놓은 밀감나무밭과 바꾸었다. 비록 황무지였지만 넓은 땅에 농장을 만들어 나무 농사를 짓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돈이 생길 때마다 부근의 땅을 조금씩 매입했다. 제주도 지도를 보면 서부지역 넓은 평야의 중심부가 바로 저지리다. 겨울에도 최저기온이 영하 2~3℃를 넘지 않을 뿐 아니라, 예고 없이 부는 몰풍(沒風)도 적었다. 대부분의 태풍이 대한해협이나 중국으로 빠져나가 피해가 적고 해수가 날아들지 않는 곳이기도 했다.
필자에게 생각하는 정원 곳곳을 안내하는 성범영 원장. 조영철 기자
분재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실제로 아는 것이 없던 그는 직접 몸으로 부딪쳐가며 배워나갔다. 밤을 새워가며 분재책을 읽고, 분재 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르는 것을 물었다.
몸으로 분재를 배우다
1974년 성범영은 주민등록을 아예 제주도로 옮겼다. 서울에서 벌인 와이셔츠 사업 성공에 그다지 미련을 두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나무와 손이 갈 때마다 푸르게 변해가는 황무지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농장에는 밀감이 열리기 시작했고, 분재로 기르기 시작한 나무를 돌보는 재미도 나날이 더해갔다. 좋은 분재 소재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서 구해다 밭에 심고 가지를 다듬어 분재목을 만들어갔다. 한여름 밤이면 마대를 깔고 앉아 가지를 다듬고 분재 형태를 만들기 위해 철사걸이를 했다. 옷 위로 모기떼가 물어대는 통에 온몸이 얼얼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1980년 초에는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그의 아내도 제주로 내려왔다. 이 무렵 그는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그동안 짓고 있던 4000~5000평 규모의 밀감 농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밀감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부르며 가장 유망한 농사로 여겼다. 그러나 성범영은 확장일로를 걷는 밀감 농사가 언젠가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밀감 파동’을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신 그가 좋아하는 나무만 기르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막상 밀감나무를 뽑아버릴 계획을 세웠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가 아버지가 서울에 잠시 올라가신 틈을 타서 밀감나무 전체를 뽑아버렸다. 제주도에서 밀감나무를 뽑은 최초의 ‘사건’이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정신 나간 놈’이라며 핀잔을 줬다.
1987년 정초에 한경면장이 찾아와 “우리 면내에는 이렇다 할 관광지가 없으니 그동안 키운 분재로 관광농원을 여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일단 거절했으나 행정기관의 권유는 계속됐다. 북제주군수가 찾아와 다시 권유한 데 이어 홍영기 제주도지사도 찾아왔다. 도지자가 돌아간 뒤에는 도청 직원이 찾아와 “제주시 가까운 쪽으로 2만~3만 평을 대체해줄 테니 옮겨서 관광지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오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성범영은 차츰 분재를 전시할 정원을 만드는 일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의 점포와 반월공단 옆에 와이셔츠 수출 공장을 짓기 위해 사둔 1만여 평의 부지를 정리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정원 만들기에 들어갔다. 전국을 돌며 분재용 나무를 구입하고, 분재가 발달한 일본으로 견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두루외’ ‘돌챙이’
분재정원을 만들 생각은 굳혔으나 전문지식도 부족했고 정원 설계도도 없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는 중에 가장 한국적이면서 제주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분재정원의 윤곽이 머릿속에 그림으로 잡히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특징인 오름을 살려서 정원을 꾸미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연못 공사는 땅을 파는 데만 40여 일이 걸렸다. 큰 굴착기를 동원했는데도 워낙 돌이 많고 단단해 시간이 지체됐다. 이어서 파낸 돌을 쌓은 다음 위에다 흙을 1~2m 덮어 야트막한 동산(오름)을 만드는 공사도 진행했다. 돌과 흙을 외부에서 끝도 없이 실어와 땅 위로 쏟아부었다. 오름 형태의 동산을 만들어놓고 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 동산의 위치를 옮기기 위해 다시 굴착기로 돌을 파냈다. 그러면 돌 위에 1~2m 덮은 흙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돌을 다시 파냈기 때문에 그 빈자리로 흙이 다 들어간 것이다. 다시 흙을 구해와 덮어야 했다.
돌담 공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원의 나무를 보호하려면 시도 때도 없이 부는 제주의 바람을 막아야 한다. 얕은 돌담은 틈새가 보이도록 쌓으면 되지만, 외벽이 될 높은 돌담은 시멘트로 돌을 접착하면서 높이 쌓아올려야 했다. 돌의 모양을 일일이 다듬고, 작업대 위에 올라가 아래서 올려주는 돌을 받아 쌓아나갔다.
나무 사랑과 신앙의 힘
초창기에 전기와 수도도 없이 공사한 기간만 8년. 달 밝은 날은 새벽 2, 3시에도 일어나 돌담을 쌓을 정도로 정원 조성에 몰두한 그에게 사람들은 ‘두루외’(미친 사람이라는 뜻의 제주 사투리) 혹은 ‘돌챙이’(石手의 제주 사투리)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을 수 없었고,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성 원장은 분재정원을 만들면서 12차례나 크게 다쳤는데, 그중 수술한 경우만도 7차례나 된다. 허리에만 3개의 핀이 꽂혀 있다. 양쪽 어깨와 무릎도 수술해야 했다.
드디어 1992년 7월 30일, 미완성 상태에서 서둘러 분재예술원으로 개원했다. 개원 후 국내외의 반응은 뜨거웠다.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의 방문 이후 해외의 방송과 신문에 ‘세계 유일의 분재정원’이라고 소개됐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반 정원이나 수목원은 많지만 야외에 조성된 분재정원은 없었기 때문에 분재예술원이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성범영 원장은 차츰 희망에 부풀기 시작했다.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해 확장공사를 하고, 돌담도 계속 쌓고, 돌문도 더 만들고, 전국에서 조경수를 구입해 심었다. 미비한 정원을 하루빨리 정비하고 싶어서 자금을 투자하기에 바빴다.
호사다마. 외환위기 한파가 온 나라를 뒤덮자 방문객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루에 10~20명이 채 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1998년 10월 주거래은행으로부터 경매처분 통고를 받았다. 투자액의 10%에도 못 미치는 부채 때문이었다. 이곳저곳 은행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건물이나 토지가 아닌 살아 있는 식물, 분재는 담보로 잡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은행으로부터 융자신청을 거절당했다. 감정평가원에서도 분재는 감정평가를 할 수 없다고 판정했다. 수년 동안 온갖 정성을 들여 가꾼 정원이 황무지 등급으로 평가되는 기막힌 현실 앞에 마주해야 했다.
정원은 결국 7년간 남의 손에 넘어갔다가 되찾게 된다. 체념에 빠져 있던 그에게 정원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본 한 은행 간부의 결단으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 기간 그는 어느 때보다 돌담 쌓는 일에 매달렸다. 경매가 있는 날에도 돌담을 쌓았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떠나게 되더라도 돌담을 쌓아두면 나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고는 하던 일을 계속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난관이 닥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나무에 대한 애정과 신앙의 힘이었다.
고정관념 가지치기
2007년 개원 15주년을 맞아 분재예술원을 생각하는 정원으로 개명한다. 성범영은 돌 하나 혹은 나무 한 그루를 정원에 놓을 때도 수십 번, 수백 번씩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 그 나무를 놓았을 때 혹여 바로 옆에 있는 나무의 빛이 퇴색하지는 않을지, 정원 전체의 구도를 해치지는 않을지, 혹은 분재 좌대의 높이는 어느 정도로 세워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고, 더 나아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되었을 때 그 나무가 변화하는 모습까지 일일이 그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생각과 집념 끝에 완성한 정원이며 동시에 많은 사람을 생각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생각하는 정원으로 정했다는 성 원장은 분재를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무거운 가지는 시기를 맞춰 적절히 가지치기를 해야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듯이 사람도 생각의 가지치기를 하지 않으면 케케묵은 구시대적 사고에 갇히고 만다”면서 고정관념이란 가지를 과감히 쳐내야 남과 소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생각하는 정원은 연간 30만~40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제주도 내 국빈 방문 1위의 관광명소다. 그중 약 30%가 외국인이다. 1500여 점의 분재와 1만여 그루의 정원수를 보유한 대한민국 ‘민간 정원 1호’인 생각하는 정원은 또 한 차례 비상을 꿈꾸고 있다. 주변 땅을 매입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신축, 세계 각국의 방문객이 남기고 간 선물 작품 등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여건이 허락하면 한중문화예술센터를 설립해 양국 간 문화교류의 촉매가 되게 할 복안도 갖고 있다.
중국 지도층 인사를 가장 많이 만난 한국인이자, 중국인에게 ‘현대판 우공(愚公)’으로 불리는 성범영 원장. 이 글에서는 지면 제한으로 인해 중국인에게 인정받아 성공한 것으로 그려졌지만, 그의 정원에는 지금도 세계 각국의 명사와 분재전문가가 끊임없이 찾아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