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호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 김세중 연세대 교수·정치학 ksjmoon@unitel.co.kr

    입력2007-03-09 17:3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972년 10월에 닻을 올린 유신체제는 박정희 절대권력체제의 절정이었다. 정치적 반대세력과 민주세력을 폭력으로 억압한 박정희는 강력한 권력의지와 더불어 국가발전과 안보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유신체제하 한국은 민주주의의 시곗바늘을 되돌린 극심한 인권탄압 속에서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국가의 야만적 폭력성 및 개발주의적, 안보지향적 특징이 극단으로 구현된 시기라는 점에서 유신체제에 대한 논란은 이후 세대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시위는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저항이었다.

    1972년 10월17일 오후 7시, 갑작스럽게 예고된 ‘중대뉴스’에 맞춰 박정희 대통령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국에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나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進運)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나의 중대한 결심을 국민 여러분 앞에 밝히는 바입니다’로 시작되는 대통령의 특별선언은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 금지 등 현행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현 국무회의가 비상국무회의로 전환돼 정지된 헌법조항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비상국무회의의 기본 임무가 현행 헌법을 대치하는 헌법개정안을 마련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와 함께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정치 활동의 정지, 언론 출판 방송의 사전검열제, 대학의 휴교, 포고를 위반한 자를 영장 없이 수색·구속할 수 있음을 알리는 계엄포고 1호가 발표됐다.

    계엄령에 따른 엄혹한 분위기에서 정부는 파죽지세로 새 헌법에 기반을 둔 새로운 체제 창출의 길로 치달았다. 비상국무회의는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 후 불과 10일 만인 10월27일, 이미 1972년 봄부터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팀이 극비리에 준비한 헌법초안을 전달받아 형식적 심의를 거친 후 통과시켰다.

    11월21일에는 유신헌법안(案)에 대한 찬반토론이 금지되고 정부의 일방적 홍보만 펼쳐진 가운데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유신헌법초안이 투표율 91.9%에 91.5%의 지지로 통과됐다. 12월23일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신설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실시돼 2359인의 대의원이 선출됐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12월23일 단독 출마한 박정희 후보를 99.6%의 지지로 제8대 대통령에 선출했고, 같은 달 27일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하며 유신 제4공화국 시대가 개막된다.

    국회 해산



    특별선언이 선포된 지 두 달 만에 비상계엄령이 담보하는 강압적 질서 아래 전광석화같이 수립된 유신체제의 특징은 전문 및 12장 126조, 부칙11조로 구성된 유신헌법 속에 대부분 드러난다.

    첫째, 새 헌법은 국가최고주권기관으로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제도를 창설했다. 유신통치집단은 2000~5000명으로 구성될 이 기관의 대의원 선출과정에 대한 완벽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이는 통치집단이 국민주권의 내용을 독자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됨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동 회의는 통일정책과 국회가 발의한 헌법개정안을 최종적으로 의결, 결정하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동시에 이 기관은 대통령과 대통령이 추천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권한도 거머쥐었다. 새 헌법은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추천하는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대의원의 정당가입이 금지됨으로써 유신치하에서 정당은 정권 창출기능이 박탈된 불임(不妊)정당이 됐다는 사실이다.

    둘째,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보장하고 동시에 대통령을 3권(權) 위에 군림하는 총통적 지위로 격상했다. 새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연장하고 임기제한규정을 철폐했으며 앞서 언급했듯이 간선제로 선출방법을 바꿨다. 동시에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대한 지명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입법부에 대한 우위를 제도적으로 보장받았다.

    또한 대통령은 사실상 대통령의 우위가 보장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을 지명하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동시에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긴급조치권을 갖게 돼 사법부에 대해서도 명실상부하게 우위를 보장받았다. 요약하면 유신체제는 총통적 독재권력을 보장받은 대통령의 종신집권을 보장하는 체제다. 동시에 이 체제는 대통령의 국가과제 추진능력을 제고한다는 명분도 지녔다.

    권력의지와 3선 개헌

    유신체제는 한국이 민주공화국임을 표방하며 출범한 이후 일찍이 경험하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던 이질적 체제였다. 선진국 표준에 맞춘 민주공화국헌법을 준거 틀로 출범한 한국은 건국 이후 역사적 경험 부재, 사회 경제적 여건 미비, 분단과 전쟁이 빚은 남북간 첨예한 긴장, 이에 따른 국가강제력 기구의 과도한 팽창과 시민사회의 위축 등에 따른 체제적 차원의 제약에, 지도자의 권위주의적 성격 등이 걸림돌이 돼 왜곡된 형태의 민주주의 정치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적어도 제도적 차원에서는 민주주의 기본원리가 5·16 이후의 군정기간을 제외하고는 부정된 적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주권재민(主權在民)과 3권 분리 등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사실상 정면에서 부정한 유신체제의 등장은 경천동지의 정치적 격변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정치적 격변의 배경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중 하나는 박정희의 권력의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이는 유신체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사실상 박정희 1인의 독재적 장기집권을 허용하는 것이라 볼 때 자명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의지 없이 권력을 연장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모순된 현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박정희가 어린 시절 인류역사상 몇 안 되는, 무한권력을 상징하는 인물인 나폴레옹이나 히틀러 같은 인물을 숭배했다는 사실, 그 후 김종필 등 그의 여러 측근의 증언에서 나타나듯이 그가 유난히 강한 권력의지를 지녔던 인물이라는 점에 비추어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이에 덧붙여 박정희의 권력유지와 관련된 당시의 정황도 이 설명에 신뢰성을 더해준다.

    유신체제가 도입된 1972년 10월은 박정희가 이미 1969년에 3선(選) 개헌을 강행해 임기를 한 차례 연장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지 1년여가 지난 시점이었다. 박정희가 3선 개헌 당시 기존 헌정질서의 틀 속에서 개헌이라는 적법절차를 통해 집권을 연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국회에서 여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1972년에는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국회에서 단순 과반 의석밖에 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 아래 박정희가 헌정질서의 틀 속에서 합법적 개헌절차를 통해 집권연장을 시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가 권력의지를 접지 않는 한 유신 쿠데타적 방법을 통한 집권연장시도는 불가피한 선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직도 임기가 2년여 남은 시기에 체제 대전환을 모색한 것은 임기 말 권력 누수(漏水) 가능성을 고려한 조치라고도 볼 수 있다.

    이상의 고찰은 강력한 권력욕에 의해 촉발된 박정희의 결단이 유신체제 도입의 일차적 또는 직접적 요인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통치자의 주관적 결단이 실천 가능한 것이 되려면 그것을 추진할 만한 상황 장악력, 그리고 정치적 기반의 확보가 전제돼야 한다. 따라서 유신체제 수립을 박정희의 권력의지의 표현으로 설명할 경우에도 그것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의 집권 이후 그를 둘러싼 권력구조의 변화과정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민정(民政) 이후 박정희는 집권당 내부에서 그의 후계를 노리던 두 세력의 시도를 무산시키며 독점적 위상을 구축한다.

    중앙정보부 장악과 권력집중화

    후계를 노리던 한 세력은 김종필계였다. 육사 8기생들은 박정희의 최측근에서 5·16을 기획하고 추동하는 주도적 구실을 하는데 김종필은 이 집단의 대표로서 5·16세력의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5·16 직후 그는 혁명정부의 가장 중요한 권력기반인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했고, 또한 초대 부장으로서 정보부의 조직과 정보망을 이용해 혁명주체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인 민주공화당 창당을 이끌었다.

    이에 따라 공화당에는 그와 정서적, 이념적으로 친근한 사람이 다수 영입돼 당의 주류를 형성했다. 집권당 내에 확보된 지지기반을 배경으로 젊은 정치인의 신선한 이미지와 독특한 언변으로 무시할 수 없는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보한 김종필은 나름대로 권력의 축을 형성하고 후계자로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1963년 총선 당시 영입한 김성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권 구(舊)정치인그룹과 5·16 주도세력 일부를 엮어 김종필에 대한 견제세력으로 당에 포진시킨다. 이들은 이후 김종필의 권력승계구상을 결정적으로 무산시킨 박정희의 3선 개헌작업에 앞장서게 된다. 애초 3선 개헌 시도에 저항하던 김종필계는 박정희의 집요한 설득으로 김종필마저 3선 개헌 지지로 돌아섬에 따라 와해되고 만다.

    3선 개헌 이후 당내 위상을 확고하게 굳힌 김성곤 등 신주류는 박정희의 세 번째 임기가 마무리되는 1975년 이후를 대비해 이른바 2원집정제를 대안으로 권력중추를 장악할 것을 구상한다. 이들 세력의 대표인 김성곤은 막강한 재력과 호방한 성격으로 여권은 물론 야권, 언론, 재계에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한 거물정치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 1971년 10월2일 국회표결에서 벌어진 이른바 ‘항명(抗命)사건’을 빌미로 당과 국회에서 추방됨에 따라 집권세력 내부에는 박정희의 권력의지에 제동을 걸 어떤 세력도 존재하지 않게 됐다.

    안보위기 극복과 방위산업 건설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1972년 11월21일 실시된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표를 던지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

    박정희가 집권세력 내부에 효율적인 견제와 균형구도를 관철하고 도전세력을 일시에 침몰시킬 수 있었던 힘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는 대통령에게 제도적으로 보장된 막강한 권력과 함께 구체적으로는 정보와 공작을 관장하는 핵심 국가기구인 중앙정보부와 군부에 대한 효율적 장악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이들 보위기구의 본래적 기능은 국가 차원의 안보를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조직은 국내 권력정치의 수단으로, 때로는 국가적 정책과제 수행을 위한 궁극적 도구로 사용되면서 박정희의 힘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국가안전보장과 관련해 군을 포함한 모든 국가기구의 정보수사 활동을 조정 감독하는 권한을 가진 중앙정보부는 예산과 조직운영에서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지도록 제도화돼 있었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정보부를 권력 유지와 정치적 목적을 관철하는 기제로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에게는 군의 효율적 장악이 사활이 걸린 과제였는데, 군 인사와 군 정보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통해 이를 확보했다.

    이 두 기구에 대한 효율적 장악을 기반으로 박정희는 후계를 노리는 세력을 손쉽게 침몰시킨다. 실제로 김종필계와 김성곤의 몰락을 초래한 1969년 3선 개헌과 1971년 10·2 항명사건 처리과정은 정보부가 주도했다. 또한 광복 후 최대의 인원이 동원돼 공방을 벌인 1965년 한일회담과 1971년 학생시위도 계엄령과 위수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군을 동원해 잠재울 수 있었다.

    요약하면, 박정희 집권 이후 전개된 중요한 권력 구조적 변화의 특징은 박정희 1인에의 권력집중이 심화돼 유신이 도입될 무렵 집권세력 내부에는 박정희에 대한 도전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시에 박정희가 이미 정보부와 군부를 효율적으로 장악해 새 체제 도입 과정에 있을 수 있는 야당 또는 시민사회의 반대도 효율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역량이 준비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은 단순히 박정희의 권력의지만으로 유신체제의 도입을 설명하는 것은 유신체제의 도입시기와 이후 유신국가의 전개과정에 나타나는 특징에 비추어 미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즉 이 점에 대한 고찰은 유신정변의 배후에 국가발전과 안보에 대한 박정희의 독선적이면서도 메시아적인 사명감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먼저 유신체제 도입 무렵 당사자인 박정희가 발표한 일련의 성명을 종합적으로 정리해본다.

    이들 성명에서 강조하는 것은 먼저 미국·중국의 급격한 접촉이 만든 안보환경의 악화 가능성과 여기에서 비롯된 안보위기 극복의 필요성이다. 그리고 안보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방위산업 건설과 국력배양에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박정희는 이를 위해 1973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본격적 중화학공업시대의 개막을 선언하고 이를 성공적으로 집행해 1980년대를 수출 100억달러 달성과 함께 열 것을 약속했다. 주목할 것은 이 기자회견에서 안보위기 극복과 국력배양을 위한 구체적 방도로 언급된 중화학공업화계획과 1980년대 수출 100억달러 달성이라는 목표는 유신 이전에 구상되고 논의된 기획물이었다는 사실이다.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급습을 비롯한 일련의 도발로 남북간 긴장이 빠른 속도로 고조됐다. 그럼에도 미국은 1969년 발표된 닉슨 독트린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한국의 완강한 반대에도 미국이 철군을 추진한 것은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따라 1971년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미·중의 급속한 접근으로 성립된 1972년 2월 닉슨의 중공 방문은 한국을 둘러싼 안보환경의 불확실성을 급속히 높이는 긴박한 사건으로 인식됐다. 10·17 유신특별선언에서 급속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그와 관련된 안보위기 극복의 필요성이 언급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다.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급습사건 이후 높아진 안보 긴장을 배경으로 박정희는 1969년부터 ‘싸우며 건설하자’를 국정지표로 내세우며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특히 한반도분쟁에 미국 지상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점진적으로 축소되는 현실에 직면해 그는 ‘자주국방’을 강조하고 방위산업 건설에 매진했다. 즉 1970년 8월에는 비밀리에 무기개발위원회를 가동하고 국방과학연구소를 창립했다.

    동시에 방위산업은 중화학공업과 중복된다는 이해를 전제로 1971년 11월 청와대에 그 두 가지 과제를 관장하는 경제 제2비서실을 신설하고 박정희가 직접 진척상황을 챙기기 시작한다. 공교롭게도 당시는 경제적 맥락에서도 값싼 노동력에 의존하는 보세가공 위주의 경공업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이 절박한 시점이었다. 1972년 5월에는 중화학공업 추진을 통해 수출 100억달러 시대를 열며 1980년대로 진입하겠다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파격적일 수밖에 없는 구상까지 논의되고 있었다.

    메시아적 사명감

    반면 박정희는 유신 이전에도 이미 당시 한국의 선거제도 등이 파쟁과 정쟁을 일상화해 비능률과 국력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국력을 집결하고 경제력 증강을 통해 안보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비상체제 도입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지니게 된다.

    예를 들어 박정희는 이미 1972년 1월1일 신년사에서 “나는(기존 선거와 정당정치하에서) 흩어진 저력을 한시 바삐 총집결해 국가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고 비상체제를 확립해 경제력을 더욱 증강하고 국방력을 더욱 강화하는 데 앞장서 나아갈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선언을 한다. 아마도 이 같은 정세판단의 배후에는 박정희의 유기체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세계관도 작용했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박정희는 1970년 초부터 안보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방위산업 발전, 그와 관련해 천문학적 자원이 소요되는 중화학공업화 추진, 그리고 1980년대에 100억달러 수출 달성을 위한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1971년 신년사에서 ‘중단 없는 전진’을 강조한 박정희는 지난 10년간 국정운영에서 쌓인 자신감을 배경으로 이 거대 기획물들을 자신만이 관장할 수 있다는 독선적, 메시아적 사명감을 갖게 됐을 것이고 이것도 유신장기독재체제 수립을 감행하도록 한 요인 중 하나가 됐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유신 이전 어느 때인가 박 대통령과 지방을 여행하면서 그의 국토와 민족에 대한 관심과 헌신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의 헌신이 너무나 깊어서 도중에 하차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박정희의 메시아적 사명감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관찰이라 하겠다.

    이미 언급했듯이 유신체제의 정치적 특징은 박정희 1인의 장기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정면에서 부인한 데서 발견된다. 유신체제는 초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자의적, 상시적으로 동원됐다는 점에서 폭력체제의 운명을 타고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유신이 엄혹한 정치적, 사회적 인권유린 상황이 일상화되는 체제임을 뜻한다.

    건국 이후 한국인이 경험한 정치체제와는 너무나 이질적인 유신체제는 출발부터 계엄령이라는 폭력을 수반했다. 1971년 대선에서 야당은 비록 패배했지만 서울을 비롯한 도시 지역에서 상당한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박정희의 상황인식과 유신체제 도입 명분의 타당성과는 별도로 1970년대 초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근본적으로 일탈적 성격을 지닌 유신체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설득력을 발휘하기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한다. 물론 5·16 이후 형성된 재야로 불리는, 박정희에 대한 근원적 반대세력과 민주주의의 수호세력임을 자부하는 학생세력에는 애초부터 저항과 타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날뛰는 정보폭력기구들

    유신체제는 도입 이후 1년가량 경과하기까지 가시적 반대에 직면하지 않고 작동했다. 제도권 야당인 신민당은 일단 유신헌법에 따라 실시된 총선에 참여해 유신체제의 틀 안에 안주했고, 파격적으로 진행된 유신체제의 제도화 과정에 구심점을 형성할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재야와 학생도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유신국가의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이 돼서야 밝혀진 사실이지만 유신선포와 함께 유신체제 이전에 박정희 정부에 매우 비판적이던 신민당 국회의원 13명이 아무런 적법 절차도 밟지 않고 계엄사 또는 보안사 등에 연행돼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더욱이 중진급 국회의원 13인을 무조건 체포 구금하고 혹독한 고문으로 다뤘다는 사실은 도전세력에 대한 유신국가의 대응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로 유신국가의 가혹한 폭력성이 노출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유신체제 성립 이후 1년가량 경과한 1973년 8월 유신 이후 해외에 머물며 반(反)유신운동을 전개하던 김대중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납치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했고, 이것에 자극돼 그해 10월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생데모가 발생했다. 서울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타 대학으로 확산됐고, 연말에는 재야인사들이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체제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한 것이다. 유신 정부는 이에 대해 가혹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타협이 불가능했던 대결구도와 유신국가에 내재된 폭력성에 비추어 이는 불가피한 경로였다.

    1974년 1월8일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개정 등을 요구하는 자를 영장 없이 체포해 신설된 비상군법회의에서 15년형까지 선고하도록 규정한 긴급조치1호를 선포했다. 이런 초강수에도 1974년 8월에 발생한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과 이듬해인 1975년 4월 베트남 공산화 통일로 극단적 안보위기가 조성된 기간을 제외하고 학생과 재야는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부단하게 감행했다.

    정상적 의사표출 통로가 배제된 상황에서 이들의 도전은 불법 시위 또는 불법단체 결성의 형식을 띠게 됐고 이에 대해 정부는 추가로 세 차례 더 엄혹한 내용의 긴급조치를 발동했다. 이에 따라 7년 유신기간 중 총 5년6개월간 긴급조치가 발동됐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3공을 거치며 증폭돼오던 국가의 폭력성은 극단화됐고, 경호실 정보부 보안사 등 정보폭력기구들이 그 장본인이 됐다. 그 결과 1973년부터 1979년 사이에 2600여 명에 달하는 정치범 또는 양심수가 생겼다. 또한 1975년 4월에는 인혁당 관련자 8인이 무고하게 처형되는 극한적 인권침해 사례가 발생한다.

    발전국가와 안보국가의 면모

    유신국가는 폭력국가의 특징과 함께 발전 안보국가의 특징도 지닌다. 이미 언급했듯이 유신선포의 배경에는 권력의지와 함께 국가발전과 안보에 대한 박정희의 독선적 또는 메시아적 사명감도 동시에 작용하고 있었고, 이는 구체적으로 유신국가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국력배양과 국방산업 건설에 매진하는 과정 속에 나타난다.

    이미 유신 이전에 구상되고 유신 직후인 1973년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식으로 추진이 선언된 중화학공업화계획은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총 투자액 96억달러가 소요되는 거대한 기획물이었다. 애초에 이 계획이 성안되는 과정에 재무장관이 재원 조달에 난색을 표했고 상위 경제부처인 경제기획원 관리들도 ‘현실을 도외시한 착상’ ‘국운을 담보로 한 일종의 도박’이라고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 아래 주로 상공부 인력에 의존해 이 계획을 실무적으로 책임지고 있던 오원철 경제 제2비서관도 ‘국내외 경제 여건, 즉 운이 따라주겠는가에 대한 공포심’을 느꼈다고 실토할 정도였다.

    유신국가는 이 거대 기획물을 추진하기 위해 국내 모든 가용자원을 동원할 목적으로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했고 이 과정에서 일반은행을 포함한 전 금융기관을 단일한 장기 산업자금체계의 틀 속에 배치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상한 정책이었고 개발주의 금융체제의 극한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수출입은행을 통한 연불 수출 금융지원,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및 기술인력 개발지원, 수입규제에 의한 산업보호, 조세 감면, 차관 우선 배분 등 중화학공업 추진을 위해 취해진 제반 조치는 유신국가가 발전국가의 개발주의체제를 극단으로 몰고 갔음을 보여준다. 또한 규모의 경제와 집적의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 창원 울산 온산 옥포 등지에 중점 산업별로 대규모 중화학기지를 건설하는데 이는 유신국가의 강력한 종용과 유도의 결과였다.

    강력한 정부 주도는 자원배분의 비효율을 동반하는 면도 있었으나 예상보다 3년 빠른 1977년에 100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그리고 공업구조 면에서 1971년에는 38.1%에 머물렀던 중화학공업 구성비가 1979년에는 52.1%에 달했으며 1981년에는 수출상품 중 중화학부문 비율이 47%를 기록하게 돼 한국은 명실상부한 산업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유신국가는 발전국가인 동시에 안보국가의 면모도 지닌다. 앞의 논의에서도 분명히 드러나듯이 국력 배양을 위한 중화학공업 추진 자체에 안보국가로서의 기능이 내재돼 있었다. 이에 덧붙여 유신 시기는 유신 이전부터 북한의 도발, 미군철수, 미·중의 급속한 접근이 야기한 안보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이미 구상된 방위산업의 지속적 추진과 함께, 유신 이후에 조성된 안보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도 다양한 안보관련 대응책이 뒤따르던 시기였다. 주목할 것은 안보에 있어서도 유신 시기는 6·25전쟁 이후 가장 극단적인 위기상황에 몇 차례 직면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75년 4월 베트남의 공산화통일은 전에 없던 안보 위기상황을 야기했다. 한 달 전에는 두 번째 땅굴이 발견됐고 베트남전 종전 무렵에는 북한이 병력을 남진 배치하는 징후까지 보였다. 박정희는 특히 김일성이 베트남 공산화에 고무돼 전선에 배치된 기계화 부대와 저공 후방침투가 가능한 10만 특수군단을 동원하고 지하갱도를 통한 침투 등의 방법으로 전격적 국지전을 벌여 서울을 점령하고 휴전으로 끌고 갈 가능성을 우려했다.

    또 다른 위기는 1976년 8월18일 휴전선 공동경비지역에서 북한군이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을 습격해 미군 장교 두 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으로 촉발됐다. 당시 한미 양국은 북한이 반격할 경우 개성을 탈환하고 연백평야까지 진출한다는 작전계획에 따라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나섰다. 6·25전쟁 이후 전쟁에 가장 근접했던 시점이었다.

    1977년 1월,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대통령에 취임한 카터는 그해 3월 1982년까지 완전철군을 목표로 4~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한국에서 미군을 철수한다는 계획을 일방적으로 한국에 통고했다. 당시 남북의 명백하고도 심각한 전력 불균형 상태에 비추어 이는 한국측에 극도의 안보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카터의 철군계획은 주한미군 고위당국자도 ‘곧 전쟁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무모한 것이었다.

    좌절된 핵무기 개발

    유신국가는 이러한 안보 위기상황을 겪으며 다양한 조치로 대응을 모색했다. 이미 1973년부터 핵무기 개발 노력을 본격화했고 1974년 3월에는 국군 현대화를 위한 장기계획인 율곡사업을 개시했다. 1975년 4월, 베트남전이 종결된 후에는 방위성금으로 시작한 율곡사업을 안정적이고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방위세법을 포함한 사회안전법 민방위법 학도호국단창설법 등 안보 관련법안 4개를 입법화했다.

    1976년 예산안에서 국방비는 배로 증액됐고, 1977년 카터의 철군계획이 발표된 후 1980년 말까지 전투기와 고도 전자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의 국산화를 결정하고 청와대에 ‘방위산업 진흥 확대회의’가 창설됐다. 1977년 상반기에는 155㎜포 이하 기본 병기, 1978년 4월에는 전차의 국산화, 9월에는 유도탄개발 발사에 성공한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계획은 미국의 집요한 압력으로 1976년 무렵부터 방기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카터는 1979년 7월 실무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철군계획을 사실상 취소한다. 카터의 1982년 완전철군계획은 유신국가가 중화학분야에 과잉투자를 초래하게 된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통치구도의 경직화와 10·26

    유신체제의 폭력국가적인 면모는 그 발전안보적 성격과는 별개로 당시 ‘세계시간’의 기준에 너무나 맞지 않는 것이었고, 한국 정치사적 맥락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부, 경호실, 보안사, 군 등 국가보위기구들이 정치과정의 사실상 주역으로 부상한다. 통치체제가 정상적 여론수렴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이런 구도에서 체제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은 이 기구들 사이에 견제와 균형을 유지해 나름대로 객관적 정보를 획득, 소화하는 통치력을 구사하는 것이다. 박정희는 이를 위해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러나 1974년 육영수 여사 암살사건 이후 차지철이 실장에 부임한 후 경호실은 타 권력기관을 무력화할 정도로 과잉 팽창했다. 새 권력자로 등장한 차지철은 시국대책과 관련해 시종일관 강경책을 주도했는데 이는 체제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선순환구도가 위협받게 됐음을 뜻한다.

    반면 1970년대 후반에 진입하며 노골적 폭력통치, 장기 고도성장과 중화학공업의 속도전식 추진이 빚은 높은 인플레, 불황, 부패의 만연 등으로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며 고도성장의 수혜자인 중산층조차 다수가 야당을 지지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또한 그 무렵 카터 미 대통령이 인권외교를 내세우며 반유신세력을 고무하고 체재 내에 안주하던 제도권 야당 신민당의 지도자로 김영삼이 선출된 후 신민당은 그동안 소원했던 재야단체와 연합해 체제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다.

    국가폭력과 개발주의의 극치, 유신체제의 비극적 종언
    김세중

    1946년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업, 일본 쓰쿠바대 석사(국제학), 캐나다 맥길대 박사(정치학)

    현대한국학연구소 부소장

    現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 : ‘1950년대의 한국사의 재조명’(공편) ‘박정희시대 연구의 쟁점과 과제’(공저) ‘10월 유신과 민주 회복 운동’


    이에 정부는 김영삼의 발언을 꼬투리삼아 야당당수인 그를 국회에서 제명하는 극단적 조치를 취한다. 이는 그해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반시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사태를 야기했고 정부는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해 이에 대처한다. 일련의 비상한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차지철은 박정희의 무분별한 신임을 등에 업고 시종 강경책을 주도했다. 차지철의 독주는 타 부처, 특히 정보부와 심각한 갈등을 자아냈고, 이는 1979년 10월26일 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차지철을 동시에 살해하는 사건으로 귀결된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언이었다.

    돌이켜보면 유신시대는 국가의 폭력성과 개발주의적, 그리고 안보지향적 특징이 모두 극단으로 구현된 때라는 점에서 현대사 최대의 질풍노도의 시기였다. 이는 이 시대에 대한 논란이 세대를 두고 지속될 것임을 예고한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