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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지록위마(指鹿爲馬)’와 망국(亡國)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사욕에 찌든 ‘배신의 정치’를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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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 재촉한 정치 술수

천하가 통일된 뒤 불과 10여 년 만에 제국의 기반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팎으로 위기를 느낀 조고는 호해를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기회를 봐서 호해마저 제거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조고가 꾸민 사건이 바로 저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다. 당시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전한다.



조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으나 신하들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먼저 시험을 해보기로 하고는 사슴을 갖고 와서 2세(호해)에게 바치며 “말입니다”라고 했다. 2세는 웃으며 “승상이 잘못 안 것 아니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군”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좌우의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 일부는 아무 말이 없었고, 일부는 말이라 하며 조고의 비위를 맞췄고, 일부는 사슴이라 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들에게 몰래 죄를 씌워 처벌했다. 이후 신하들 모두가 조고를 겁냈다. (…) 함곡관 동쪽 대부분이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고, 제후들은 자신들의 군대를 이끌고 서쪽을 향해 밀려들었다. 패공이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관을 함락시킨 다음 사람을 보내 조고와 사사로이 접촉했다. 조고는 2세가 노하여 자신을 죽이지 않을까 겁이 나서 병을 핑계로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진시황본기’



‘지록위마’라는 정치적 술수를 통해 조정 대신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조고였지만, 점점 더 조여드는 봉기군의 위세에 불안했다. 사마천은 ‘지록위마’에 이어 봉기군들의 기세에 눌린 조고가 패공(유방)과 접촉해 모종의 협상을 벌였다고 기록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남아 있지 않다. 전후맥락으로 보아 조고 자신의 신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접촉이 아니었을까 추측할 뿐이다.

호해 즉위 3년(기원전 207년) 7월, 장한(章邯)과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의 주력군이 항우와 유방에게 투항했고 봉기군은 무관(武關)을 공격했다. 이에 조고는 자신의 죄가 탄로나 처벌을 받을까봐 조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사위 함양령 염락(閻樂)과 함께 모의해 호해가 망이궁(望夷宮)에 나간 틈을 타서 거짓으로 조서를 꾸미고 정변을 일으킨 뒤 궁을 포위하고 호해를 자살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호해의 형(부소로 추정)의 아들인 자영(子영)을 후임으로 앉혔다.

정통성 없는 정권의 국력 낭비

자영은 즉위하자마자 조고를 없앴으나 멸망의 길로 치닫기 시작한 진의 운명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영은 결국 함양으로 진격해온 유방에게 나라를 내놓고 항복한다. 기원전 206년, 통일제국 진나라 15년차였다.

최초의 통일제국이 환관 조고의 손에서 농락당하다가 불과 15년, 호해 즉위 5년 만에 무너져 내리는 과정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지록위마’ 장면은 어처구니없이 어설픈 ‘정치 쇼’로 보인다. 진시황의 유서까지 조작하고 치밀한 논리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사를 설득한 조고와 ‘지록위마’라는 유치한 정치 게임을 벌인 조고가 정말 같은 사람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순시 도중 사구(沙丘)에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통일제국의 운명이 느닷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지척에서 진시황을 모시던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비밀에 부친 채 비밀공작에 착수했다. 조고는 호해와 이사를 설득해 유서를 조작했다. 대권 장악에 걸림돌이 될 태자 부소와 군부의 명망가 몽염에게 자살을 명하는 공문을 띄우고, 서둘러 함양으로 돌아와 진시황의 죽음을 알렸으며, 작은아들 호해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공개했다. 이렇게 해서 통일제국의 전권은 일단 호해, 조고, 이사 세 사람의 수중에 들어갔다.

쿠데타는 성공한 듯했지만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우선 부소와 몽염을 죽이고 호해를 즉위케 하라는 진시황의 유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의혹이 불거지는 것을 막기 위해 호해와 조고는 진시황 시절의 대신과 혈족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해 입을 막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에 대한 억압은 말할 나위도 없다. 진시황 사후 중단된 아방궁 축조를 재개한 것도 이런 내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려 보려는 졸렬한 시도였다. 국력 낭비가 초래된 것은 물론이다. 이는 정권의 정통성이 의심을 받으면 흔히 나타나는 반응이었고, 이에 따라 호해 정권은 더 큰 의심을 사게 됐다.

욕심의 크기, 권력의 크기

즉위 이듬해부터 터지기 시작한 각지의 봉기군을 대처할 능력도 문제였다. 진승의 봉기를 진압하고 항량(項梁, 항우(項羽)의 숙부)을 정도(定陶) 전투에서 사살하는 등 제국의 군대는 여전히 막강했다. 하지만 명망 높은 장수를 여럿 잃은 진나라 군대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호해와 조고가 이 동요를 수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강압적인 명령에만 의존하다보니 결국 군부가 제국의 통제권에서 이탈하기 시작했다.

통일제국의 시스템과 정책 입안자였던 당대 최고의 경륜가 이사와의 관계를 적절하게 설정하지 못하는 우도 범했다. 조고는 명망가 몽염과의 경쟁관계를 자극해 이사를 쿠데타에 동참시키기는 했지만, 이사의 경륜을 시기하고 질투한 나머지 꼭두각시 호해를 이용해 이사를 권력의 중심부에서 밀어냈다. 부귀영화에 목을 맨 출세 지상주의자 이사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호해에게 여러 차례 문제점을 지적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조고에 의해 차단당했다. 이런 이사를 조고가 살려둘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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