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호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 이경하│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한국고전문학 sitayana@snu.ac.kr

    입력2011-10-19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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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전 가을 이맘때였다. 배우 안재환씨의 자살로 한동안 인터넷이 뜨거웠고, 한 달 후에는 또 배우 최진실씨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나의 지인도 아니고 내가 특별히 좋아했던 사람이 아니라 해도, 유명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필자 같은 일반인에게도 충격이었다. 더구나 자살이 아닌가! 친숙한 그 얼굴들이 더 이상 산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생의 중요한 고비에서 행하는 일련의 의식을 통과의례라 할 때,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통과의례는 혼례와 장례다. 현대에는 아예 혼인을 하지 않는 사람, 동거는 해도 결혼이란 제도는 거부하는 사람, 의식으로서의 혼례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장례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점에서, 미래에도 여전히 중요한 통과의례로 남을 것이다. 연고자 하나 없는 노숙인도 그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담당 공무원에 의해 화장터에서 인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다.

    장례를 포함한 상례는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문화적 장치다. 원시시대의 단순해 보이는 형태부터 중세 지배종교의 세련되고 복잡한 의식절차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 일상적이고도 특별한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각기 독특한 방식을 고안해왔다. 개별적인 상례에서 죽음은 망자 개인의 죽음이지만, 그것은 또한 의례의 주체인 산 자에게도 똑같이 예비되어 있는 인간 보편의 죽음이다. 죽음을 둘러싼 의례가 치러지는 동안 산 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소멸의 존재임을 절감한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깊은 자각이 철학과 종교의 시원에 닿아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둘러싼 의례의 역사는 바로 문명의 역사다.

    상례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문화 장치

    반 게넵(Arnold van Gennep)은 모든 통과의례가 ‘분리-전이-통합’의 세 국면을 거치며 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공통점을 갖는다고 했다. 상례의 경우, 의례 대상인 망자와 의례 주체인 유족이 세 단계의 통과의례를 함께 겪는다는 특성을 갖는다. 즉 망자는 이승에서 분리되어 전이 단계를 거쳐 저승으로 통합되고, 유족은 일상과 분리되어 거상(居喪)의 전이 단계를 거쳐 다시 일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여기서 통합(incorporation)이란 하나의 개체가 전체의 일부분으로 편입된다는 뜻이며 상례는 망자를 저승으로, 유족을 일상의 세계로 무사히 통합하기 위한 의식이다.



    불교의 상례를 들어 말하면, 분리 단계는 임종에서부터 염습, 입관, 화장까지 망자의 몸을 이승으로부터 점진적으로 격리하는 기간이라 할 수 있다. 전이 단계는 망혼이 이승도 저승도 아닌 곳에 머무는 49일간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유족의 거상 기간이기도 하다. 통합단계는 망혼이 완전히 저승으로 편입하는 단계, 동시에 유족은 탈상을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시기를 가리킨다.

    민속학자 구미래는 상례에서 분리의 단계를 좀 더 세분화해 ‘분리거부 단계’를 설정하는데, 그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심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유교상례에는 마당이나 지붕 위에 올라가 망자의 옷을 흔들며 ‘복(復)’을 외치는 고복(皐復) 절차가 있다. 김소월 시인의 노래처럼 ‘산산이 부서진 이름,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을 부르는 초혼(招魂)의 풍습은 분리거부의 심리를 잘 보여주는 의례라 할 수 있다.

    집단생활을 하는 침팬지나 돌고래 같은 동물도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미 침팬지는 죽은 새끼를 며칠씩 등에 업고 다니거나 새끼를 깨끗한 곳에 누이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등 다른 침팬지가 새끼의 죽음을 ‘확인해’ 줄 때까지 새끼의 죽음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은 행동을 한다. 새끼가 정말 죽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지연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일종의 분리거부 심리가 반영된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물며 인간임에랴. 공자의 말이다.

    “효자는 부모가 돌아가신 후 극도로 비통해하며 꿇어 엎드려 통곡한다. 혹시 소생할지도 모르는데 어찌 급하게 포기하고 시신을 염하겠는가? 3일이 지나서 시신을 염하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에서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유계는, 중국 춘추시대 사람인 조간자가 죽은 지 열흘이 되어 혀와 귀에 구더기가 생겼다가도 소생한 예를 들며, 3일 전에 입관하는 것은 살인과 같다고 했다. 시신의 염습과 입관은 망자가 더 이상 소생할 가망이 없음을 받아들이고 죽은 자를 산 자들로부터 격리하는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분리거부 단계에서 적극적 분리 단계로 넘어가며, 죽은 자와 산 자의 이별 의식이 진행된다.

    주검 처리는 인류가 당면한 중요 과제

    상례는 주검의 처리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망자의 영혼과 잘 이별하기 위해 고안된 의례다. 그중 특별히 주검의 처리에 관한 의례가 장례인데, 주검의 처리는 태곳적부터 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을 터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인 방식은 매장(埋葬)과 화장(火葬)이지만, 이 외에도 시신을 새의 먹이가 되게 하는 조장(鳥葬), 강이나 바다에 흘려보내는 수장(水葬), 들이나 돌이나 나무 위에 두어 저절로 썩게 하는 풍장(風葬) 등 시신 처리를 위한 여러 방식이 고안되었다.

    주검의 처리 방식은 종교와 관련된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 인도의 배화교에서는 흰 헝겊에 싼 시체를 ‘침묵의 탑’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놓고 새들에게 그 처리를 맡긴다. 네팔의 티베트인 마을에서는 시체를 산중턱으로 운반해 안치한 후 라마교의 의승(醫僧)이 먼저 시신을 베어 내장을 꺼내고 큰 돌을 떨어뜨려 시신의 머리를 부수는데, 이 모든 행위는 독수리나 까마귀들이 시체를 남김없이 뜯어먹게 해 사체의 뼈만 남기기 위해서라고 한다. 조장의 구체적인 방식이 이방인에게는 언뜻 잔인해 보이지만, 이것은 새에 의해 망혼이 하늘로 운반된다는 그들의 종교적 믿음에 근거를 둔 것이다.

    서양 고고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류의 인식이 중기 구석기시대에서 후기 구석기시대로 전환하는 시점, 즉 6만년 전부터 3만년 전 사이에 엄청나게 큰 변화를 맞게 된다고 설명한다. 한 개인의 죽음이 ‘고찰’ 대상이 되면서, 시신 앞에서 “이것이 왜 이렇게 차가운가? 이것이 끝인가? 이 순간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가?” 하는 죽음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들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매장의 흔적이 집중적으로 확인되기 시작하는 시기가 중기 및 후기 구석기시대라고 하는데, 물론 그 시대에 매장은 매우 특별한 인물이나 상황에 한정된 의례였다.

    동아시아문명권에서 무덤의 역사를 한자의 형상을 통해 추정해보면 대체로 ‘장(葬)→묘(墓)→분(墳)’의 형태로 변천해왔다고 일반화할 수 있다. ‘장(葬)’자는 ‘艸+死+·#53830;’로, 시체를 땅이나 널빤지 위에 놓고 풀로 덮어놓은 형상이다. 즉 주검을 ‘감춘다(藏)’는 뜻이다.

    ‘주역’에서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그냥 들에다 두고 풀이나 나뭇가지로 덮고 나무나 봉분도 하지 않았다”고 한 것처럼, 상고시대에는 시신을 들이나 산에 방치하고 초목으로 덮는 정도였다. 그러다 점차 시신을 구덩이를 파고 묻는 형식으로 변화했는데, 처음에는 봉분이 없는 ‘묘’였다. 중국 은나라 때에도 매장지가 없었고, 주나라 문왕과 무왕의 무덤도 평지묘(平地墓)였다고 한다.

    그런데 평지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뿐 아니라 짐승들이 시신을 파헤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시신을 짐승에게서 보호하고 무덤을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분(墳)’자형 무덤을 만들게 된다. ‘土+十+十+十+貝’로 구성된 이 글자는 흙과 조개껍데기를 많이 쌓아 봉분을 갖춘 무덤을 형상화한 것이다. ‘十’자 3개는 30개, 즉 조개껍데기가 그만큼 많이 쌓였다는 뜻이다. 봉분이 있는 무덤은 춘추시대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전국시대에는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맹자’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고시대에는 부모가 죽어도 장사 지내지 않고 시체를 들어다가 구덩이에 버렸다. 훗날 자식이 그곳을 지나다보니,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모기가 엉겨서 빨아먹고 있었다. 자식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눈길을 돌리고 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식은땀은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흘린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자식은 곧 집으로 가서 들것과 가래를 가지고 돌아와 흙으로 시체를 덮었다.”

    상고 시대라 불리는 아주 먼 옛날, 부모의 시신을 내다버리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때가 있었는데, 인간의 인지가 발달하면서 주검 처리의 방식도 점차 복잡한 체계와 논리를 갖춘 ‘의례’로 정교화 했던 것이다.

    장(葬)→묘(墓)→분(墳)으로 바뀐 동아시아 무덤 변천사

    한반도에서는 주검의 처리에 관한 어떤 기록들이 남아 있을까? 매장은 선사시대부터 행해졌다고 하는데, 삼국시대 이전 부여에는 이승의 삶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믿음을 반영하는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다. 동옥저에서는 시신을 임시로 매장해 살과 가죽이 다 썩고 나면 뼈만 추려서 곽 속에 안치했는데, 가족의 유골을 하나의 곽 속에 보관했다. 이와 같이 시체가 다 썩을 때까지 지상에 방치하거나 땅에 묻었다가 뼈만 추려 다시 매장하는 방식을 이중장(二重葬) 또는 복장(複葬)이라 한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매장은 물론 부모에 대한 삼년상을 골자로 한 유교식 상장례가 더 널리 행해지는데, 신라의 경우 문무왕 때 불교식 화장법이 시작되어 효성왕 때 일반화되었다.

    불교식 상장례의 핵심인 화장은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크게 성행했다. 고려의 묘지명(墓誌銘)에 보이는 일반적인 불교식 상장례는 ‘사망→ 절 근처에서화장→ 유골 수습→ 절에 유골 안치→ 유골 매장’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화장 후에 수습한 유골을 절에 일정 기간 안치하는 것을 권안(權安) 또는 권빈(權殯)이라고 하는데, 부모의 유골을 절에 두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매장하지 않는 자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처럼 절에 권빈하는 습속은 고려 때 특히 귀족층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불교의 화장법은 고려 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고려 말 1389년 공양왕 때 처음으로 화장에 대한 비판이 공식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듬해에는 상장례를 대부와 사·서인(士庶人) 모두 주자가례에 의거하도록 하는 법령을 제정하게 된다. 그러나 오랜 관습이 된 불교식 화장법이 일거에 사라질 리는 없었다.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1973년 종묘 영녕전에서 거행된 영친왕 신위 봉안 모습.

    조선에 들어서도 한동안 화장이 행해졌고 이로 인해 처벌받는 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1395년(태조 4년)에 화장 금지령이 다시 내렸지만, 세종 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화장법을 선택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었다. 규제를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을 했다가 나중에 묘를 부수고 시신을 꺼내어 화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다. 1470년(성종 1년)에는 그런 경우가 적발되면 엄하게 벌했고, 친족이나 이웃이 화장한 사실을 알고도 막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중죄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렇게 불교식 화장을 법으로 금하고 유교식 상장 예법을 보급한 결과, 15세기 말 성종 집권 후반기에는 승려의 다비나 유기된 시체 처리를 위한 특수한 경우 외에 일반인의 화장은 크게 감소하기에 이른다. 조선 초기 그처럼 화장에 대한 엄한 규제는 법률적으로 중국의 ‘대명률’에 따른 것이다. 대명률에는 “존장의 유언을 따라 시체를 화장한 자는 곤장 100대에 처한다” “자손으로서 부모나 조부모의 시체를 훼기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유교의 논리에 따르면, 세 치의 관에 다섯 치 곽을 마련하면서도 오히려 시신이 속히 썩을까 염려하고, 염하는 옷이 수십 벌이라도 그래도 박한 것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것이 성인(聖人)의 마음이요 망자를 떠나보내는 바른 예법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화장은 ‘불인(不仁)’함의 극치요, 불교는 ‘오랑캐의 아비도 모르는 가르침’이다.

    올봄 SBS에서 방영한 드라마 ‘49일’은 불교 상례를 대표하는 49재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49재는 고대 인도의 중유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중유(中有) 또는 중음(中陰)이란 말은 사람이 죽은 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여러 설이 있었는데, 2세기 중엽에 편찬된 불교 경전에서 최초로 등장한 ‘중음칠칠일설(中陰七七日說)’을 근간으로 해, 사람이 죽은 후 중유에 머무는 기간을 최소 7일, 최대 49일로 보는 설이 현재는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49재는 고대 인도 중유사상에 근거

    고대 인도에도 이미 현세의 선악이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사상이 있었고, 이후 불교의 성립과 함께 윤회사상이 더욱 체계화되었으며, 1세기를 전후해서는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 내세의 구제를 이야기하는 아미타신앙과 정토신앙이 유행하게 된다. 중유설은 그런 배경 속에서 7·7일로 구체화되었고, 망자의 극락왕생을 비는 불교의 천도(薦度) 의례로서 칠칠재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이다.

    중국에 유입된 칠칠재를 비롯 불교의 사후 의례는 유교의 조상숭배사상과 결합되어 더욱 발전하는데, 당·송 시대에는 이미 49재가 민간의 중요한 불교의례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명부신앙의 핵심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에서는 사후 49일 이내에 유족이 재를 통해 망자를 천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한 당나라 말기에는 시왕(十王) 신앙의 성행과 함께, 49일까지 7일마다 행하는 칠칠재 외에 100일과 1주기, 3주기에 행하는 재를 더해 모두 10회의 재를 지내는 변화가 나타난다. 이것은 불교의 천도재와 유교의 삼년상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칠칠재에 대한 기록은 신라 때부터 발견되고, 고려시대에는 승려와 왕실 외에 민간에서도 49재를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장례 이후에 행하는 천도재가 49재에서 끝나지 않고 왕실에서 백일재, 1주기 소상재, 2주기 대상재가 행해졌다는 기록은 중국과 상통한다. 신분과 시대에 따라 탈상 시기는 늦어질 수 있지만, 여하튼 49재가 고려 때 민간에서 보편화되고 핵심적인 상례였음은 분명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여말선초에 나라에서는 불교식 화장을 법으로 엄하게 금했고, 15세기 말에 가면 어느 정도 그 효과가 나타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49재로 대표되는 불교의 추천(追薦) 의례에 대해서는 화장법에 대해서만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천도재의 장소나 참여 인원, 사용되는 재물 등에 대한 규제가 조선 초기 내내 지속되긴 하지만, 전면적인 금지는 아니었고 실제로 어느 정도 허용하는 분위기였다.

    불교의 천도재에 대해 물론 유자들의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었다. 비판 논거는 크게 세 가지. 첫째, 칠칠재는 불효란다. 죄 없는 부모를 죄가 있는 것처럼 부처와 시왕에게 고하는 자체가 불효라는 논리다. 둘째, 재를 지내 망자의 극락왕생을 빈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 설령 부처가 있다 해도 공양을 받았다고 해서 죄 있는 자를 용서해준다면, 그것이 벼슬이나 옥사(獄事)를 팔아먹는 탐관오리와 무엇이 다르냐고 했다. 셋째, 천도재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현실적인 비판 논거가 되었다. 죽은 사람에게 무익할 뿐 아니라, 재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망쳐 산 사람에게도 손해만 끼칠 뿐이라는 것이다.

    조선 전기 국상(國喪)에서 불교 의례가 축소·폐지되는 과정을 고찰한 논문에 따르면, 1544년 중종의 상 이후에는 국상에서 칠칠재를 시행한 기록이 실록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본래 국상 절차에서 불교적 요소는 칠칠재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다. 국상 초에 재도감(齋都監)을 따로 설치하고 빈전(殯殿)이나 궁 안에서 승려가 직접 수행하는 의례가 국상의 매우 중요한 절차로 진행되었다. 칠칠재에서 대상재에 이르는 각종 추천재뿐 아니라 명복을 빌기 위한 사찰 건립, 불상 제작, 사경(寫經) 등이 행해졌다.

    15세기 이후 화장 사라지며 불교의례 축소

    태조의 상은 그러한 불교식 상례로 치렀는데, 태종비 원경왕후의 상부터 재도감 설치 혁파, 법석 폐지 등 불교식 의례가 대거 축소되는 변화를 보인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서 여주인공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상에서는 다른 모든 불교 의식이 생략되고 칠칠재와 백일재만 시행되었다. 드라마에서 정희왕후 모녀가 불공을 드리러 사찰을 찾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세조 역시 실제로 불교에 대해 매우 우호적인 임금이었지만,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난 15세기 후반에 가면 화장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국상에서도 불교적 요소가 눈에 띄게 축소되었다.

    16세기 중엽 국상에서는 공식적으로 칠칠재가 사라졌지만 민간의 사정은 달랐다. 유교식 상례를 행하는 것과는 별도로, 양반들조차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무불식(巫佛式) 천도재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 ‘묵재일기’의 저자인 이문건은 양반 체면상 굿에 참석하지는 못하지만 아들의 49재를 묵인하고 있다.

    “죽은 아들의 칠칠일에 아랫집 남쪽 뜰에서 야제(野祭)를 지냈다. 화원(花園)에서 온 무녀가 굿을 하는데, 위아래 대청에서 모두들 곡을 하였다. 나는 대청에 있었는데 귀가 조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풍경은 당시로서 보편적인 것이었고,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오늘날에도 장례식장에서 승려가 염불이나 법문을 하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이것을 시다림(尸陀林)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인도 마갈타국에 조장(鳥葬)이 행해지던 숲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이다. 망자가 죄업을 씻고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장례 기간에 계속 법문을 들려주는 의식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때부터 관습화되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초상이 나면 불교식 장례를 원하는 유족들은 사찰에 49재를 요청한다. 그러면 그 절의 승려가 장례식장에 와서 시다림을 해주고, 화장 또는 매장이 끝나면 날짜에 맞추어 절에서 재를 올린다. 시다림과 칠칠재는 각각 분리 단계와 전이 단계에서 망혼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례다.

    개인의 죽음을 처리하는 상장례에서 불교적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조선 초기 유자들의 과제였듯이, 국가제사 또한 유교이념에 맞게 재정비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밝혔듯이, 성종 5년에 완성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는 유교이념에 의거한 각종 의례의 기준을 제공하는 문헌이다. 이에 따르면, 국가제사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크게 분류된다. 대사는 종묘와 사직에게 올리는 제사, 중사는 산악과 바다, 바람과 구름, 선농씨, 공자, 단군과 기자 등에게 올리는 제사, 소사는 명산대천과 각종 별에 올리는 제사다.

    이 가운데 소사에 포함된 노인성(老人星) 제사는 본래 도교의례인 초례(醮禮)로 거행했던 것인데, 고려시대에 초례를 주관했던 소격서는 중종 14년(1519)에 조광조와 사림세력에 의해 혁파되기에 이른다. 역시 소사에 포함된 여제(祭)는 불교 수륙재(水陸齋)의 기능을 대신하는 제사였다. 이처럼 조선 초기까지 행해졌던 전통적인 도교와 불교와 무속의 국가적 의례는 점차 폐지되거나 축소되고 유교 의례로 치환되어갔다.

    앞서 살펴본 49재가 망자 개인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라면, 수륙재는 천도되지 못한 유주무주(有主無主)의 고혼(孤魂)들을 위한 법회다. 7·7일 만에 이승을 무사히 떠나지 못해 중유의 세계를 맴도는 무수한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합동천도재인 것이다. 전생에 악업을 짓고 욕심을 부린 벌로 항상 기갈에 허덕이고 괴로워하는 ‘아귀’ 또한 수륙재의 대상이다. 아귀에게 먹을 것을 베풀어주는 법회라 해, 수륙재를 시아귀회(施餓鬼會) 또는 시식회(施食會)라고도 한다.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불교식 화장을 금하고 유교식 상장 예법을 보급한 결과 15세기 말부터 화장은 크게 감소했다. 2010년 3월 거행된 법정스님 다비식.

    아귀에게 먹을 것 베풀어주는 법회

    수륙재가 우리나라에 시행되었다는 첫 기록은 고려 태조 때이지만, 다른 불교의례에 비하면 수륙재를 베푼 사례는 고려시대에 흔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조선에 와서 수륙재는 더 빈번하게 시행되는데, 이것은 각종 호국법회나 도량이 폐지되고 개인의 상장례에서도 불교 의례가 축소되었던 일반적인 동향과 언뜻 상반된 것으로 보인다. ‘경국대전’에는 수륙재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설정된 토지를 뜻하는 국행수륙전(國行水陸田)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국행’이란 것은 비용을 나라에서 댄다는 말이니 수륙재가 국가의 공식적인 제사 의례로 인정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국조오례의’에서 보듯 불교의 수륙재는 점차 유교의 여제로 대체되고, 조선 초기에는 이따금 설행되었던 국행수륙재도 성종 말기에 가면 폐지되기에 이른다.

    조선 초기에 국가적 차원에서 설행되는 수륙재를 둘러싼 논쟁을 보면, 유신들은 원칙론을, 임금이나 지방관은 현실론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1442년 8월 황해도 일대에 원인 모를 질병이 유행했는데, 백성들은 그 원인을 봉산과 극성 지역의 해골이 빌미가 된 것이라 여겨 인심이 흉흉했다. 그곳은 고려 홍건적의 침입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세종은 “승려를 모아 해골을 수습해 태워버리고 의혹을 풀어주라. 수륙재는 여제의 한 예로서 역시 백성을 구제하는 일이다. 우선 백성들의 소원을 좇아 무오년의 전례에 의하여 다시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수륙재를 명했다.

    1451년 9월 황해도 극성 지역에서 다시 역병이 발생해 대책 회의를 할 때도, 문종과 지방관은 백성들의 희망에 따라 수륙재를 열어주자며 심리적 치료 효과를 주장했다. 억불강경파 유신들은 역병이 귀신의 빌미에 의한 것이 아니란 점, 설령 그렇다 해도 매년 봄가을로 여제를 베풀고 있는데 또 수륙재를 열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유교식 여제보다 불교식 수륙재를 선호하는 것이 민심이었다.

    여제에서 모시는 15개 신위(神位)의 면면을 보면, 웬만한 원혼(寃魂)들은 다 포함되어 있다. 칼에 맞아 죽은 자, 수화나 도적을 만나 죽은 자, 남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핍박당해 죽은 자, 남에게 처첩을 강탈당하고 죽은 자, 억울하게 형벌을 받아 죽은 자, 천재지변이나 역질을 만나 죽은 자, 맹수와 독충에 물려 죽은 자, 굶주리거나 얼어 죽은 자, 전쟁터에서 죽은 자, 위급해 스스로 목매어 죽은 자, 담이 무너져 압사한 자, 난산으로 죽은 자, 벼락 맞아 죽은 자, 추락해 죽은 자, 죽은 뒤에 자식이 없는 자 등등. 담이 무너져 압사한 경우란 성을 쌓는 부역에 동원되었다가 죽은 백성을 가리킨다. 신위의 면면을 보니 여제도 분명 비명횡사한 원혼들을 위한 제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살아 있는 백성의 마음까지 위로하고 치유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했던 것일까? 다음은 여제에서 읽었을 법한 제문이다.

    “외로운 혼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제사도 받아먹지 못하여, 달밤에 슬피 소리 내어 울고 바람이 몰아칠 때면 원통하여 통곡한다. 이러한 음혼(陰魂)들이 흩어지지 않고 맺혀서 요망한 기운이 되어 말을 만들어내니 진실로 슬픈 일이로다. 이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성 북쪽에 단을 쌓고, 나라 안에 제사를 받아먹지 못한 귀신들을 위해 두루 제사를 지내주고자 한다. 이에 해당 지역의 성황신으로 하여금 모든 혼을 소집하고 이 제사를 주장하게 하는 바이다. 바라건대 너희 모든 신들은 어둡지 않음을 숭상하여, 벗들을 이끌고 짝들을 불러 모아 와서 이 음식을 흠향하고, 재앙을 만들어 화기를 상하게 하지 말고, 유명(幽明)의 세계가 감통하여 온 나라가 평안하게 되기를 바라노라. 조용히 교서를 내려 알리니, 너희는 마땅히 알지니라.”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는 글인데, 제목이 ‘여제교서(祭敎書)’라고 되어 있다. 여제의 제문이 교서 형식인 것은 원혼들을 위로하는 주체가 국왕이란 말이다. 이는 불보살과 같은 초월적인 영적 존재를 의례에서 배제하고 그 역할을 현세의 최고 권력인 국왕이 대신하고 있음을 뜻한다. 국행수륙재는 15세기 말기에 폐지되지만, 민간에서는 이후에도 수륙재가 지속되었다. 그것은 유교가 충족시킬 수 없었던 종교적인 요구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교의 사생관과 제사의 의미

    유교는 종교인가 아닌가? 술에 비유하면 도수가 매우 낮은 술이다. 종교성을 설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멸의 존재인 인간이 사망 이후에 대해 갖는 의문과 공포에 대해, 종교는 어떤 식이든 해답을 갖고 있다고 우리는 기대한다.

    유교의 주요 경전인 ‘예기’에 보면 “혼(魂)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구절이 있다. ‘춘추좌씨전’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형성되는 형(形)이 백이고, 백이 만들어진 뒤 거기에 양의 신기(神氣)가 깃들면 혼이 된다고 했다. 형백(形魄)과 혼기(魂氣)가 차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대의 유학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가하는데, 정신과 신체를 나누어 사고하는 이원론이란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정도전이 불교의 윤회설을 비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불이 다 타버리면 연기는 하늘로 돌아가고 재는 떨어져 땅으로 돌아가나니, 이는 사람이 죽으면 혼기(魂氣)는 하늘로 올라가고 체백(體魄)은 땅으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불의 연기는 사람의 혼기이고, 불의 재는 사람의 체백이다. 불기가 꺼져버리면 연기와 재가 다시 합하여 불이 될 수 없는 것이니, 사람이 죽은 뒤에 혼기와 체백이 다시 합하여 생물이 될 수 없다는 이치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혼 또는 혼기가 정신을 말한다면, 백 또는 형백 또는 체백은 육체를 가리킨다.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음양설에 따르면 천지간 만물에 기가 있는데 양기(陽氣)의 정령을 혼이라 하고 음기(陰氣)의 정령을 백이라고 했다.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향을 피워 연기를 하늘로 올리고 술을 부어 땅에 스며들게 하는 것은 제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인데, 이는 사람이 죽어서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상장례(喪葬禮)는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

    종묘대제 정전 제향 모습.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귀신은 무엇인가? 성현의 설명에 따르면, 죽음이란 양기가 떠서 흩어지는 것인데, 양기가 승천해 신명(神明)이 되기도 하고 귀신(鬼神)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생전의 원한과 미련을 놓지 못하면 양기가 승천하지 못하고 떠다니다가 음기가 되는데, 이것이 귀신이라고 했다. 죽어서 미련 없이 이승을 떠난 신명은 조상신으로서 후손의 제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사람은 죽어서 혼과 백으로 나뉘어 흩어지고 잘하면 승천해 신명이 될 터이다. 그럼 제사는 왜 지내나? 제삿날마다, 명절 차례 때마다 궁금했다. ‘정말 조상신이 있어 그 혼이 제삿밥을 먹으러 오늘 여기 오시나?’ 조선시대 사람들은 정말 그렇게 믿었을까? 신령이 흠향하러 온다는 건 허울이고, 제사는 단지 부계제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를 재확인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에 불과한 것일까?

    “제사는 산 자들이 망혼을 불러내 위로하는 의식”

    ‘침묵의 종교 유교’의 저자인 가지 노부유키는 “유교의 제사가 초혼재생(招魂再生)을 통해 망혼을 이세상으로 다시 불러 산 자들이 그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리고 위로하는 의식”이라고 말한다. 생시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망자가 제사라는 의식을 통해 그 순간 재생한다는 논리다. 제사에서 사용되는 신주(神主)는 망자의 혼과 백이 의지하는 곳이다. 고대에는 유골 중에 두개골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는데, 이후에 두개골 자체를 모시던 것이 점차 변해서 대체물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망자의 얼굴과 비슷하게 만든 기두(·#54751;頭)라는 마스크를 썼는데, 그것을 더욱 단순화해서 만든 것이 나무로 만든 신주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위패는 유교의 신주 개념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하튼 제사를 ‘혼을 부르고 백을 회복시키는’ 의식으로 본다면, 결국 제사를 주관하는 유자는 오래전 샤먼의 한 부류요, 유교는 샤머니즘에 기원을 둔 종교다. 도수가 낮아도 술은 술이다. 하지만 죽음에 관해 유교가 제시한 답안이,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었다는 조선에서조차 일반 대중에게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화장률은 1971년에 겨우 7%에 불과하던 것이 2010년 현재 67%를 넘어섰다고 한다. 이것은 10년 전인 2000년 현재 33.7%의 2배가 넘는 놀라운 수치다. 2010년에 80%가 훨씬 넘은 부산의 경우에서 보듯이, 화장률은 대도시가 지방 소도시에 비해 훨씬 높다. 이처럼 화장률이 급속하게 높아지는 이유를 불교의 영향력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화장은 특정한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선택되는 경향이 있다. 묘지 공간의 부족, 묘지로 인한 자연환경 훼손, 무연고 묘의 방치, 지속적인 묘지 관리의 부담 등 현실적인 논리가 현대인으로 하여금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화장을 선택하게 만든다. 고려 말 조선 초기에 화장은 척결해야 할 불교의 상징적 의례였지만, 오늘날 화장은 더 이상 그 의미가 특정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조선 초기는 유교를 중심으로 정치 사회 문화 모든 면의 재편을 시도했던 시기다. 주자가례를 관혼상제의 기준으로 삼고 왕실이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등 유교 의례의 보급을 위해 노력했지만, 상장례에서 불교적 유습을 없애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도 표면적으로는 불교를 버리고 유교식 상·장·제례를 철저히 따른 듯하지만, 오래전부터 행해졌던 무불식 의례가 유교식 의례와 별도로 비공식적으로는 계속 유지되었다.

    평범한 유자들 ‘사망 이후’ 유교식 해석에 만족 못해

    불교식 천도재에 대한 신료들의 비판이 한창 심했을 때, 세종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좌의정 유정현이 생시에는 수륙재를 올리고 궐내에서 독경(讀經)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더니, 죽을 때가 되어서는 자기 천도재를 거하게 올리라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한다. 요사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귀신 섬기는 제사를 금하자고 말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여기에 혹하는 자가 많으니, 임금 위하는 도리와 자기 위하는 방도가 어찌 이리 모순되는가?” 철저한 성리학자는 예외였는지 몰라도, 배움이 없는 백성들뿐 아니라 대다수 평범한 유자(儒者)들 역시 ‘사망 그 이후’에 대해서는 유교식 해석에 만족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망자를 위해 천도재를 올리는 것은 현세적 삶의 질서를 유교에 철저히 기대는 것과는 어쩌면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유교식이든 불교식이든 기독교식이든, 상장례는 결국 인간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을 세련되게 다듬은 의식이다. 상장례는 그것이 기반을 둔 종교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불교식 상장례에 대한 조선 초기 유자들의 비판은 현실적인 논리에 의한 것도 있지만 결국 종교로 대변되는 이질적인 문명의 충돌이었다. 그러나 충돌에 의한 결과를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나 패배로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인류가 살기 시작한 원시로부터 오늘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장례는 종교와 지역과 시대에 따라 강렬하게 충돌하기도 하지만 융통성 있게 뒤섞이며 변형되어왔다. 오늘날 우리의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 그것은 장구한 시간 동안 크고 작은 충돌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인류 문명사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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