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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에 길을 묻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사정(司正)의 칼잡이 ‘혹리(酷吏)’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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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법이 많으면 도둑도 많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한 무제는 독재통치 기반을 강화하려고 삐뚤어진 혹리들을 대거 기용해 사정 정국을 조성했다. 그러나 결과는 재정 파탄과 사회 기풍 혼란이었다.

공자(孔子)는 무슨 일이든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만 다스리려 하면 백성들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며 “덕(德)과 예(禮)로 이끌어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범법이 줄어든다”고 했다. 노자(老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법령이 많아질수록 도둑도 많아진다”고 꼬집었다. 물 한 방울 샐 틈 없는 촘촘한 법 조항과 가혹한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사마천도 “법이 통치의 도구이긴 하지만 백성들의 선악, 청탁까지 다스릴 수 있는 근본적인 장치는 아니다. 법망이 가장 치밀했던 때 간교함과 속임수가 가장 많았다”고 지적했다.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과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백성들 사이의 혼란이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하자 결국 관리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백성들은 법망을 뚫어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관리들은 타오르는 불은 그대로 둔 채 끓는 물만 식히려는 방식으로 대처했으니, 가혹한 수단이 아니면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법이 갖춰지지 않아서 범법자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는 한결같은 지적들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회적 기풍이다. 공자의 말대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적 기풍이 우세하다면 굳이 요란을 떨며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을 외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나라 초기의 법은 배를 삼킬 만한 고기도 빠져나갈 정도로 느슨했지만 통치는 순조롭고 백성들은 편안했다는 사마천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나라의 안정은 도덕의 힘에 있지 가혹한 법령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이다.



디케는 최고의 혹리?

지금 우리 현실은 도덕 운운할 상황이 못 된다. 법치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좋은 법을 만들어 그 법을 제대로만 적용한다면 백성들이 억울할 일이 없을 것이다. 고관대작이라도 나쁜 짓을 하면 법에 따라서 처벌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일반 백성에게만 법을 과도하게 적용해왔다. 형평성에 어긋났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결국 법관들을 비롯한 공직자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고, 지도층은 끼리끼리 봐주는 인치에 사로잡혀 있다보니 나라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혹리 장탕은 법관으로서의 문제점을 모두 안고 있다. 오늘날에도 장탕과 같은 공직자가 판을 친다. 그래서 사마천은 ‘이상적인 관료’의 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순리열전’과 ‘혹리열전’을 썼다. 읽을 때마다 급암과 정당시, 아니 100보 양보해서 질도 정도의 공직자가 과연 우리에게도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권세가나 토호들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그들을 아주 엄격하게 처벌한 초창기 혹리 같은 이들이라도 있다면 적어도 국민을 절망에 빠지게 하진 않을 것이다.

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있다. 한쪽에는 칼, 한쪽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저울은 만민에게 법을 평등하게 적용하겠다는 의미다. 칼은 그 법에 따라 한 치의 사심 없이 정확하게, 그리고 엄격하게 처벌하겠다는 의지의 형상이다. 그런데 여신상은 왜 눈을 감고 있는 것일까. 흔들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법을 적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여신의 이름은 디케다. 사마천도 디케처럼 법 집행을 공정하게 하는 관리를 이상적인 모델로 봤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상황에서 제대로 된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에 적합한 혹리는 과연 누구일까. 노자, 공자, 사마천이 언급한 법의 본질과 한계를 다시 한 번 떠올리면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신동아 2015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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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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