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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로마시대의 해적

  • 김석균│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1@yahoo.co.kr

귀족층 비호 아래 노예무역으로 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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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해군력 위협한 해적들

한낱 도시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는 지중해 건너편 북아프리카 연안의 강력한 해양 도시국가 카르타고를 정복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대제국으로 발전해갔다. 이제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나 다름없었다. 사실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로마는 오랜 내전을 거치면서 지상군 중심의 국가로 성장했고 변변한 함정과 해군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도움을 받아 함대를 건설했고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한 해군력을 갖게 됐다.

지중해를 둘러싼 대제국을 건설해나가던 로마를 내부에서 괴롭히는 가시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해적들이었다. 기원전 2세기 지중해 서부에서는 로마가 카르타고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동부에서는 알렉산더 대왕 사후 마케도니아의 도시국가들이 쇠퇴하는 바람에 힘의 공백이 발생했다. 그 틈을 타 해적집단이 준동했다. 로마의 속지에서 해적의 위력은 대단했다. 곳곳에서 해적이 발호해 피해가 막대해지자 해적 소탕은 로마의 국민적 염원으로 떠올랐고 가장 중요한 국가 현안이 됐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해적은 공화정 말기 로마의 두 주역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권력과 운명에도 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는 바다로 활발하게 진출해 해양을 이용했다. 성경의 사도행전 27장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해 로마와 지중해 연안에서 전도에 앞장선 바울이 정치범으로 체포돼 예루살렘에서 크레타와 몰타를 거쳐 로마로 이송되는 과정을 묘사했다. 이를 통해 로마인들이 배를 일반적인 교통수단으로 친숙하게 이용했다는 것과 로마시대 초기의 활발했던 항해 및 해운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내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발전한 로마는 지중해의 해양지배권을 확립한 후 바다 이용에 대한 개념과 해양질서를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2세기 로마의 법학자 마르시아누스는 “해양은 자연법의 일부로서 만민에게 공유(公有)된다”라고 주장했다. 이후 로마는 6세기경 공유물로서의 해양의 지위를 로마법에 법전화했다.



바다는 모두의 공유물로서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로마의 해양사상이자 정책이었다. 이러한 열린 해양사상은 여러 대륙에 걸친 속주의 다양한 인종·언어·종교·문화의 차이와 가치를 인정하고 포용한 로마의 개방성을 생각한다면 당연한 논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지중해는 ‘로마의 호수’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의 지배권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해양을 개방했어도 로마가 해양의 질서를 주도하고 통제권을 행사하는 데는 변함이 없었다.

사상 최대 해적 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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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기원전 59년 로마 공화정 말기에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체제 시대를 함께 연 폼페이우스(기원전 106∼48)와 카이사르(기원전 100∼44)의 권력과 운명도 당시 로마를 괴롭히던 해적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전장을 누비며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 집정관에 올랐고 지중해 전역의 해적을 소탕해 국민적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유학을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해적에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극적으로 탈출한 일이 있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권력의 정점에서 만나게 됐고,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과 정략결혼을 해 협력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어 가지기 어려운 법. 권력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렇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두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귀족 편을 든 폼페이우스와 민중 편에 선 카이사르 두 사람은 처음부터 권력기반이 달랐고 결국엔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고 내전을 벌이게 됐다.

폼페이우스는 18세 때 동맹시 전쟁(로마연합 중 이탈리아 본토의 동맹시들이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하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전쟁)이 벌어지자 아버지를 도와 군단을 이끌 정도로 청년기부터 군사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집정관 독재자 술라와 손잡고 내전에 패해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와 에스파냐로 도망친 마리우스파의 잔당을 소탕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귀환해 검투사 스파르타쿠스가 노예와 검투사를 이끌고 일으킨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기원전 73년 야심만만한 자신의 집정관 취임에 반대하는 원로원을 압박해 크라수스와 공동 집정관에 올랐다.

당시 소아시아의 남서부 해안과 에게 해의 여러 섬에는 해적이 준동했다. 섬이 많고 복잡한 해안에는 작은 출입구가 많아 은신하기 좋았다. 오늘날의 터키 남부 해안지역인 실리시아(Cilicia·라틴어로 킬리키아)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적이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실리시아 연안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해상무역 무대이면서 소아시아와 속주 시리아를 연결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해적이 그곳에 본거지를 두고 로마로 오가는 선박을 약탈했기 때문에 로마로선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해적은 수천 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기원전 86년에는 로마의 함대를 무찌를 정도로 세력이 강했다. 당시 해적 세력이 로마 정치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스파르타쿠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벌어진 일로 짐작할 수 있다. 기원전 72년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패퇴해 이탈리아 반도 끝 부분에 고립됐을 때 9만 명의 패잔병을 배로 탈출시키기 위해 그 지역의 해적 세력과 흥정을 했다. 거래가 성사됐으나 이행되지는 않았다. 반란군이 약속한 뱃삯보다 더 많은 돈을 크라수스가 해적에게 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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