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윤필용·손영길 ‘쿠데타 음모’ 사건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1/2
  • ● 박종규·신범식·전두환 vs 이후락·윤필용·손영길
  • ● “손영길을 참모총장으로 키워라”에 전두환 불끈
  • ● 誣告 보고하자 박 대통령 “내가 조사 지시했는데…”
  • ● 육사 11기 ‘와이프 內戰’…김옥숙 ‘하급자 대우’한 이순자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1973년 4월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 등 ‘윤필용 사건’ 관련자들이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업무상 횡령 등 여러 혐의로 최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재심을 통해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

42년 세월이 지난 오늘 이른바 1973년 수도경비사령부 윤필용·손영길 장군 쿠데타 음모 사건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진실을 밝혀 역사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그동안 전두환 장군 측근들이 집권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감추고 유리한 이야기는 미화했기 때문에 ‘코리아게이트’ ‘제5공화국’ 같은 드라마를 통해 국민에게 잘못 알려졌거나 감추어진 사실이 많다.
또한 당시 사건으로 희생당한 수십 명의 현역 군인과 중앙정보부 직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당시 형을 받은 분들은 대부분 법정투쟁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고 보상도 받았으나, 강제 예편을 당한 분들은 40년 넘게 마음고생을 하며 살아왔다. 군부 내 사조직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혹여 정치적 욕망으로 음모를 꾸미고 권모술수를 부리면서 집권을 꿈꾸는 인물들이 아직도 있다면 이 사건이 그들에게 경종이 될 것이다.



1. 10월 유신 후 권력이동

1968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하는 청와대 주변 권력자는 비서실장 이후락,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방첩부대장 윤필용 등이었다. 1968년 1·21 사건(김신조 등 북한 특수부대 요원들의 청와대 기습 사건) 이후 정국은 비교적 안정됐지만, 박 대통령의 야망이 문제였다. 당시 헌법으로는 대통령직 3선 연임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대통령은 1971년 4월 실시되는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다. 따라서 3선 대통령을 허용하는 헌법 개정이 필요했다.
결국 박 대통령의 뜻대로 1969년 10월 3선 개헌안은 77.1% 투표율에 65.1% 지지를 받아 통과됐고, 그는 3선 개헌 헌법에 따라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 지속적인 국가 재건이 필요하고,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정치제도’보다는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 정치제도’가 필요하다며 새로운 대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72년 초 박 대통령은 ‘평화적 남북통일 과업과 국가 재건사업을 완수하는 시기까지 집권한 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마음먹고 ‘유신혁명’을 하기로 결단했다. 1972년 3월부터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한편, 1972년 7월 4일에는 북한을 다녀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남북 7·4공동성명’을 남북이 동시에 발표하게 했다.
1972년 10월 17일 계엄을 선포한 박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야당 국회의원을 연금했다. 그리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뽑되 임기는 6년으로 하고, 국회의원 임기는 6년과 3년 2가지로 했으며, 국회 개회일은 150일 이내로 하는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를 제약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는 이유로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1968년 1·21 사건 이후 1972년까지 간첩 침투가 빈번해 남북 간에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확산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따라서 국가경제 재건과 안보를 위해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도록 수정해 일정 부분 정치적 자유를 제약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도 없진 않았다.
유신혁명이 마무리된 1972년 10월 박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는 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정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수경사령관 윤필용, 수경사령부 참모장 손영길 등이었다. 이른바 10월 유신 공로자들이다.
그런데 앞서 국가재건최고회의 비서실장이던 윤필용 대령이 1963년 군으로 복귀한 뒤 이후락 중정부장이 후임 비서실장으로 장기간 근무했다. 준장 진급 후 윤필용은 박 대통령에게 이후락의 비리를 보고했는데, 이것이 알려져 두 사람은 불편한 사이가 됐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주일대사로 좌천시켰다가 1970년 신직수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한다.
그러나 북한을 다녀온 후 1972년 7·4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던 이후락은 10월 유신 이후 서울지구계엄사령관이던 윤필용과 자주 만나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절친한 사이가 됐다. 그런데 이들을 화해시킨 인물은 두 사람 모두와 가까운 사이인 손영길 대령으로 알려졌다. 이후락과 사이가 좋지 않던 박종규 경호실장과 신범식 서울신문 사장은 이 때문에 손영길에 대해 안 좋은 인상을 갖게 된다.
특히 박종규는 수경사령부가 경호실에 작전 배속돼 대통령을 경호하는 부대이기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의 부하는 아니지만 각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윤필용이 자신과 사이가 안 좋은 중정부장과 밀착되는 것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고, 특히 박 대통령 전속부관 출신으로 자기 밑에서 4년간 30대대장을 한 손영길이 윤필용과 같이 이후락과 가까워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1969년 9월 ‘윤필용 사건’ 발설자로 알려진 신범식 문공부 장관(후에 서울신문 사장, 왼쪽 두 번째)과 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왼쪽 세 번째)이 서울 태평로의 김유신 장군 동상제막식에 참석해 박정희 대통령(오른쪽 두 번째)과 함께 제막하고 있다. 박 대통령 왼쪽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오른쪽은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 동아일보


세력 균형은 깨지고

그리고 박종규와 가깝지만 이후락과는 사이가 나쁜 신범식 사장이 이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신범식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이후락 홍보실장의 후임 홍보실장이었고, 이후 문화공보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을 역임할 정도로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신범식은 가까운 친구들과 어울려 이후락, 윤필용과의 술자리를 마련했고, 이 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한 언동을 경호실장과 대통령에게 보고해 윤필용·손영길이 쿠데타 음모 사건으로 구속되게 했다.
1971년 ‘수경사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5쪽 기사 참조)으로 김재규 보안사령관이 좌천되고, 그 후임에 강창성이 부임한 후 10월 유신은 성공적으로 완료됐다. 그러나 유신 이후 안정돼 있던 세력 균형이 박 대통령 주변 권력자들의 이합집산으로 균열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가해자’는 박종규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신범식 사장, 전두환 장군, 노태우 대령 등이고, ‘피해자’는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 등이었다. 가해자 측은 박 대통령에게 쿠데타 음모를 알렸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에게 철저히 조사해 엄벌할 것을 명령한다.  
당시 군에서 가장 강력한 실력자이고 육사 8기생 중 선두주자이던 윤필용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73년 3월 8일 구속된다. 1961년 전속부관으로 박 대통령을 보필한 손영길은 제15사단 부사단장으로 전보됐다. 윤필용이 구속됐을 때만 해도 손영길은 이 사건에서 비껴나는 듯했지만 ‘통일정사 사건’(윤필용이 이후락이 대통령이 되기를 기원하기 위해 청와대에 기도처를 지었다고 모함한 사건)으로 1주일 후인 3월 15일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구속됐다.
윤필용이 누구던가. 그는 박 대통령이 1956년 7사단장 시절 이후 군수사령관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할 때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민정이양 이후에는 방첩부대장과 맹호부대장, 수경사령관을 맡으며 박 대통령을 최측근에서 도운 심복이다. 대통령은 그런 그를 구속하고 제거한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전속부관 출신으로 가장 아끼던 손영길도 구속한 뒤 관계를 단절한다.  
필자는 신동아 2월호에서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1979년 10·26 사건 다음으로 중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1979년 김재규가 10·26을 일으키는 원인(遠因)을 제공한 사건이고, 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권모술수가 우리나라 정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강창성의 직무유기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1972년 12월 27일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 동아일보

이 사건에서 핵심은 윤필용·손영길이 과연 ‘역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강창성 사령관이 서빙고에서 조사한 결과 쿠데타를 모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기 때문에 역적이 아닌 것으로 일찌감치 판명됐다. 그렇다면 강창성은 누가 충신을 역적으로 모함했는지를 조사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어야 한다. 윤필용, 손영길, 이후락이 건재했다면 10·26, 5·18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강창성은 ‘하나회’를 조사하다가 전두환이 회장인 걸 알고 쿠데타와 관련 없는 윤필용 측근 30여 명의 군복을 벗기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단 한 번도 이 사건과 관련해 누가, 왜, 어떻게 음모를 꾸몄는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이 드문 데다, 있다 해도 관련자들의 힘이 무서워 공개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1970년 말부터 1973년까지 4년여 동안 수경사 보안반에 근무하면서 1972년 감청사건과 10월 유신, 그리고 1973년 윤필용·손영길 장군 사건 조사에 직접 참여한 만큼 그 내막을 비교적 자세하게 안다.
당시 나는 윤필용·손영길 사건이 모함에 의한 것임을 윤 장군의 후임인 진종채 장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진 장군은 그 자리에서 강창성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 시간 이후, 수경사 요원을 서빙고로 연행해 조사해서는 안 된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또한 그는 곧바로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전화해 “보안사의 ‘유류 부정사건’을 철저히 조사해달라”고 요청했다.
보안사 유류 부정사건은 보안사 끗발로 배정받은 월 300여 드럼의 잉여 휘발유를 밖에 내다 팔다가 수경사 헌병에게 들킨 사건이다. 이것은 일종의 반격이었다. 진 장군은 이후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각하에게 보고드릴 사항이 있으니 시간을 잡아달라”며 면담을 요청했다.   
다음 날 진 장군은 필자의 보고를 박 대통령에게 전했다. 박 대통령은 처음에는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화를 냈지만 ‘사실은 나도 그런 보고를 받은 바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조사를 지시해서 구속했는데 내가 어떻게 풀어줄 수 있겠느냐”면서 후속 인사 조치를 하는 것으로 사건을 일단락시켰다.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1955년 10월 노태우(왼쪽 끝), 손영길 소위(왼쪽 세 번째)가 임관 직후 1관구사령부참모장 김재춘 대령(맨앞)과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박 대통령은 강창성 보안사령관을 대전지역 3관구사령관으로 좌천시키고, 2군단장이던 김종환 장군을 후임 보안사령관에 내정했다. 윤필용·손영길 장군 후속처리는 진종채 장군에게 일임하고, 출감 문제는 김 대위(필자)에게 시키라고 지시했다. 후속 조치는 박 대통령의 지시대로 종결됐다.
한편 이후락 부장은 이 사건의 여파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대통령의 신임을 만회하고자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역효과가 나 1973년 12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후임 중정부장에는 검찰 출신 신직수 씨가 임명된다. 윤필용 사건을 주도한 박종규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으로 물러나고, 차지철이 후임 경호실장이 됐다. 결과적으로 사건 발생 2년 만에 가해자 박종규, 피해자 윤필용·손영길·이후락 등 박 대통령 측근 모두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청와대 주변을 떠나 야인이 됐다. 한마디로 모두가 불행해진 모함 사건이었다.


1/2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10월 유신 후폭풍 권력암투가 낳은 자해극

댓글 창 닫기

2018/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