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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의 ‘해적 이야기’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

  • 김석균 | 해양경찰청장 sukkyoon2004@hanmail.net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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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활약한 바르바리 해적은 선배 격인 사라센 해적보다 세력이 강하고 악행도 심했다. 유럽 열강은 이들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신생국 미국은 달랐다. 미 해군의 강력한 소탕 작전으로 바르바리 해적은 소멸 위기를 맞는데….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이킹 해적이 극성을 부리던 시대로부터 400~500년 후에 지중해,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바르바리(Barbary) 해적이 활개를 친다. 바르바리 해적은 오늘날의 리비아·튀니지·알제리·모로코의 해안을 이르는 바르바리 해안(Barbary Coast, 베르베르 해안이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16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300년 동안 전 유럽을 상대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던 이슬람 해적 집단이다.

Barbary라는 말은 그리스인들이 타민족을 야만인, 즉 Barbarian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나중에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유목민인 베르베르(Berber) 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바르바리 해적은 이슬람 세력이 북아프리카를 지배한 후 지중해를 건너와 이탈리아와 남부 유럽을 약탈하던 사라센 해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라센 해적이 8~13세기에 활약했다면 바르바리 해적은 이후 몇 세기 뒤 북아프리카 연안에서 활약했다.

유럽인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사라센 해적의 후예인 바르바리 해적은 규모와 악행에서 사라센 해적을 압도했다. 또한 바르바리 해적은 사라센 해적보다 이슬람의 색채가 한층 더 짙었고 활동 영역도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으로 확대됐다. 사라센 해적이 중세 지중해에서 극성을 부린 해적이었다면 바르바리 해적은 근세 대항해 시대에 지중해를 넘어 먼 대양까지 진출해 약탈을 일삼던 해적이었다.

사라센 해적의 후예

유럽 노예시장 주무르다 미 해군 강공(强攻)에 소멸

바르바리 해적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던 ‘돈 키호테’의 저자 세르반테스(오른쪽)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다니엘 디포.

유럽 지역 곳곳이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에 시달리고 수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소설 ‘돈 키오테(Don Quixote)’의 저자 세르반테스(Cervantes)도 바르바리 해적에게 포로로 잡힌 적이 있었고, 100년 후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의 저자 다니엘 디포(Daniel Defoe)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는 사실이다.

바르바리 해적이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보자. 십자군전쟁은 1303년 끝났지만 그 여파는 바다에서 계속됐다. 아랍인과 바르바리 해적이 바다에서 기독교도와 싸움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슬람교도의 배와 해안은 바르바리 해적의 약탈로부터 안전했지만 이른바 ‘신앙심이 없는 자’들에 대한 공격은 그들 해적질의 유일한 대의명분이었다. ‘신앙심이 없는’ 이교도에 대한 해적질은 ‘이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모든 민족은 죄인이며 따라서 그들을 발견하고 전쟁을 벌이며 포로로 잡아 노예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라는 코란의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바르바리 해적이 발호한 중요하고도 현실적인 원인은 북아프리카 바르바리 지역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막 지역으로 둘러싸인 북아프리카 해안지역은 생존을 위해서는 해상무역이 필수적이었지만 해상무역을 할 수 있는 기반이 전혀 없었다. 결국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나 물품을 구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해적질에서 얻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획득한 전리품을 사용하거나 팔고 포로를 노예로 활용하거나 몸값을 받았다. 또한 약탈을 면하려 바치는 공물도 주요한 수입원이었다.

이렇게 지속되던 바르바리 해적질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확대된 역사적 사건이 1492년 발생했다. 스페인이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와 800여 년 동안 머물던 이슬람 세력을 1492년 반도로부터 완전히 축출해버린 것이었다. 이베리아 반도 이슬람 세력의 최후의 거점이던 그라나다에서 무어인들이 자신들의 생활터전을 잃고 북아프리카로 쫓겨왔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무어인들이 기독교인과 그들의 선박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지하드(성전)’를 시작한 것이 바르바리 해적이 지중해와 대서양 해적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대양 진출

바르바리 해적은 먼 지역을 항해했던 바이킹처럼 지중해를 벗어나 대양까지 진출했다. 그들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갤리선 대신 범선을 띄우기 시작한 17세기부터였다. 노잡이가 노를 저어 나아가는 방식인 갤리선은 물살이 비교적 잔잔한 지중해를 항해하는 데 적합했다.

바이킹이 갤리선을 타고 ‘헤라클레스의 기둥(Pillars of Hercules)’이라 불리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먼 대양까지 모험을 하기도 했지만 노잡이의 힘으로만 대서양의 높은 파도와 거친 해류를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지만 범선이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범선은 거친 대양에 훨씬 잘 적응하게 해주었고 ‘측면대포(Broadside Gun)’까지 장착하면서 무력이 한층 강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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