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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서울대 HK문명연구사업단 공동기획 - 문명의 교차로에서⑮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필담집을 통해 본 ‘완고한 조선’과 ‘유연한 일본’

  • 이경근│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원·국어국문학 openears@naver.com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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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49년 전 조선통신사절단의 서기 원중거와 일본 유학자 다키 가쿠다이(瀧鶴臺)는 일본에서 만나 필담을 나눴다. 필담집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에는 중화(中華)의 관점에서 일본을 인정하지 않는 원중거의 완고함과, 일본과 조선은 문명국이며 중국만 귀하게 여기는 것은 그릇된 생각이라는 가쿠다이의 유연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후 조선의 망국은 어쩌면 이때부터 예고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은 주자를 모르니 성리학으로 이끌어야겠소”

일본인이 그린 조선통신사 행차 모습.

‘구황작물(救荒作物)’이라면 대부분 감자와 고구마를 떠올린다. ‘흉년이 들었을 때 주식을 대신해 먹을 수 있는 농작물’치고는 사실 감자, 고구마 외에는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는다. 감자는 19세기에 청나라에서 들여왔다. 고구마는 18세기 일본에서 각각 수입해 들여왔는데, 조선으로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사람은 조엄(趙·#53371;·1719~1777)이다. 이 인물은 1763년 한양을 떠나 이듬해 귀국한 계미년 통신사절 책임자였다. 그가 쓴 ‘해사일기’에는 통신사행 도중 대마도에서 처음 고구마를 보고 종자를 조선에 들여와서 키우고자 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정조실록’에도 “고구마 종자를 막 들여왔을 때에는 농부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는데, 점차 관가의 수탈이 심해져 30년 지난 후에는 고구마를 재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관리의 모습이 읽힌다. 한 비변사는 “고구마는 구황(救荒·기근 때 빈민을 구함)을 하는 데 실로 중요한 종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고구마 종자의 유입은 조선에서 꽤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를 조선에 들여온 조엄이 이끈 계미통신사절의 일본 사행도 흥미롭다.

고구마 수입은 계미년 통신사행의 부산물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맞이한 에도(江戶) 시대(1603~1868)에 조선이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한 횟수는 총 12회였다. 이 중 1763년 떠난 계미통신사의 공식적인 임무는 일본의 제10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쇼군의 지위를 물려받은 것을 축하한다’는 영조의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영조 국서 전달하러 떠난 계미통신사절

통신사절의 책임자 격인 정사, 부사, 종사관을 삼사(三使)라고 한다. 이 사행의 정사가 바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이었다. 또 문장을 잘 짓는 사람들을 골라 제술관과 3명의 서기 자리를 맡겼다. 이때 제술관은 남옥, 정사 서기는 성대중, 부사 서기는 원중거, 종사관 서기는 김인겸이었다. 통신사절은 일본에서 여정을 거칠 때마다 현지의 문사들과 시와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이 역할을 맡은 이들이 주로 제술관과 3명의 서기였다. 이 자리는 서얼들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문벌이 좋은 사대부 문인들은 일본 항해를 위험한 일로 여겨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옥, 성대중, 원중거, 김인겸도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이들은 여행 후 자신의 일본 사행 경험을 상당히 두툼한 저술에 담았는데, 남옥은 ‘일관기’, 성대중은 ‘일본록’, 원중거는 ‘승사록’과 ‘화국지’를 남겼다. 이 책은 모두 한문 저술이다. 김인겸은 국문으로 된 장편 가사 ‘일동장유가’를 지었는데, 한문과 한글의 차이는 있지만 계미통신사절 작품이라는 것은 공통점이다.

앞서 소개한 정사 조엄의 ‘해사일기’가 계미통신사의 공식적인 기록물이라면, 이 저술들은 그보다는 사적이고 느슨한 성격의 기록물이다. 이들 서적 외에도 조선과 일본 문사가 시와 필담을 주고받은 것을 기록한 필담자료집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필담은 당시 언어가 다른 문사가 통역 도움 없이 자신들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필담은 글이기는 하지만, ‘말’을 그대로 적었다는 점에서 ‘말’의 성격이 온전히 살아 있는 글이기도 하다. 필담자료집에 대화 참여자의 평소 식견이나 편견이 가감 없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필담자료집의 대부분은 통신사절이 일본의 특정 지역을 방문했을 때, 그 지역 문사들이 통신사 숙소에 찾아가 필담한 내용을 정리해 책으로 엮은 것이다. 즉 일본 문사들이 정리해서 일본에서 출간한 것이다. 대부분 사행 직후 출간되었고,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기도 했다. 기록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성질이 발동한 것일 테지만, 어쨌든 조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필담뿐만 아니라 필담의 내용을 보충하려는 듯, 보다 심층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고 그에 대한 답장까지 받아 수록해놓은 경우도 있다.

조선 문인과 일본 문인은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었을까? 필담 기록과 편지글을 통해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우리가 주목할 책은 ‘장문계갑문사(長門癸甲問?)’라는 목판본 필담집이다. 여기서 ‘장문’은 ‘나가토노쿠니(長門國)’라는 지명으로 시모노세키(下關)의 옛 이름이다. 초슈번(長州藩)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에서 파견된 통신사절이 늘 묵어가던 곳이다. 이 필담집의 제목은 ‘계미년(1763)과 갑신년(1764) 두 해에 걸쳐 나가토를 방문한 조선사절단’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는 시모노세키에서 통신사가 머물렀을 때 현지 문사들과 주고받은 필담과 시문, 편지가 다수 실려 있다.

원중거와 다키 가쿠다이의 만남

이 책은 1765년 9월 메이린칸(明倫館)에서 간행되었는데, 메이린칸은 초슈번의 젊은이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교육기관이었다. 문사들이 어울린 지 고작 1년이 지나서 필담집이 간행되었다는 사실은 한일 문사 교유에 대한 현지의 높은 관심을 의미한다.

필담에 참여한 많은 인물 가운데 주목할 일본 측 인물은 다키 가쿠다이(瀧鶴臺·1709~1773)이다. 이 인물은 에도에서 핫도리 난가쿠(服部南郭·1638~1759)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했고, 후에는 초슈번의 번주 교육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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