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호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입력2016-03-07 14: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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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종규·신범식·전두환 vs 이후락·윤필용·손영길
    •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워라”에 전두환 불끈
    • 誣告 보고하자 박 대통령 “내가 조사 지시했는데…”
    • 육사 11기 ‘와이프 內戰’…김옥숙 ‘하급자 대우’한 이순자
    42년 세월이 지난 오늘 이른바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진실을 밝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동안 전두환 장군 측근들이 집권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감추고 유리한 이야기는 미화했기 때문에 ‘코리아게이트’ ‘제5공화국’ 같은 드라마를 통해 국민에게 잘못 알려졌거나 감추어진 사실이 많다.
    또한 당시 사건으로 희생당한 수십 명의 현역 군인과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형을 받은 분들은 대부분 법정투쟁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보상도 받았으나, 강제 예편을 당한 분들은 40년 넘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군부 내 사조직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혹여 정치적 욕망으로 음모를 꾸미고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집권을 꿈꾸는 인물들이 아직도 있다면 이 사건이 그들에게 경종이 될 것이다.



    1. 10월 유신 후 권력이동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주변 권력자는 비서실장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방첩부대장 윤필용 등이었다. 1968년 1·21 사건(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의 청와대 기습 사건) 이후 정국은 비교적 안정됐지만, 박 대통령의 야망이 문제였다.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직 3선 연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대통령은 1971년 4월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따라서 3선 대통령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뜻대로 1969년 10월 3선 개헌안은 77.1% 투표율에 65.1% 지지를 받아 통과됐고, 그는 3선 개헌 헌법에 따라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 지속적인 국가 재건이 필요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제도’보다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대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72년 초 박 대통령은 ‘평화적 남북통일 과업과 국가 재건사업을 완수하는 시기까지 집권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마음먹고 ‘유신혁명’을 하기로 결단했다. 1972년 3월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한편, 1972년 7월 4일에는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남북 7·4공동성명’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하게 했다.
    1972년 10월 17일 계엄을 선포한 박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 국회의원을 연금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뽑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국회의원 임기는 6년과 3년 2가지로 했으며, 국회 개회일은 150일 이내로 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를 제약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는 이유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1968년 1·21 사건 이후 1972년까지 간첩 침투가 빈번해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따라서 국가경제 재건과 안보를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수정해 일정 부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도 없진 않았다.
    유신혁명이 마무리된 1972년 10월 박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는 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정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수경사령관 윤필용, 수경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등이었다. 이른바 10월 유신 공로자들이다.
    그런데 앞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이던 윤필용 대령이 1963년 군으로 복귀한 뒤 이후락 중정부장이 후임 비서실장으로 장기간 근무했다. 준장 진급 후 윤필용은 박 대통령에게 이후락의 비리를 보고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두 사람은 불편한 사이가 됐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주일대사로 좌천시켰다가 1970년 신직수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북한을 다녀온 후 1972년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던 이후락은 10월 유신 이후 서울지구계엄사령관이던 윤필용과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들을 화해시킨 인물은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인 손영길 대령으로 알려졌다. 이후락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종규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은 이 때문에 손영길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특히 박종규는 수경사령부가 경호실에 작전 배속돼 대통령을 경호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의 부하는 아니지만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중정부장과 밀착되는 것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고, 특히 박 대통령 전속부관 출신으로 자기 밑에서 4년간 30대대장을 한 손영길이 윤필용과 같이 이후락과 가까워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세력 균형은 깨지고

    그리고 박종규와 가깝지만 이후락과는 사이가 나쁜 신범식 사장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범식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홍보실장의 후임 홍보실장이었고, 이후 문화공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할 정도로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이후락, 윤필용과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한 언동을 경호실장과 대통령에게 보고해 윤필용·손영길이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게 했다.
    1971년 ‘수경사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5쪽 기사 참조)으로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좌천되고, 그 후임에 강창성이 부임한 후 10월 유신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그러나 유신 이후 안정돼 있던 세력 균형이 박 대통령 주변 권력자들의 이합집산으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신범식 사장, 전두환 장군, 노태우 대령 등이고, ‘피해자’는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 등이었다. 가해자 측은 박 대통령에게 쿠데타 음모를 알렸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히 조사해 엄벌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군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고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이던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73년 3월 8일 구속된다. 1961년 전속부관으로 박 대통령을 보필한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 전보됐다. 윤필용이 구속됐을 때만 해도 손영길은 이 사건에서 비껴나는 듯했지만 ‘통일정사 사건’(윤필용이 이후락이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청와대에 기도처를 지었다고 모함한 사건)으로 1주일 후인 3월 15일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윤필용이 누구던가. 그는 박 대통령이 1956년 7사단장 시절 이후 군수사령관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민정이양 이후에는 방첩부대장과 맹호부대장, 수경사령관을 맡으며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도운 심복이다. 대통령은 그런 그를 구속하고 제거한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전속부관 출신으로 가장 아끼던 손영길도 구속한 뒤 관계를 단절한다.  
    필자는 신동아 2월호에서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1979년 10·26 사건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1979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키는 원인(遠因)을 제공한 사건이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권모술수가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강창성의 직무유기






    이 사건에서 핵심은 윤필용·손영길이 과연 ‘역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강창성 사령관이 서빙고에서 조사한 결과 쿠데타를 모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역적이 아닌 것으로 일찌감치 판명됐다. 그렇다면 강창성은 누가 충신을 역적으로 모함했는지를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야 한다.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이 건재했다면 10·26, 5·18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창성은 ‘하나회’를 조사하다가 전두환이 회장인 걸 알고 쿠데타와 관련 없는 윤필용 측근 30여 명의 군복을 벗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단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해 누가, 왜, 어떻게 음모를 꾸몄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드문 데다, 있다 해도 관련자들의 힘이 무서워 공개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1970년 말부터 1973년까지 4년여 동안 수경사 보안반에 근무하면서 1972년 감청사건과 10월 유신, 그리고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사건 조사에 직접 참여한 만큼 그 내막을 비교적 자세하게 안다.
    당시 나는 윤필용·손영길 사건이 모함에 의한 것임을 윤 장군의 후임인 진종채 장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진 장군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수경사 요원을 서빙고로 연행해 조사해서는 안 된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그는 곧바로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전화해 “보안사의 ‘유류 부정사건’을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안사 유류 부정사건은 보안사 끗발로 배정받은 월 300여 드럼의 잉여 휘발유를 밖에 내다 팔다가 수경사 헌병에게 들킨 사건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격이었다. 진 장군은 이후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각하에게 보고드릴 사항이 있으니 시간을 잡아달라”며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 날 진 장군은 필자의 보고를 박 대통령에게 전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냈지만 ‘사실은 나도 그런 보고를 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조사를 지시해서 구속했는데 내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겠느냐”면서 후속 인사 조치를 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대전지역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키고, 2군단장이던 김종환 장군을 후임 보안사령관에 내정했다. 윤필용·손영길 장군 후속처리는 진종채 장군에게 일임하고, 출감 문제는 김 대위(필자)에게 시키라고 지시했다. 후속 조치는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종결됐다.
    한편 이후락 부장은 이 사건의 여파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대통령의 신임을 만회하고자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 1973년 12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후임 중정부장에는 검찰 출신 신직수 씨가 임명된다. 윤필용 사건을 주도한 박종규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됐다. 결과적으로 사건 발생 2년 만에 가해자 박종규, 피해자 윤필용·손영길·이후락 등 박 대통령 측근 모두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청와대 주변을 떠나 야인이 됐다. 한마디로 모두가 불행해진 모함 사건이었다.


    2. 질투의 화신들

    1972년 12월 말 손영길 대령이 1973년 1월 1일부로 준장 진급이 확실시되자 이후락 중정부장이 손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박 대통령의 허락을 받고 중앙정보부 2국장으로 오라고 요청했다. 손영길은 이를 윤필용 수경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윤필용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참모장을 중정에 보낼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 박 대통령에게 보고해 승락을 받기로 했다.
    윤필용이 박 대통령에게 의중을 타진하자 “장차 참모총장을 해야 할 인물이니 정도를 걸어가도록 윤 장군이 잘 지도하라. 정보기관에 가서는 안 되니 계속 데리고 있으면서 잘 키워주라”고 지시했다. 이에 손영길은 수경사에서 윤필용의 참모장으로 계속 근무하게 된다.
    손영길의 보직 문제가 박 대통령과 이후락, 그리고 윤필용 사이에서 논의되자 청와대 주변 권력자들 사이에 파장이 일었다. 손영길이 수경사 참모장에 보직된 후, 그전까지 사이가 나쁘던 이후락과 윤필용의 관계가 좋아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종규의 ‘파워’가 약해지고 이후락 쪽으로 힘이 쏠리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박종규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신범식이 윤필용 장군의 ‘불경한 언동’을 보고한 것을 덮어뒀는데, 손영길의 보직 문제로 박 대통령과 윤필용이 은밀히 대화를 나눈 것을 알고는 자신을 소외시켰다고 여긴 것이다. ‘2인자’를 자부하던 박종규는 윤필용·손영길이 이후락 쪽으로 기울면서 권력 중심이 이동한다는 말까지 나오자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필용과 전두환 간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만한 대화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어졌다. 윤필용이 사석에서 전두환에게 “전두환 장군, 앞으로 더 잘해야겠어!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우라는 당부가 있었으니 너는 더 분발해야겠어”라고 충고했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육사 11기 중에서 자신이 가장 먼저 참모총장이 되겠다는 포부와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윤필용이 전한 이야기는 청천벽력 같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손영길과 전두환은 ‘혈투’를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무렵 박종규는 윤필용·이후락·손영길이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다. 이후락의 승승장구에 불만을 품은 신범식, 손영길의 파워에 밀리는 공수1여단장 전두환 장군, 연대장을 마치고 서울에 와 대기 중이던 노태우 대령 등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권력의 이합집산을 예의주시했다.
    이들은 1972년 11월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박 대통령 후임 문제를 거론한 사건을 알고 있었다. 신범식은 차제에 이후락을 제거한 뒤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원하던 박종규가 중정부장으로 옮기면 자신이 중책을 맡을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전두환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윤필용과 손영길을 군에서 축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의문의 훈장 수여식
    그러던 1973년 1월 초, 손영길과 전두환의 경쟁심을 부추기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윤필용은 10월 유신 공로자 2명에게 훈장을 주겠으니 대상자를 추천하라는 정부의 연락을 받았다. 윤필용은 손영길과 전두환을 추천했고, 이들은 1973년 1월 민방위의 날에 중앙청에서 박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게 됐다. 그런데 총무처 장관이 “1명만 2등 훈장을 주고, 다른 1명은 3등 훈장을 주게 됐다. 누구에게 2등 훈장을 주겠냐”고 문의하자 윤필용은 “2등 훈장은 손영길에게 주라”고 했다. 전두환이 섭섭하게 여긴 것은 불문가지.
    하지만 손영길이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행사가 갑자기 취소됐고, 박종규가 수경사를 방문해 손영길에게 개인적으로 훈장을 전달했다. 어떤 연유 때문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장교들 사이에는 전두환이 시기·질투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전두환이 박종규에게 불평하자 박종규도 손영길이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는 것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손영길을 훈장 수여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게 조치하고, 훈장을 개인적으로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사건’이 3월 8일 일어난 윤필용·손영길 사건과 직접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아는 사람이 없고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3. 손영길 vs 전두환

    1972년 중순 육군본부에서는 장군 인사를 하면서 손영길·전두환 두 명의 대령을 장군 자리에 보직시키고, 1973년 1월 1일 장군 진급을 예고하는 인사를 했다. 즉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보필해 온 수경사 30대대장 출신 손영길 대령은 수경사령부 참모장에, 전두환은 김포 공수 제1 여단장에 보직시켰다.
    육군본부는 1972년 장군 진급 심사에서 처음에는 육사 11기 중 2명만 장군으로 진급시킬 예정이었으나, 손영길이 대령으로 진급할 때 4명이 함께 특진했으니 김복동, 최성택 대령도 장군으로 진급시켜 달라는 건의가 있었다. 그 결과 1973년 1월 1일, 육사 11기 선두주자 4명(손영길·전두환·김복동·최성택)이 모두 장군으로 진급한다.
    4명 중 막강한 파워를 가진 1인자는 박 대통령 전속부관 출신 손영길이었고, 2인자는 전두환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7사단장을 할 때 손영길 중위는 최우수 중대장으로 인정받았고, 1961년부터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소장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다가 소령으로 진급해 청와대 외곽 경계를 경호하는 30대대장을 4년이나 맡은 바 있다.
    전두환은 육사 시절엔 축구 잘하는 생도 정도로 여겨졌는데, 임관 후에는 동기들 중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신동아 2월호에도 밝혔지만, 전두환은 손영길 덕분에 최고회의 비서실 민정비서로 근무할 수 있었고, 1963년 쿠데타 음모 사건 때는 손영길 소령의 도움으로 훈방된 적도 있다. 1967년 손영길 중령이 육군대학에 입학하면서 전두환 중령을 30대대장 후임자로 추천하며 박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형제와 같은 우정으로 서로를 위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1973년 1월 1일 함께 준장으로 진급한 순간부터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다. 박 대통령이 1973년 1월 초 두 사람을 청와대로 초청해 진급 축하를 해줬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의 의리 있는 친구처럼 보였지만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전두환·노태우 심야 회동
    전두환은 2개월 전 신범식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불경(不敬) 사건’과 ‘통일정사 사건’이 곧 불거질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박 대통령이 손영길을 참모총장 감으로 키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욱 경쟁심을 갖게 됐다. 자신이 쿠데타 음모에 휘말릴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손 장군은 전 장군에게 “박 대통령을 잘 모시자. 형제같이 우정 변치 말고 힘을 합쳐 대한민국을 지키는 간성이 되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안 지나 윤필용이 구속된 3월 8일 손영길은 전두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된 건지 만나서 이야기나 해보자”고 했지만 전 장군은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고, 부대 일이 많아 만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그제야 손 장군은 전 장군이 이 사건에 깊이 관여했으며 자신을 의도적으로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그 날 밤 전두환은 노태우 대령 집에 갔다. 중정 감사실 수사과장이던 송석근 소령이 노태우의 집에 갔다가 거기서 전두환을 봤다고 손영길에게 알려줬다(248쪽 상자기사 참조).   
    윤필용 구속 다음 날 손영길은 최전방 15사단 부사단장에 보임돼 쿠데타 음모 사건에서 비켜서는 듯했으나 1주일 후 전격 해임되고 보안부대원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돼 서빙고에 구속된다. 서빙고에서 보안사 참모장 김귀수 장군이 “자진해서 전역지원서를 쓰면 모든 걸 용서할 테니 전역서를 쓰라”고 강요하자 손영길은 “내가 무슨 잘못이 있어 전역서를 쓰느냐. 절대 쓸 수 없다”고 맞섰다.
    윤필용의 경우는 대통령에 대한 불경(不敬)에 해당하는 말을 했다는 모함이라도 있었지만, 손영길은 조사를 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결국 몇몇 사람의 모함에 밀려 억울하게 전역을 당하고 말았다. 문제가 된 ‘통일정사 사건’은 다음 회에 거론하겠지만, 손영길은 40여 년이 흐른 2015년 7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을 받고 보상도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4. 육사 11기 파워게임

    육사 11기들 간의 파워게임은 가족들 간에 더 심했다. 군인 사회에선 동기생 간에도 군번이 빠른 군인이 상급자 대우를 받는데, 이는 군인 가족 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의 군번이나 계급, 파워에 따라 아내들 사이에 남자 세계보다 더 엄격하고 민감한 서열이 형성되고, 때로는 심한 시기와 질투가 불거지기도 했다.
    특히 전두환·노태우·김복동의 가족 간 경쟁이 심했다. 남편의 계급이 올라가면서 가족 간 경쟁이 더 치열해져 남편들 간에 불화를 유발하기도 했다. 어떤 가족은 자존심이 유별나게 강해 남편을 곤란하게 하는가 하면, 경쟁에 밀리는 남편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아내도 있었다. 보안사령부 존안실에는 이러한 기록이 지금도 남아 있을 것이다.
    육사 11기 동기생 가족들은 서울 한남동 손영길 대령 집(당시 최성택 대령 집과 붙어 있었다)에 모여 일본어 공부를 같이 하는 등 거의 매일 만났다. 당시 필자는 중위로 서울지구 506보안부대에 근무할 때였다. 필자가 대대장으로 모신 육사 13기 신재기 중령 부인의 소개로 손영길 대령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전두환, 김복동, 노태우, 최성택 대령 가족들과 알게 됐다. 특히 손영길, 최성택 대령 부인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손 대령 집에서 필자의 약혼녀를 인사시킨 일도 있고, 몇몇 부인은 1971년 말 종로예식장에서 치른 필자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부인들 사이에 불편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고,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다. 남편 간 서열이 바뀌면 군인 가족 서열도 뒤바뀌기 때문에 가족 간에 시기, 질투, 갈등이 생기기 쉽고 때로는 시비가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와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 사이가 그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보다 1963년 소령 진급 때부터 1988년 대통령이 될 때까지 늘 한 해씩 진급이 늦었고, 전 전 대통령의 후임 보직을 여러 번 이어받았기 때문에 이순자 여사는 김옥숙 여사를 ‘하급자 가족’처럼 대했고, 김옥숙 여사는 수십 년 동안 수모를 당하면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다 1988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상황은 바뀌어 김옥숙 여사가 그동안 당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순자 여사에게 “나는 당신과 다르다. 당신은 체육관 출신 대통령 부인이고 나는 전 국민이 뽑은 직선 대통령 부인이야! 옛날에는 많이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야!” 라고 쏘아붙인 이야기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수년 전 비자금 사건으로 두 전직 대통령의 거액 치부에 국민이 분노할 때, 필자는 당시 대통령의 부인들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남편에 대한 이들의 영향력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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