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호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복수는 나의 것, 야망은 너의 것

  • 글: 박동운 언론인

    입력2005-06-29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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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초(楚)나라가 오직 중원의 사태 진행에만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실을 홀시(忽視)하고, 후고(後顧·뒷날의 근심)를 생각하지 않는 동안 장강 하류 동남방에선 이변의 요인들이 자라고 있었다. 곧 신흥 강국인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급성장이다.

    본시 오나라의 지배계층은 주(周) 왕실의 분기(分岐)이고, 그 백성은 북방의 중원에서 이주해왔다고 한다. 문화적으로 개명된 편이고, 오늘의 장쑤성(江蘇省) 남부와 저장성(浙江省) 북부의 비옥한 평원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월나라는 저장성 중남부를 중심으로 발달한 나라인데, 지배계층은 역시 중원에서 이주해왔고, 신민은 한족과 원주민의 혼합체였다. 오와 월은 언어가 동일했으며 다 같이 개명한 편이었다.

    그러나 지배계층이 달랐고, 지리적으로도 양립하기 어려웠다. 월이 중원을 엿보려면 앞을 가로막는 오를 없애야 했고, 한편 오가 후고의 염려를 덜려면 월을 쳐 없앨 필요가 있었다. 파란과 곡절이 많은 오·월 간의 상극과 항쟁, 흥망과 성쇠는 ‘춘추(春秋)’와 ‘사기(史記)’에도 상세하게 기술되었지만 따로 ‘오월춘추(吳越春秋)’가 유명하다.

    오·월이 국제무대에 등장해 득세한 데에는 내부적 요인 외에 외국에서 망명해온 인재들의 작용이 자못 컸다고 한다. 우선 모순과 원한으로 가득 찬 초나라를 결사 탈출해 오나라로 빠져나온 오자서(伍子胥)와 오나라의 불우한 공자 합려(闔閭)의 만남에서 이야기 전개가 본격화한다. 난세엔 제도의 운영보다 인간의 만남이 더 크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하기야 낭만적이거나 계산적인 인간관계 설정이 전혀 불가능한 민족이라면 일찌감치 절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은 예부터 소심한 일면이 있는 반면에 때가 오면 인재들이 웅비할 줄도 알았다.

    楚 平王의 과오와 간신의 음모

    국가 쇠망의 원인은 ▲군주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왕실의 내분 ▲간신의 발호 ▲충신의 원죄(寃罪), 즉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라는 것이 춘추전국을 보는 중국 사가(史家)들의 통설이다. 춘추시대의 초(楚)나라 평왕(平王) 때도 그러한 모순이 심각했다.

    평왕은 교활한 성격을 지닌 이기주의자였으나 바보는 아니었다. 장남 건(建)을 태자로 세우자 그 가정교사 겸 고문 격으로 태부(太傅)에 오사(伍奢), 소부(少傅)에 비무기(費無忌)를 임명했다. 오사는 충신이지만, 비무기는 악독한 아부형 간신이다.

    건이 열다섯 살 때 좋은 혼처가 있어 진(秦)나라의 공녀(公女)를 맞아들이기로 했다. 공녀는 천하절색의 미인이었다. 공녀가 도착해 동서남북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이에 평왕은 재빨리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태자를 위해서는 따로 제나라 공녀를 영입했다. 이때 간신 비무기의 진언과 아부가 큰 구실을 했다.

    진나라에서 온 공녀가 아들을 낳았으니 곧 평왕의 차남인 진(珍)이다. 이들 새 모자에 대한 사랑이 깊어갈수록, 태자 건 모자에 대한 애착은 식어갔다. 그 기미를 알아차린 비무기는 흉계를 꾸몄다. 우선 태자 건과 그 태부인 오사를 수도에서 격리시켰다. 두 사람을 국경에 가까운 전략적 요충지 성부로 보내면서 안보를 굳건히 다질 필요가 있다는 구실을 내걸었다. 임지로 가면서 태자 건과 태부 오사는 비무기의 음흉한 모략을 간파했고, 혐오를 금치 못했다.

    한편 비무기는 태자 바꾸기와 오사를 제거하기 위해 새 모략을 꾸몄다. 이번에는 ‘반란 음모’ 의혹이었다. 표면상 다른 구실로 오사를 중앙으로 불러들였다가 아예 없애버린다는 흉계였다.

    비무기는 평왕에게 “건 태자님은 성부에서 강대한 병력을 장악하고 계신 데다 제후들과 자유롭게 교제하고 있는데, 최근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계략을 꾸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사님과 공모하여 제후의 병력을 빌려 우리 수도를 공략할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고 했다. 평왕은 이 말에 속아 넘어갔다.

    원래 인간은 자신을 기준으로 남의 의중을 추측하는 성향이 있다. 평왕도 협작·사기·음모를 즐겨온 사람이다. 평왕은 불안을 참지 못하자 오사를 소환하여 심문했다.

    오사 : “국왕께서는 어찌하여 또다시 뱃속 검은 소인의 참언에 넘어가 장남이신 태자마저 의심하는 과오를 거듭하시렵니까.”

    직설적 화법이었다. 평왕은 아픈 데를 찔린 데다 노망이 들었던지 즉각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수도에 용무 연락차 출장을 와 있던 성부의 사마(司馬) 분양(奮揚)을 불러들여 은밀히 명령을 내렸다.

    “태자가 불온하니 즉각 없애버려라.”

    분양 : “삼가 어명에 따라 처치하겠습니다.”

    그러나 분양은 양심상 태자 건을 죽일 순 없었다. 속히 도망가라고 건에게 알려줬다. 건은 황급히 송나라로 망명했다. 일을 그르치자 간신 비무기는 평왕에게 또 귀띔했다.

    “태자의 모략 참모이던 오사는 투옥했으나, 오사에겐 두 아들이 있습니다. 모두 현명하다는 평판이니, 그대로 두면 새 음모를 꾸밀 것이고 나라에 몹시 해롭겠습니다.”

    오사를 미끼로 두 아들을 불러 처치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평왕은 오사에게 사신을 보내 아들을 수도로 불러오면 살려주겠다고 유혹했다.

    오사 : “형인 자상(子尙)은 너무 착하여 부르기만 하면 즉시 상경, 속아 넘어갈 것입니다. 그는 부자가 모두 처단당한다 해도 반드시 올라올 것입니다. 그러나 아우인 자서(子胥)는 성격이 강인하고 앞일을 뚜렷이 내다보기 때문에 절대 상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소용없는 일이라 부르지 않겠다고 했다. 평왕은 더욱 불안해져서 왕명으로 그 형제를 불러보았다. 형제는 의논했다. 자서가 단언했다.

    “속아서 상경하면 아버지와 우리는 일망타진당할 것이 뻔하지요. 외국으로 탈출해 복수의 계략을 세웁시다.”

    자상 : “아들 된 도리상 같이 죽더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봐야 한다. 안 가면 효도에 어긋난다. 나는 간다. 그러나 너는 살아남아 아버님과 나의 원수를 갚아다오.”

    자상은 조용히 결박당해 상경했고, 부자는 참살됐다.

    구사일생의 탈출

    오자서는 피눈물로 복수를 맹세하며 도주했다. 우선 태자 건이 있는 송(宋)나라로 갔다. 대우는 좋았으나 송나라에 내란이 일어나 기댈 수 없게 됐다. 다음으로 정(鄭)나라를 찾았다. 호의를 보였으나 약소국이라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정나라는 원래 초나라와 가까워 난처한 처지였다. 그래서 이번엔 초나라와 대치 중인 강대국 진(晋)나라를 찾아갔다.

    진나라 군주는 경공(傾公)으로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태자 건 일행을 몹시 위험한 모험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즉 망명객들이 정나라로 다시 돌아가 조용히 내응(內應)을 준비하고 있다가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진격할 터이니 그때 부하들을 시켜 성내에 방화하고 성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면 현재 초나라의 속국처럼 되어 있는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고스란히 태자 건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그후 합세하여 초나라에 압력을 가해 건을 왕위에 오르게 할 수 있다고 유혹했다.

    오자서와 합려의 쿠데타 드라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은 매장된 히틀러(사진)의 시신을 훼손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에서 그와 같은 적에 대한 복수심은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모략에 가담하라는 위험천만한 제의였다. 그러나 당시 태자 건은 정처 없이 떠도는 부평초 신세였고, 망명과 유랑의 역경에 놓여 있었다. 정상적인 환경이 아니다. 가장 허약한 처지에서 가장 강력한 유혹에 직면한 셈이다. 게다가 그 제의를 거절하면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이었다.

    오자서도 처지가 마찬가지였으나 결국은 역경에 졌다. 태자 건과 오자서 일행은 적당한 구실을 마련해 정나라로 다시 돌아갔다. 정나라에서는 이들을 종전처럼 보호하고 믿어줬다.

    그러나 차질이 생겨 정나라 사직당국이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태자 건이 진나라 군주에게서 받은 비밀 서신이 발견됐다. 건은 체포되어 살해당했다.

    한편 오자서는 건의 어린 아들 승(勝)을 데리고 재빨리 탈출해 오나라로 향했다. 관헌의 추적은 집요했다.

    탈출하는 길은 멀고 험난했다. 고갯길 관문에서는 체포당할 뻔하다가 관리들의 욕심을 이용한 속임수를 써서 가까스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망망한 강을 앞에 두고 강기슭의 갈대밭에서 없는 배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던지 한 척의 쪽배가 나타났는데 늙은 어부가 노를 젓고 있었다. 사정하니 태워줘서 강을 건넜다. 내릴 때 오자서가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을 풀어 어부에게 주려 했으나 받지 않았다. 오자서는 감동하여 어부에게 머리를 숙여 절하고 헤어졌다.

    무릇 중국인은 다양하다. 개중에는 도둑과 협잡꾼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공자나 부처 같은 사람도 반드시 발견하게 된다. 역시 하늘이 낸 위대한 민족이다.

    오자서는 도중에 앓기도 하고 구걸도 하면서 가까스로 오나라 서울(오늘의 장쑤성 쑤저우(蘇州) 부근)에 도착했다. 매일매시 죽음과 순간순간 직면해야 하던 험난한 탈출 여정이 끝난 것이다. 오자서의 다음 과제는 처세술의 지혜를 최대한 발휘해 권력에 접근해 복수 준비에 활용하는 일이었다.

    붙어서 크는 지혜

    중국의 속담은 가르친다. “이름 없고 힘 없는 젊은이가 크려면 장래성 있는 유력자에게 의지하고 붙어야 한다”고. 이를 ‘고인발가(퇜人發家)’라고 한다.

    중국의 성어(成語)에 ‘세민오치(細民惡治)’란 말도 있다. 하층의 못사는 서민은 치세(治世)를 싫어한다는 뜻이다(韓非子). 잘 다스려지고 평화로우며 질서 있는 세상이라면, 좀처럼 신세를 고쳐 벼락부자가 되거나 감투를 쓰게 될 기회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결국 난세라야 위험하지만 기회도 있다는 발상이다. 실제로 고대 중국은 그러했다. 예컨대 주원장(朱元璋)은 거지 스님으로 난세를 헤엄치다 황제가 되어 명(明) 왕조를 창건했다.

    그것도 요령은 단 한 가지, 장래성 있는 유력자에게 붙어서 크는 데 있었다. 그러자면 큰 인물을 만날 운이 있거나 사람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도 정상급 인물이어서는 안 된다. 본시 기득권자는 무력자에 대해선 흥미도 없고 수요도 없다. ‘장래성’을 가려내는 안목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인 춘추시대로 회귀해본다.

    오자서는 천신만고 끝에 가까스로 오나라 수도에 당도했으나 망명객 떠돌이 신세에 불과했다. 가진 것이라곤 복수의 일념과 검증받지 않은 정치적 수완뿐이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데 왕족 가문도 아니고 더구나 이방인이란 불리한 조건을 어이할 수 없는 터였다. 결국 그는 오나라 왕족 중 ‘장래성 있는 유력자’를 찾고, 현재의 불우한 야심가를 도와주면서 자기의 유용성을 십분 증명해 ‘붙어서 크는 길’을 모색했다. 그 협력대상 인물이 바로 합려(闔閭·당시는 공자 광(公子 光))다.

    본디 오자서는 정치에 뜻을 둔 만큼 관상으로 사람의 앞을 내다보는 상술(相術)의 기본을 터득하고 있었다. 상술은 비록 운명의 세부는 알 수 없다 해도 성격의 대강과 운명의 흐름은 짐작케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합려를 보아하니 왕족답게 뜻이 클 뿐 아니라 마음속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야심을 간직하고 있었다. 게다가 폭발 직전의 불평불만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무럭무럭 키워온 야심

    공자 광(후일의 합려 왕)은 당시의 오왕 료(僚)와는 사촌 사이다. 그러나 내심 왕위 계승권의 정당성이 혈통으로나 능력으로 보아 자기에게 있는데도 유동적 조건이 불리해 지금 자기가 억울하게 신하노릇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때가 와서 자신이 쿠데타를 단행하거나 혹은 료왕이 중대한 실정을 저지르는 등 상황이 급변하면 주저할 것 없이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로선 료왕이 국정 전반을 다스리고, 공자 광은 군사 작전을 맡아 보고 있었다.

    한번은 오자서가 초나라 왕손을 모시는 망명 지식인의 신분으로 료왕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평범한 료왕은 오자서를 접견했을 뿐이지 등용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공자 광은 오자서를 친근하게 대하고 친분을 돈독히 하면서 그의 생활을 여러 모로 보살펴주었다.

    물론 오자서는 공자 광의 비상한 판단력을 높이 평가했다. 나아가 쿠데타를 통한 집권 가능성까지 예측했다. 오자서는 광과 친교와 신뢰관계를 돈독히 하면서도 자신은 일단 서울을 떠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양 은거생활을 하는 척했다. 그러면서도 독서와 사색으로 지략과 쓸모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루는 산책을 나갔다가 젊은이들의 싸움판에서 보기 드문 사나이를 발견했다. 용감하고도 침착하며, 슬기롭게 참을 줄 아는 의젓한 사나이였다. 한마디로 장사였다. 오자서가 뒤쫓아가 통성명을 하니 전제(專諸)라고 했다. 그도 소문을 통해 오자서를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예의를 지켜 깊이 교제했다. 그런 뒤 공자 광에게도 소개했는데 극진한 우대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史記, 剌客列傳). 대장부는 성심껏 후대하여 의리를 되씹게 하면, 일조유사시에 목숨을 내던지며 보답한다.

    오자서는 또 요리(要離)라는 인물을 발견하여 깊이 교제했다. 요리는 용감하고 침착했으며 슬기로웠다. 지혜가 뛰어난 반면 체격은 빈약했으나 그것은 용도에 따라 구애할 바 아니었다. 소문을 듣고 오자서 스스로 예물을 들고 요리를 찾아가 교제를 청했다(吳越春秋).

    겉으로는 난세에 보기 드문 용기와 의지를 겸비한 인재를 찾아 교제하는 것이 삶의 보람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공자 광의 쿠데타를 돕는 대행 준비였던 셈이다. 인간은 고독할 때 자기를 알아주고 성의껏 도와준 은의를 잊지 못하는 법이다. 우수한 인재일수록 그렇다. 지혜는 자본이지만 정서는 추진력이다. 이성과 감정을 아울러 갖춘 사람이 참 인재다.

    오왕 합려의 등장

    오자서가 망명한 지 5년 후 초나라에서는 원수인 평왕이 죽고 새로운 태자 진(珍)이 즉위하여 소왕(昭王)이라 칭했다.

    그러나 오자서의 복수엔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소왕을 없애고 평왕의 시체를 모독하면 그만이라는 식이었다. 더욱이 소왕은 태자 교체의 불미한 경위 때문에 국민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반면 오나라에서는 초나라의 그러한 내부 혼란을 틈타 진격을 개시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오자서에겐 공자 광을 오나라 왕으로 등극시키는 쿠데타가 급선무였다. 거사에 방해가 되는 인물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계찰(季札)인데, 료왕과 공자 광의 숙부인 데다 그에 대한 국민의 존경이 사실상 국왕을 능가했다. 또 한 사람은 료왕의 장남 경기(慶忌)인데 용감하고 현명했다. 오자서는 이들을 제거하는 대신 국외로 나가 있도록 계략을 꾸몄다.

    계찰을 문화사절로 내보내 제후국들을 자유롭게 친선 방문케 했다. 또 경기는 위(衛)나라에 특별 대사로 나가 있게 했다. 그리고 종묘에서 열린 어전회의에서는 중론에 따라 초나라를 침공하기로 의결했다. 다만 총사령관 격인 공자 광은 갑작스러운 신병을 이유로 본대의 출발을 늦췄다. 애당초 료왕이 군사(軍事)를 전적으로 광에게 위임하고, 친위대만 장악한 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선발대는 료왕의 친동생인 다른 두 공자가 인솔하고 출발했다. 그러나 선발대는 초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당해 돌아올 수 없고 연락이 두절된다. 료왕은 완전 고립됐다.

    다음으로 오자서는 극비리에 쿠데타 때에 자객으로 쓸 전제를 데리고 와서 공자 광에게 맡겼다. 광은 말했다.

    “정통성 있는 내가 오왕이 되어 조국을 부흥시킬 날이 도래하고 있다. 자네만 믿는다. 료왕을 제거해주게.”

    전제 : “그동안의 보살핌을 의리로 갚겠습니다. 다만 저에겐 노모와 어린 자식이 있습니다.”

    광 : “걱정 말게. 내가 전적으로 봉양과 양육을 책임지겠다. 며칠 후 료왕이 우리집에 올 텐데 그때 단행해주게.”

    그 직후 공자 광은 급성 병이 치유됐다고 널리 알렸으며, 료왕을 만나 속히 출정해 두 공자를 구원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어 료왕에게 완쾌와 출정을 자축하며 사기를 고무할 필요가 있으니, 자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고 싶은데, 그날 료왕이 잠깐 참석해주면 모두 감분(感奮)할 것이라고 간절한 희망을 밝혔다. 료왕은 출석에 동의했다.

    연회가 시작되어 술잔이 돌기 시작하자 광은 잠깐 자리를 떴고, 때마침 전제가 커다란 요리반(盤)을 두 손으로 받들고 공손히 료왕 앞에 놓았다. 전제는 먼저 방향을 가다듬는 솜씨를 보이다가 커다란 생선요리 뱃속으로 손이 가더니, 단도를 꺼내들고 순식간에 식탁을 넘어뛰어 료왕의 가슴 깊이 박았다. 깜짝 놀란 료왕은 도망가려 했으나 전제는 놓아주지 않았다. 일순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근위병들이 달려들어 칼을 들고 전제를 찌르고 치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한편 자리를 떴던 광의 신호에 따라 지하실에 숨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저항자들을 모조리 참살하거나 꿇어앉혔다.

    드디어 공자 광이 의장병을 갖추고 왕궁에 들어가서 즉위했는데, 이후 그를 오왕 합려(闔閭)라고 불렀다.

    반항은 극소수의 일시적 소동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이날의 소동을 왕위 계승권 문제를 에워싼 왕실의 내분이라고 체념했으며, 합려 왕의 권위와 지명도가 높아 묵인해줬다. 그 근본은 군사력 장악에 있었다.

    왕실의 큰어른 격인 계찰이 외유 중 쿠데타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했다. 합려가 자세를 낮추며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왕위를 삼가 계부 앞에 바치겠노라고 했다. 계찰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국가 유지를 위해 소란을 잠재우기로 결심했다. 합려의 왕위 계승권 주장에 일리가 있으며, 특히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한 점을 감안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올 것이 왔다’는 식의 정세 판단인데, 그러한 사후 추인은 앞으로도 유사한 모방 사례 출현에 길을 터놓는 꼴이 되게 마련이다.

    치밀한 뒤처리

    쿠데타의 사후 수습, 즉 거사 후의 국정 안정을 위해 또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떨떠름한 걱정거리는 죽인 료왕의 장남 경기(慶忌)가 위(衛)나라에 건재하다는 사실이었다. 용기와 지혜를 높이 평가받는 그가 복수와 탈권을 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런 염려를 그대로 두고는 합려 왕의 초나라 정벌은 불가능했다. 위나라에 경기의 신병 인도를 요구해봤자 거부당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해결의 길은 암살뿐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오자서는 미리 포섭해둔 요리(要離)를 데려왔다. 합려 왕이 대면해보니 작은 키에 풍채도 신통치 않았다. 그러나 오자서가 극구 찬양해 마지않는 장사란다.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갖 것을 희생할 대장부라고 했다.

    오자서와 요리가 공동으로 작성한 계략은 치밀하고도 잔인했다. “요리가 시해된 료왕을 위해 복수하고자 합려 왕 암살을 기도한다. 체포령이 내려지고 외국으로 망명하는데, 그의 처자가 체포되어 반역자의 가족이라 해서 공개 처형된다. 요리가 해외를 유랑하며 합려 왕의 죄악을 선전한다. 그런 다음 위나라로 경기를 방문한다. 경기는 요리를 동지로 믿고 등용한다. 복수를 위한 지원군이 조직되면 함께 조국 오나라로 향하는데, 행군 도중 요리가 경기를 암살한다”는 꾸밈새였다.

    그후의 사태는 계략대로 전개됐다. 경기는 목숨을 거두면서 부하들에게 포박된 요리를 가리키며, “나름대로 의리를 지킨 용사다. 죽이지 말고 오나라로 돌려보내 그의 오왕에 대한 충성을 천하에 알리도록 하라”고 했다.

    그의 지시는 이행됐다. 요리는 하늘을 우러러 자기의 인생을 정리하며 개탄했다.

    “나는 무고한 처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적 의리를 지킨다고 대의명분 없이 합려를 위해 일했다. 이는 윤리상 부당하다. 고작해야 새 임금을 위해 옛 임금의 태자를 죽였을 뿐이니 인의(仁義)가 아니다. 그러고도 부귀한 신분이 된다면 천하의 선비들 앞에 면목이 서지 않는다.”

    그러고는 자살의 길을 택했다. 요리는 용감하고 의리를 헤아릴 뿐만 아니라 착하고 슬기로운 대장부였다. 다만 그의 가치관은 시대적 제약성을 면치 못했다. 동시에 그의 심리적 갈등은 양심적인 인간이 고민할 수 있는 영원한 모순을 생각케 한다.

    한편 새로 즉위한 오왕 합려는 쿠데타의 최대 공로자인 오자서를 행인(行人)에 임명했다. 고대 관명으로, 고문 겸 특사 직함이다. 외국 출신에게 부여하는 최대의 신임이었다. 오자서는 후일 상국(相國)에 올랐는데, 최고 고문인 셈이다. 이제 오자서는 초나라에 대한 복수전 개시의 든든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복수 또는 보복의 윤리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전통적으로는 ‘정의의 실천’이고, ‘민족정기의 표현’이라 알려져 있다. 예컨대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하자 적국의 수령 히틀러의 매장된 시체를 다시 파내서는 군홧발로 짓밟고 거듭 불태워 그 재를 하수구에 던져버렸다.

    그러나 라틴(Latin)의 철인은 관조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복수는 최대의 쾌감이라고 말한다”고. 이 문제에 대해선 다시 언급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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