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호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사라센 해적(下)

  •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 sukkyoon2004@hanmail.net

    입력2014-01-21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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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침내 기독교 세력이 해적 토벌에 나섰다. 교황 빅토르 3세는 1087년 해적에게 납치된 기독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해상십자군 전쟁’을 제창하고 유럽 각국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10년 전이었다.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카스바라 불리는 미로 구조로 설계된 도시.

    사라센 해적들은 위장전술로 다른 기독교 국가의 깃발을 내걸거나 약탈하려는 지역과 동맹관계에 있는 도시의 깃발을 내걸고 침입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깃발만 보고는 해적선인지 무역을 위해 드나드는 상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오늘날 ‘바다의 헌법’으로 불리는 ‘유엔해양법협약’에서는 외국 선박이 국기를 달지 않거나 허위로 달고 항행(航行)하면 해양 질서를 위협하는 중요한 위반사항으로 규정하고 정선해 조사할 수 있도록 한다.

    사라센 해적의 침입과 관련해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바다에서 오는 적은 바다에서 막으라.’ 이탈리아 남부 연안 주민들은 사라센 해적선이 항구 가까이 들어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 달아났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연안은 무방비 상태였기 때문에 해적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다.

    사라센의 위장 깃발과 약탈

    육지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외침에 시달리던 비잔틴 제국은 해적으로부터 이탈리아 남부 해안을 방어할 군사력도 없었다. 주민들로서는 해적선이 침입하면 빨리 달아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망루는 이렇게 달아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주었다. 망루에서 먼바다에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는 자가 해적선의 출현을 알리면 주민은 귀중품을 챙겨 내륙으로 깊숙이 도망거가나 해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할 곳에 재빨리 숨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라비아산(産) 말을 타고 마을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며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하는 해적에게 재산을 강탈당하고 아까운 목숨을 바쳐야 했다. 용케 죽지 않고 살아나더라도 강제로 납치돼 북아프리카의 해안도시로 끌려가 평생을 노잡이나 강제노역을 하면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해안의 주민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망루를 하나만 세우지 않았다. 해변의 망루에서 연기를 피우면 두 번째 망루에서 이것을 보고 내륙 쪽으로 소식을 전하며 연쇄적으로 침략자의 소식을 전했다. 해적의 습격이 심했던 시기에는 네 번째나 다섯 번째 망루가 세워진 곳에서 사람들이 숨어들어 살았다. 우리나라의 고려나 조선 시대에 변방으로부터 적이 침입하면 산봉우리에 설치된 봉수대에서 연기를 피워 수도에까지 긴급사항을 알리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그런데 해적의 습격이 줄어든 시기에는 해적의 침입으로부터 도망하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언제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기 위해서도 이 방식을 사용했다.



    사라센 해적의 집중 표적이 된 곳은 수도원과 교회였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까지를 중세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이 시기는 ‘암흑의 시대’ ‘종교의 시대’라 불린다. 중세는 기독교의 가치가 모든 가치에 우선되고 종교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던 시기였다.

    보르고와 카스바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샤를마뉴 대제.

    수도원은 교황의 사제들이 모여 집단적인 생활을 하는 곳으로 대부분 마을의 외곽에 자리 잡고 풍부한 재물과 영토를 소유해 해적의 표적이 됐다. 또한 교회는 달아난 주민의 피신처로 이용됐기 때문에 그곳을 습격하면 많은 주민을 한꺼번에 납치하고 재물을 약탈할 수 있었다. 돈이 많은 영주나 부잣집도 좋은 표적이 됐다.

    사라센 해적은 해안지방에서 점차 내륙 깊숙이 침입해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을 납치해 갔다. 해적선이 나타났을 때 달아나거나 피신하는 것은 일시적인 방책이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아예 해적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필사적인 삶의 방책이자 저항이었다. 주민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그곳에서도 가장 험준한 벼랑 위에 마을을 세우고 살았다. 중세에 들어와 지중해 연안 지방의 사람들이 해적으로부터 도망쳐 깊은 산속에 형성한 마을을 ‘보르고(Borgo)’라 불렀다.

    해안가 주민은 해적이 항해하기에 풍향이 적합한 여름철에는 산중으로 들어가 ‘보르고’에서 살고 계절이 바뀌면 산에서 나와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해안 지방에 사는 방식을 되풀이했다. 바다 사람들이 산중 생활을 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위험이 덜한 시기에 자신들의 생업 터전인 바다로 돌아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본의 아닌 이중생활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해안지역의 마을 단위에서는 일시적으로 가능한 일이었지만 도시라면 사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수천 명이 사는 도시 전체를 그대로 옮겨갈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현재 살고 있는 도시의 지형지물을 이용하거나 외부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구조물을 만들어 해적을 방어하거나 피할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 방어수단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바로 ‘카스바’라 불리는 대단히 복잡한 미로(迷路) 구조를 가진 도시를 만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말피 등 이탈리아 북부도시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편리성과 쾌적성 등의 기능적 이점을 강조하기보다는 오로지 생존을 위한 방편에만 주안점을 두었다. 방어와 생존이라는 처절한 목표가 최우선이었다. 구불구불한 형태의 교묘한 골목길로 형성된 구조에서는 해적이 침입하더라도 쉽게 목표물을 발견할 수 없음은 물론 길을 잃고 지체하는 해적에게 얼마간 저항도 하게 시간을 벌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여러 갈래의 길은 또한 해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도망자로 하여금 안전하게 피신할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줬다.

    신성로마 제국의 해적 퇴치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 남부해안에서 사라센 해적이 활개를 친 이유는 앞에서도 보았듯이 해상치안을 확보할 방어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남부는 랑고바르드 족과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외침에 시달리는 비잔틴 제국의 군사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해적이 마치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몇 개의 게르만족이 나누어 지배하던 갈리아 지방은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샤를마뉴’(Charlemagne·742∼814, 영어로는 찰스 대제, Charles the Great)에 의해 하나의 유럽으로 통일됐다. 유럽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400여 년간 여러 왕국이 지배하는 분열의 시기를 거쳐 샤를 대제에 의해 영국,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남부를 제외하고 엘베 강 이남에서 피레네 산맥에 이르는 전 유럽 지역이 샤를 대제의 프랑크 왕국에 의해 통일됐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오늘날 유럽연합(EU) 탄생의 기원을 샤를 대제의 서유럽 통일로 본다.

    샤를 대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유럽을 통일하고 800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까지 원정을 했다. 로마에 입성한 샤를 대제를 교황 레오 3세는 정중하게 맞이하면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신성(神聖)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씌워 주었다. 신성로마 제국의 탄생은 로마 교황과 비잔틴 제국의 관계, 샤를 대제와 교황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볼 수 있다.

    사라센 해적이 기독교의 본산이며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있는 로마 바로 앞에서까지 노략질을 해도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 황제는 속수무책이었다. 군사력을 갖지 못한 교황은 자위 차원에서 군대를 조직해 해적에 맞서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이런 와중에 726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우상숭배라고 하여‘성상(聖像·Icon) 철거령’을 내리고 로마의 교황에게도 성상을 모두 없애라고 하자 교황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비잔틴 황제를 파문시키는 것으로 맞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비잔틴 황제와 교황은 격하게 대립한다. 교황의 파문에 맞서 비잔틴 황제는 랑고바르드 족을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도록 했다. 직접적으로 군사력을 동원할 수 없는 교황으로서는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에 의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샤를마뉴 대제에게 기꺼이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왕관을 수여한 것은 이러한 전략의 결정판이었다. 한편 야만족 출신으로 거대 왕국을 건설한 샤를 대제는 ‘로마의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래서 ‘로마’라는 국호를 차용하게 된다. 아울러 기독교와의 일체성을 공표하기 위해 ‘신성’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받은 샤를 대제는 이슬람 세계로부터 기독교를 수호할 책임자의 지위를 갖게 됐다. 라인 강 이북에서 야만 생활을 하던 프랑크 족은 원래 해양활동과 거리가 먼 민족이었다. 그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두 개의 함대를 창설했다. 남프랑스 해안을 책임지는 ‘아키텐 함대’와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를 지키기 위한 ‘이탈리아 함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함대의 활약은 사라센 해적을 퇴치하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교황 레오는 샤를 대제에게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것에 대한 감사의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814년 샤를 대제가 죽은 뒤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사후 30년 만에 제국은 분열됐고 신성로마 제국의 영토는 그의 자식과 손자들에 의해 오늘날 이탈리아·프랑스·독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분할됐다. 이슬람 해적으로부터 지중해 연안 지역을 지켜주던 두 함대도 해산 시기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채 분해되고 말았다.

    서유럽은 다시 전란 시대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혼란의 시기에는 눈앞의 싸움이 급한 법이며 당장의 문제에 몰두하기마련이었다. 해상치안까지 신경 쓸 여지는 도무지 없었다. 지중해는 다시 숨죽이던 사라센 해적들이 활개 치는 무법과 공포의 바다로 되돌아갔다.

    해적 토벌의 선봉에 선 교황

    기독교적 시각에서 암흑의 시대이던 중세시대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유일한 지상의 수호자였다.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본거지인 로마까지 위협하는 상황에서 교황은 이교도의 침입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때로는 레오 4세와 같이 군사적 행동을 주도했다.

    비잔틴 제국의 서부 수도 라벤나의 대주교로 있다가 914년 즉위한 교황 요한 10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사라센 해적을 몰아내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기로 했다. 그는 먼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와 이탈리아 왕 베렝가르와 동맹을 맺었다. 이어 이슬람에 맞서 싸운다는 성전의 기치를 내걸고 자원병들을 모집했다. 교황이 직접 군사를 모집해 해적과 싸운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교황은 사라센 해적선이 드나드는 가릴리아노를 탈환하기 위해서는 해군 세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교황의 권위와 현실적 난제 해결을 명분으로 나폴리·아말피·가에타와 같은 해군력을 가진 공국들에 성전에 참여하라고 요청했다.

    사라센 해적을 물리치기 위한 ‘해상십자군 전쟁’이었다. 우리가 아는 십자군 전쟁은 이보다 훨씬 뒤인 1096년 ‘신이 그것을 바라고 계신다’는 구호 아래 기독교 세력이 결집해 1099년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것은 이교도의 통치 아래 있는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었다. 어쨌든 가릴리아노 탈환 작전은 성전의 깃발 아래 이슬람 세력의 점령지를 탈환하기 위해 기독교 세력이 모여 군사작전을 했다는 의미에서 십자군 전쟁의 출발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모인 군대를 이끌고 교황 요한 10세는 즉위 2년 후인 916년 사라센 해적이 점령한 가릴리아노를 탈환하러 진격한다. 그로부터 석 달 동안 이어진 전투에서 교황 요한 10세는 줄곧 진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칼을 든 교황’이었다. 전투 결과는 기독교 세력의 승리였다. 교황 요한 10세는 사라센 해적 퇴치에 큰 공을 세웠으나 자신의 정치적 행보는 불행했다. 928년 갈등관계에 있던 로마 귀족들에 의해 교황의 자리에서 쫓겨나 투옥됐고 얼마 뒤에 감옥에서 교살됐다.

    그 뒤 가릴리아노에서뿐 아니라 중부 이탈리아에서 남부 이탈리아에 걸친 티레니아의 바다에서도 사라센 해적선은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그들이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내부 사정상 한동안 해적질을 멈춘 것뿐이었다.

    기독교 세력은 모든 것이 끝난 것으로 착각하고 더는 방비나 재침범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라센 해적이 자국의 상선에 대한 공격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1년에 2만2000냥의 금화를 지불한다는 협정을 맺기까지 했다.

    적대세력이지만 주요 무역 상대

    이탈리아의 해양 공화국들은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북아프리카에 본거지를 두고서 수없이 지중해를 건너와 자신들의 마을을 파괴하고 생명과 재산을 약탈해 가는 사라센 해적은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 사람들에겐 언제나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서 사라센 해적은 북아프리카에 본거지를 두고 그곳을 지배하는 이슬람 세력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의 수장들과 해적질에서 얻는 수익에 대한 분배계약을 맺고 있었다.

    이런 적대적 관계에도 이탈리아 해양 도시공화국들은 한편으로는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과 깊은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다. 해상무역국인 도시공화국들에 지중해 건너편의 이슬람 세력은 이교도이자 적대세력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중요한 무역 상대였다. 이러한 이중적인 행태는 이슬람 세력의 성전에 맞서 기독교를 수호하고자 하는 교황의 처지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배교 행위였을지 모른다. 교황은 이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이유로 종종 수출금지령을 내리곤 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한 자연스러운 교역을 막을 방법은 그 자신의 권위와 별개로 어디에도 없었다.

    해양 도시공화국에 자국의 종교적 신념 및 가치를 지키는 것과 생존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들은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거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이뤄지는 국제관계와 비교해 보면 당시 그들의 이러한 행태가 특별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아무리 적대적인 국가 사이라도 드러나지 않게 교역이 이루어진다.

    교역으로 이득이 생기는 곳에 물품이 오가는 것은 어찌 보면 낮은 곳으로 물이 스며드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해양 도시공화국들이 북아프리카에 수출한 물품은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목재, 돛의 재료인 피륙, 갑옷, 공예품 등이 주종이었다. 북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사온 것은 밀과 올리브유·모피·대추야자였다. 이념과 주장은 생존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것이 여기에 들어맞는 말일 것이다.

    해상십자군의 승리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이슬람 사라센 해적이 지배한 시칠리아.

    통상관계가 확대되면서 해양 공화국들은 북아프리카의 주요 항구에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관(商館)을 설치하고 그곳에 오늘날 영사의 기원이 되는 ‘콘설(Consul)’이라 불리는 영사를 상주시켰다. 영사의 임무는 현지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보호하고, 교역을 개척하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이들 영사의 활동을 통해 기독교 세계에 충격적인 사실들이 알려지게 된다. 사라센 해적이 북아프리카로 끌고간 기독교인들이 ‘목욕장’이라 불리는 강제노역장에 수용돼 혹사당하는 참혹한 실상이었다. 끌려간 기독교인들은 납치되거나 해안으로 상륙해 약탈하던 해적들에게 붙잡혀간 서민이었다.

    강제노역장에 수용된 기독교인들의 비참한 실상에 대한 소식은 유럽 기독교 세력의 공분을 일으켰고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행동이 시작됐다. 그 선봉에 선 사람이 당시 교황 빅토르 3세였다. 그는 1087년 해양 공화국들을 대상으로 기독교인들을 구출하기 위한 이른바 ‘해상십자군 전쟁’을 제창하고 유럽 각국의 자발적인 동참을 호소했다.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10년 전이었다.

    교황의 호소에 제노바·아말피·피사는 참가를 결정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는 참가하지 않았다. 아마 베네치아의 불참은 지리적으로 해적의 공격이 잦았던 이탈리아 서남부의 해양 공화국들에 비해 아드리아 해 깊숙이 위치해 해적으로부터의 직접적인 피해가 적었던 것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1087년 해상십자군 규모는 전함 300척, 병력 3000명이었다. 당시 공화국들의 해군 세력을 고려할 때 이러한 숫자는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겉보기에는 납치된 기독교도 구출이 목적이었지만, 지금까지 이슬람 세력의 침입 앞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기독교 세력의 본격적인 반격이었던 것이다.

    해상십자군은 이슬람 세력의 본거지인 오늘날 튀니지의 카이루안 외항을 상륙 지점으로 삼았다. 기독교 세력의 원정을 미리 알고 대비하던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저항이 있었지만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십자군은 열세를 인정하면서 항복한 수장과는 강화협정을 맺고 수용소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구출했다.

    기독교 세력의 대반격 해상십자군의 해적 토벌
    김석균

    1965년 경남 하동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서울대 행정 대학원 석사, 미국 인디애나대 행정학 석사, 한양대 행정학 박사, 미국 듀크대 visiting scholar

    37회 행정고시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 해양경찰청 기획조정관, 해양경찰청 차장

    2013년 3월~제13대 해양경찰청장


    이와 별개로 제노바와 피사는 자국 선박의 중요 길목인 티레니아 해에서 안전한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남프랑스의 영주들과 연합해 해적 소탕 작전에 나선다. 목표는 마요르카 섬을 중심으로 한 발레아레스 제도의 해적. 주력군인 피사의 300여 척 군함과 4만 명의 병력을 포함한 연합군은 대대적인 소탕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마요르카 섬의 해적은 섬멸됐고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던 많은 기독교인이 구출됐다. 그러나 발레아레스 제도는 이후 해양 공화국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다시 해적의 소굴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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