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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흥망성쇠를 비추는 거울 ‘사감(史鑒)’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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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때아닌 역사 전쟁이 한창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발단이 됐다. 정부가 “역사교과서가 편행됐다”며 다시 쓰겠다고 나선 것이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에 등장한 최고권력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이 바로 역사 평가다. 먼 훗날의 역사는 현 정부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평가받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누구보다 역사를 중시한 군주다. 특히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늘 옛 역사를 공부하며 자신의 통치행위를 반성했고,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였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나라 다스리는 일을 신하들과 격의 없이 상의했다. 그런 덕분에 조정에서는 누구든 과감하게 직언하는 풍조가 마치 바람처럼 일어났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봉건적 전제정치 역사에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이세민은 대신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자기 모습을 보려면 반드시 맑은 거울이 있어야 하고, 군주가 자기 잘못을 알려면 반드시 충직한 신하에 의지해야 한다(人欲自明, 必須明鏡. 主欲知過, 必藉忠臣).

이 말은 이세민이 적극적으로 간언을 구하고 받아들일 자세가 돼 있음을 잘 보여준다. 그는 신하들에게 할 말이 있으면 역린(逆鱗) 건드리기를 두려워 말고 용감하게 발언할 것을 독려했다. 또한 제왕과 신하를 물과 물고기의 관계로 보고, 덕행을 함께하고 더불어 천하를 다스리고자 했다.

제도적으로도 언로(言路)를 보장했다. 대소관원들의 직간 중에 취할 것은 취하고, 서로 연구하고 토론하며, 전횡과 폐정을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주요한 조치를 취했다. 건전한 논쟁과 반박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맹목적으로 황제의 뜻에 따라 시행하는 데 반대했다. 여론을 수렴하고 이를 솔직하게 전달하는 간관(諫官)을 중시했으며, 직간과 비방을 냉철하게 구별했다. 그래서 그가 통치하던 시기인 정관(貞觀) 연간에는 여론을 전달하고 직언하는 임무를 맡은 간관의 수가 대단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걸출한 사람이 위징(魏徵)이다.

당 태종은 즉위 초에 수시로 위징을 침실까지 불러 치국의 득실에 대해 물었다. 몇 년 안 되는 짧은 기간 위징은 200여 건에 달하는 사안을 간언해 태종으로부터 큰 칭찬과 상을 받았다. 위징은 거리낌 없이 직간하고 이치에 따라 쟁론했으며, 때로는 황제의 체면도 살피지 않아 당 태종을 몹시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역사의 평가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중국 시안시 당나라 거리의 조형물.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칭송받는다. 당 태종이 ‘인감(人鑒)’이라 부르며 자신의 언행을 바로잡는 거울로 삼은 위징.

銅鑒 史鑒 人鑒

어느 날 당 태종이 아름다운 새매 한 마리를 가지고 놀다가 멀리서 위징이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품속에 숨겼다. 위징이 알면 한소리 할까 겁이 났기 때문이다. 위징은 이를 알고 일부러 시간을 끌면서 오랫동안 보고를 올렸다. 당 태종은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바람에 품 안에 있던 새매가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그런데도 위징은 간언을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당 태종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번은 조회를 마친 당 태종이 씩씩거리며 후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이 늙은이를 죽이고 말겠다”며 화를 냈다. 장순황후가 물었다. “누구 말입니까?” 태종은 “위징이 매번 조정에서 나를 욕보이지 뭡니까”라고 했다. 황후가 물러나 큰 행사 때나 입는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뜰에 나와 서 있었다. 태종이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황후는 “신첩은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들었습니다. 위징이 그렇게 곧은 것은 폐하께서 밝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첩이 폐하께 어찌 감축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위징의 강직함을 긍정하는 동시에 태종의 영명함을 칭송하는 이 말에 그는 노여움을 풀고 오히려 기뻐했다.

당 태종은 자신도 잘못할 수 있다는 인식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에게 3개의 거울이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즉, 의관을 바르게 할 수 있는 동거울 동감(銅鑒), 흥망성쇠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역사의 거울 사감(史鑒), 직언으로 자신의 언행과 그 득실을 밝혀주는 ‘사람 거울’인 인감(人鑒)이 그것이었다. 이를 당 태종의 삼감(三鑒)이라 한다.

훗날 위징이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동감은 모습을 비춰주고, 인감은 득실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위징이 세상을 떴으니 짐은 거울 하나를 잃었도다”라며 슬퍼했다. 나머지 하나, 역사는 흥망성쇠의 이치와 통치의 잘잘못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래서 현명하고 분별력 있는 통치자들은 예외 없이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했다.

무측천(武則天)은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다. 우리에겐 ‘측천무후’로 알려져 있다. 그는 강한 권력욕과 능수능란한 처신, 그리고 치밀한 정치적 수완으로 기어이 당 왕조를 멸망시키고 주(周) 왕조를 세웠다. 중국 역사에서는 대체로 무측천의 주 왕조를 그냥 지나친다. 그가 죽은 뒤 바로 당 왕조가 복구됐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당 왕조의 역사에 무측천을 포함한다.

무측천의 파격 통치

무측천은 매우 잔인하고 사악한 여성으로 묘사돼왔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는 천수(天壽) 원년인 690년 황제 자리에 오른 뒤부터 신룡(神龍) 원년인 705년 자리에서 밀려 내려오기까지 15년 동안 보좌에 앉아 집정했다. 꿈에도 그리던 목적을 달성한 그는 다른 통치자들과 마찬가지로 부패와 향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인심을 잃는 일도 적지 않게 저질렀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통치와 정치행위는 적극적, 진취적이었다. 파격적인 인재 등용과 언로 개방, 잘못을 고칠 줄 아는 자세 등이 돋보였다. 균전제를 널리 실시하고 농업을 발전시킨 업적도 있고, 대외적으로는 변방의 우환을 방어하며 나라를 안정시킴으로써 보국안민의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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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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