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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 김충립 | 前 수도경비사령부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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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5·17 계엄확대는 계획된 거사…전두환 政敵 제거
  • ● ‘부정축재자’에 박정희 끼워 넣은 사연
  • ● 정호용이 사양한 보안사령관 자리, 노태우에게
  • ● 사령관 축하연에서 盧에 상석 권한 정호용
  • ● 고건 靑 수석 “건설부 장관 하고 싶다”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1991년 6월 29일 방미 중인 노태우 대통령이 미국 스탠퍼드대 연설에 앞서 정호용 전 의원과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

최규하 국무총리는 1979년 10·26사건 40일 후인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셈이었다. 이틀 뒤 긴급조치 위반자 68명에 대한 형 집행을 면제하고 긴급조치 9호를 해제했다. 그리고 1980년 2월 29일 김대중(DJ) 등 시국사범 687명을 복권하고 학생 373명의 일괄 복학을 허가했다.

복권된 DJ가 주도하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하 국민연합)과 재야세력은 복학생들과 연계해 3개월간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1980년 4월 29일에는 민주화촉진운동 전개를 선포하고 장외투쟁을 본격화하는 등 최규하 정부와 정면 대결로 치달았다.

5월 1일 서울대 복학생대회를 시작으로 6일까지 대학생 수만 명이 모여 시위와 철야농성을 하며 계엄 해제를 요구했고, 7일에는 30여 명의 내외신 기자를 모아놓고 민주화촉진선언문을 발표했다. 이튿날 전국 총학생위원장단이 반정부 시위를 결정하자 전국 39개 대학에서 일제히 이를 결행했고, 정부와 군부는 긴급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5월 15일에는 전국 80개 대학에서 10만여 명이 시위에 가담했다. 서울시내는 치안 공백 상황에 이르렀다. DJ의 국민연합은 16일 제2차 민주화촉진국민선언문을 발표하고 19일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 22일 정오를 기해 대정부투쟁에 돌입할 것을 선언했다. 사실상 대정부 최후통첩이었고, 곧 새 정부가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



폭풍전야, 1980년 5월

‘노태우 의리 테스트’  술상 뒤엎은 김복동

1980년 5월 20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가 5·17조치를 격렬히 비난하자 신군부는 그를 가택 연금했다. [동아일보]

정부와 군부는 이 같은 상황을 방치할 경우 무법천지의 무정부 상태로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특단의 대책을 궁리했다. 정치권도 혼돈스러웠다. 여당인 공화당은 집권당이 아니라 야당이 됐고, 김종필(JP) 총재의 대망론도 수그러들었다.

이에 앞서 4월 14일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하면서 정치권은 전두환 사령관에게 장악돼갔고, 군 내부에선 DJ가 정권을 잡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확고해졌다.

시국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자 최 대통령은 4월 27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학원 소요사태에 강력 대응해 국가기강을 바로잡으라고 지시했다. 장외투쟁이 격화되자 군부대가 서울로 집결하기 시작했고, 이 계엄사령관은 인천 부평에 있던 특전사 9여단을 서울 지역 수도군단에 배속했다. 5월 7일에는 전방 특전사 13여단을 서울 거여동으로 이동시켜 대학가 소요 진압을 준비했다. 강원도에 있던 특전사 11여단은 경기 김포로 이동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5월 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은 경찰 능력으로는 학생시위에 대처할 수 없으니 군 병력을 투입해줄 것과 국가 주요시설 경계를 군부대가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학봉 수사국장에게 학원소요 근절 대책 수립을 지시했고, 권정달 정보처장에게는 시국 수습 방안을 수립해 보고하라고 했다. 4월 말에 특전사 예하 여단들이 폭동 진압을 위해 서울 근교로 출동한 것 말고도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전에 이미 준비됐음을 보여주는 단서들이 있다.



계획된 5·17 비상계엄확대

가령 이런 것이다. 특전사 소속의 한 중위가 DJ의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를 해 “특전사 군인들의 광주지역 출동이 임박했다. 군인들이 광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는 전화를 한 것이 보안사령부 감청에서 드러났다. 보안사는 필자에게 “동교동에 전화를 건 장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예하 여단의 광주 출신 장교가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특전사 부대 내에 설치된 공중전화를 모두 폐쇄했다.

필자는 1980년 5월 17일에 DJ를 검거한다는 사실도 미리 알았다. 5월 초 토요일 필자는 충남 홍성지원 박상선 판사의 초청으로 친구 8명과 부부 동반으로 1박 2일 충남 온양의 도고호텔로 여행을 갔다. 아내를 동반하지 않은 필자와 친구 P회장이 같은 방을 썼다.

그런데 1972년 대선 때 DJ의 홍보 비서를 맡은 바 있는 P회장이 “다음 대통령에 DJ가 당선될 것을 확신한다. 내일 찾아가 인사하고 500만 원을 드려야겠다”고 했다. 5월 17일 DJ가 구속될 것을 알고 있는 필자는 P회장을 말렸으나 그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우리가 다투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이 우리 방으로 몰려왔다. 필자는 “P회장이 500만 원을 들고 DJ를 찾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건 죽느냐, 사느냐 생사가 걸린 문제다. 너희들이 좀 설득해봐라”고 한 뒤 호텔 방을 나왔다. 친구들의 간곡한 설득에 P회장은 뜻을 접었다.

5·17 계엄확대조치 1주일 전 특전사 작전참모 장세동 대령과 박중환 작전과장, 병사 등 5명이 광주에 출동했다. 필자의 방에 들른 장 대령에게 지갑에 있던 용돈 5만 원과 보관 중이던 비상식량을 챙겨줬다. 군부 핵심 인사들이 5·17 계엄확대조치에 대비해 광주지역 폭동진압 작전계획을 세우기 위해 작전팀을 출동시킨 것이다. 이는 특전사령부 작전 실무팀들이 전투교육사령부 광주지역 계엄사령부로 작전 배속이 됐다는 의미이고, 특전사령관 정호용 장군은 광주 사건에 작전지휘권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이 3가지 사례는 5·17 계엄확대조치가 사태 수습을 위해 당일 군 지휘관회의 결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군부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조치가 100% 집권 욕망에 의한 ‘의도적 시나리오’라고 매도해선 안 된다. 국가 보위를 위해 언제쯤 어떤 사태가 일어날 것인지를 사전에 예상하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는 것은 정부와 군이 해야 할 당연한 임무다. 따라서 5·18에 대한 평가는 모두가 한발씩 양보하면서 총체적인 화해와 용서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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