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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 ⑦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황홀한 도자기의 나라’에서 ‘황색 위협’으로

  • 안성찬 │ 서울대 HK연구교수·독문학 story@snu.ac.kr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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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한 나라, 중국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유럽인에게 중국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한 동방견문록.

‘진기한 나라 중국’은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표현으로, 여기에서 ‘진기한 나라’란 ‘curious’의 어원인 라틴어 ‘curiosus’의 의미, 즉 ‘엄밀하고 상세하게 연구해야 할’ 나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진기한 나라 중국’이란 표현은 당시 유럽인들에게 비친 중국의 모습은 방대한 영토와 오랜 역사, 경제적 풍요와 위대한 정신문화를 두루 갖춘 나라였으며, 따라서 진지한 연구를 통해 많은 것을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고대부터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으로 전해진 비단, 도자기, 차 등 진귀한 물품으로 서양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기한 나라’였다. 이러한 이미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더욱 증폭되었다. 당시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린 이 책은 신비하고 풍요로운 이 진기한 나라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욕망을 유럽인에게 불러일으켜, 대항해 시대의 개막과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에 일조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 이후 동서양 사이에는 많은 직접적인 접촉이 이루어졌다. 이 접촉은 선교와 교역이라는 서양의 욕구에서 주로 생겨났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접촉은 서방의 일방적인 구애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러한 관계는 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와 구애는 정복의 욕구로 바뀌게 된다.

동서양 사이의 관계와 교류 역사에서 18세기는 매우 흥미로운 세기다. 계몽의 세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서양은 절대왕정 체제에서 계몽군주의 시대를 거쳐 시민국가로 나아가는 커다란 변혁을 겪었다. 이 시기까지 서양은 중국의 문화가 자신들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인정했으며, 당시 서양으로 흘러들어간 중국 문화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18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중국풍’)라는 문화양식을 탄생시키고 계몽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등 서양의 생활·정신문화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공헌했다. 그러나 계몽주의 말기에 중국은 한순간에 이미지 추락을 겪는다. 이때부터 서양은 우월감과 두려움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과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게 된다. 이러한 시선으로부터 생겨난 오리엔탈리즘은 이후 서양이 동양에 자행한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침탈의 이데올로기적 토대가 되었다.

이하에서는 18세기에 중국문화가 유럽문화에 미친 영향을 도자기와 정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어서 중국관(觀)의 급격한 변화가 생겨난 배경과 상황을 간략하게 그려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상호이해뿐만 아니라 오해도 문화교류의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문화교류에서 오해는 필연적인 것으로 무해한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 생산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타문화에 대한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해는 타자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어, 치명적인 갈등을 빚어내고 나아가 커다란 환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18세기 말 유럽에서 있었던 중국관의 변화는 이에 대한 흥미로운 예증을 보여준다.

“유럽의 중국관은 후기 계몽주의자들이 바꿔놓았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오랑제리 정원.

근대 이래로 유럽인에게 자기(瓷器)는 곧 중국을 의미했다. 이러한 사실은 영국 자기의 대명사인 본차이나라는 이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 자기에 왜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자기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본차이나가 ‘born china’, 즉 중국산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본차이나(bone china)는 동물뼈(bone)를 재료의 중요한 성분으로 사용한 자기(china)를 뜻한다. 자기 하면 곧 중국을 떠올린 데서 생겨난 단어용법인 것이다. 일본을 통해 서양에 흘러들어간 칠기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불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a japan table’은 ‘일본식 탁자’가 아니라 ‘옻칠한 탁자’를 의미한다. 본차이나는 중국의 자기를 직접 생산하기를 열망했던 유럽인의 오랜 노력이 맺은 열매 중 하나다.



아름답고 신비한 자태에 동양적 문양이 새겨진 중국 자기는 비단과 더불어 유럽인들이 가장 선망한 동양의 보물이었다. 토기와 도기는 만들기가 쉬워 이미 고대 이래로 세계 전역에 걸쳐 만들어져왔다. 그러나 투명하고 밝은 빛을 내는 데다가,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나고, 얇으면서도 단단해 도자기의 백미로 꼽히는 자기의 제조방법은 근대 초까지도 동양,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과 한국이 독점하고 있던 최첨단 소재의 제조기술이었다. 같은 동양권 안에서도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고 간 도공들 덕분에 16세기에 들어서야 처음으로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서양 자기의 역사는 이보다 두 세기나 더 늦은 18세기에 처음으로 시작된다.

유럽 최초의 도자기 ‘마이센 자기’

유럽에서 생산되는 도기와는 품질과 아름다움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국적 정취의 신비감까지 지닌 중국의 자기는 유럽의 귀족과 부호들이면 누구나 소유하고 싶어하는 동양의 보물이었다. 절대주의 왕정 시대에 중국 자기는 유럽의 모든 왕가가 궁정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호화로운 다기와 식기로 성찬을 즐기기 위한 필수품이었다.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베르사유 궁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쉔브룬 궁전, 독일 호엔촐레른왕가의 상수시 궁전 등 근대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녔던 왕가의 궁전들에는 예외 없이 중국 도자기들로 장식된 ‘중국의 방’이 있다. 귀한 중국 도자기들로 가득 찬 방을 갖고 있다는 것은 최고의 권력과 부를 지닌 왕가에서나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중국 비단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고, 중국 다기로 중국차를 마시고, 중국 자기그릇에 식사를 하는 것은 이 시대 왕가들이 누리던 최고의 호사 중 하나였다. 상수시 궁전 숲 속의 중국 다원에는 중국 황제의 호사를 모방하고 싶어하던 유럽 군주들의 소망의 흔적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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