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입력2007-05-03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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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년 6월28일, 압록강 건넌 지 나흘 만에 연암(燕岩)의 마두는 천산(千山)산맥을 향해 달렸다. 통원보에서 장맛비에 발이 묶인 동안에도 연암의 눈과 귀는 청나라의 문물을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고, 연산관에서 마운령·청석령·낭자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 고지를 넘어 마침내 일망무제 1200리 요동평원과 맞닥뜨렸을 때의 감격은 울음을 자극할 만했다. 허세욱 교수는 2006년 11월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펑청(鳳城)시에서 랴오양(遼陽)까지 주로 지방버스를 타고 연암의 뒤를 밟았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허세욱 교수가 뒤쫓을 연암 박지원의 연행도.

    연암은 세상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산맥에 막히고 강에 막히고 제왕과 사대(事大)에 가린 반도를 벗어나 대평원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마운령, 청석령을 넘어 요동평원의 망망대해에서 요양(현대 표기법으론 ‘랴오양’)땅 ‘백탑’이라는 등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뿐만 아니다. 도시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실학의 번영을 누리는 도시 성경(盛京)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거기에는 우리 겨레의 영욕(榮辱)이 서려 있다.

    1780년 6월28일부터 7월9일까지 연암의 의식세계 지축을 흔들어놓은 것은 다름 아닌 요양의 백탑, 그 현신(現身)이었다. 그 표현조차 백탑의 의인화였다. “白塔現身謁矣”, 곧 “백탑이 몸을 드러내면서 알현하고 있습니다”이다. 그것은 연암이 7월8일, 정사(正使)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한 10여 리를 가서 막 산기슭을 돌아설 때, 마두인 태복이가 땅에 머리를 조아리고 정 진사와 연암께 아뢰는 말이었다. 한낱 하인의 말치고 시적이다. 백탑은 연암에게는 물론 요동평원을 오가는 모든 조선 사절에게 등대 같은 존재였다. 연암의 그날 일기에 따르면 연암은 당장 말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다가 손을 이마에 대고 감격적인 한마디를 남겼다.

    “好哭場, 可以哭矣!”(울 만한 자리로구나! 한바탕 울어보자!)

    첫째는 통원보(通遠堡)에서 연산관, 연산관에서 마운령·청석령·낭자산에 이르기까지 이틀이나 해발 1000m 고지를 넘으면서 고초를 겪다가 이제 비로소 일망무제 1200리 요동평원을 만난 감격이었다. 박목월이 ‘나그네’에서 읊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 같은 벌판은 어림없고, 이육사가 ‘광야’에서 ‘까마득한 날에/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하는 벌판이 지금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연암은 여기서 난생 처음 하늘과 땅이 맞붙어 우주의 공간을 나눌 수 없게 장엄한 광경을 보고 감격한 것이다.



    감격의 순간이요, 해방의 현장

    둘째, 연암은 자기의 위치에서 눈물과 정(情), 진(眞)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다시 간추려보았다. 당시 조선의 산악적인 지세와 국제적인 폐쇄성에서 막 탈출하는 격정은 눈물을 자아내게 했고, 눈물은 참과 정의 발로임을 강조하면서도 눈물은 단지 슬픔의 소산이 아니라 칠정(七情)이 사무칠 때면 울 수 있다고 했다. 그 지정(至情)에 이르렀을 때 웃고 우는 구분조차 무의미하다는 ‘칠정개곡(七情開哭)’론을 개진했음은 주목할 만하다. 연암은 울음의 자연발로, 곧 울음은 천둥소리라고 하면서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태 밖에서 이 천지의 광명을 처음으로 만날 때, 그 어둡고 비좁았던 어머니의 태반을 상기했을지 모른다. 동시에 조선반도를 뒤돌아보았을지도 모른다.

    셋째로 연암은 요동벌에서 산해관까지 1200리에 뻗은 창망한 들판, 곧 지평선의 시간적·공간적 영원의 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한 가지 낙으로 영입한 것이다. 그는 7월8일자 일기에 그러한 지점을 제시해놓았다. 금강산 비로봉 꼭대기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곳, 황해도 장연의 금모래톱, 그리고 요동벌에서 바라보는 산해관…. 하늘 끝과 땅 끝이 풀로 붙인 듯 분간할 수 없는 곳, 천만년의 비바람이 만들어낸 창망이라 했다. 창망은 바로 영원한 시공(時空)의 얼굴이었다.

    이러한 포인트는 ‘열하일기’ 군데군데에 산재한다. 7월15일 도착한 북진묘(北鎭廟)에서 다시 요동벌을 보고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끝도 가도 없어 해와 달이 지고 뜨고 비바람이 불고 개는 변화가 모두 모두 이 벌에서 벌어진다’고 전제하면서 강남이고 산동이고 세상 모든 땅덩이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 있겠지만, 다만 시력이 미치지 못한 것만 안타깝다 했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중국 랴오양성의 성산산성 서쪽 문에서 바라본 풍경.

    하기야 연암은 7월20일자 일기에 29세 때 지은 시 ‘총석정에서 해돋이를 보며’를 수록하면서 ‘창망한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는 곳은 하늘인지 땅인지 맞닿아 분간할 수 없었노라’고 그 무한성을 찬미했다. 연암의 명시로 꼽히는 ‘요동벌 새벽길(遼野曉行)’이 바로 이때에 씌었는데, 그 공간의 무애성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遼野何時盡, 一旬不見山.

    曉星飛馬首, 朝日出田間.

    (요동벌은 언제 끝날까?

    열흘을 가도 산을 못 보네.

    말 머리에 샛별이 날리고

    밭두렁에서 아침 해가 돋는다.)

    마침내 연암에게 요동벌은 감격의 순간이요, 해방의 현장이다. 지정(至情)과 무한의 미를 발견하는 철학적·예술적 도장이다. 그 현장, 그 도장의 성황당이요 등대가 요양의 백탑이다. 연암은 7월9일자 일기 끝에 따로 ‘요동백탑기’를 덧붙였는데 거기서도 백탑은 천리 망망 요동 대야를 장애 없이 굽어보느라 그 시야가 전체 요동벌 3분의 1에 미칠 정도라 했다. 그리고 연암은 그 글에서 백탑의 신상명세를 이렇게 밝혔다. 8면체, 13층, 71길 높이의 탑신, 탑 꼭대기의 쇠북 3개와 층계의 추녀마다 물통만한 풍경이 달린 것 등을 특기(特記)했다.

    월금 뜯는 장님이 부러워라

    요동벌에서 연암의 발견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신선한 것은 실학의 바람이 한창 일고 있는 청나라의 문화 현장, 그리고 처음으로 만나는 중국인의 인격과 풍속이었다. 실학의 현장에서 연암은 경악을 실토했다. 그들이 번지레하게 번영하고 시끌벅적하게 풍요를 누리는 것을 보고 차라리 도로 서울로 가고 싶다 했다. 그러면서 비단 주머니를 어깨에 걸친 채 월금(月琴)을 뜯으며 거리를 지나는 장님을 부러워했다. ‘저들은 세상을 한 빛으로 보는 평등의 눈을 갖지 않았는가’하고. 그만큼 풀이 죽고 그만큼 속이 뒤틀렸던 것이다.

    연암은 중국출입국관리소 격인 책문(柵門)을 넘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시 조선에선 빨래터를 방불케 널찍하고 펑퍼짐한 우물에서 아낙네들이 세수대야만한 바가지로 물을 퍼 쓰고 있었는데, 만주 사람들은 벽돌로 쌓은 우물정(井)자 모양의 우물에 먼지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덮개를 씌운 데다, 도르래를 달아 쇠를 두른 물통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우리는 머리에 똬리를 얹고 물동이를 이거나 지게에 짊고 비탈길을 비척거리는데, 만주 사람들은 팔뚝만한 몽둥이를 다듬어서 그 양쪽 끝에 물통을 거는 편담(扁擔)으로 좁은 길을 출렁거리며 속도를 낼지언정 자빠지지 않았다. 우리가 미투리나 짚신을 신는 데 반해 저들은 베로 만든 검은 신을 신었음을 지적했다. 이것들이 소소한 이용후생의 방법이라면 큰 것은 벽돌 굽기, 회 이기기, 기와 덮기, 기와 굽기, 구들 놓기, 굴뚝 세우기 등 더욱 후생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발전했다.

    연암은 섣부른 목수 뺨치게 흙일에 밝았다. 한양 땅 새문안서 자란 반남 박씨, 떵떵거리던 양반집 막내아들답지 않게. 당시 조선은 토목을 주요 소재로 대문, 담, 행랑, 몸채, 사랑채를 널찍널찍 따로따로 지었던 반면, 청나라 사람들은 우선 수백보의 자리를 준비해 측량기와 나침반으로 그 고저와 방위를 잡고, 거기에 돌을 깔고 다듬어서 기초를 다진 뒤, 한 일자로 집을 짓되 담을 따로 쌓지 않고 집의 좌우와 후면은 서까래 없이 벽돌로 건축함으로써 실용성과 안전성을 최대화했다. 연암은 이 점을 높이 샀다. 회를 이길 때도 굵은 모래나 진흙을 피하고, 검고 부드러운 흙을 회와 함께 이김으로써 건축물의 색채와 강도를 도모한다고 했다.

    조선에서 기와를 일 때 진흙을 잔뜩 올리면서 바람벽을 허술하게 만든지라 지붕이 무겁고 기둥이 휘어버리는 반면, 청나라 사람들은 벽돌로 벽을 쌓은 데다 진흙을 바르지 않고 곧장 기와를 올림으로써 기초는 튼튼히, 바람벽은 단단히, 지붕은 가벼이, 그런 안전한 구도를 조성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벽돌이었다. 벽돌은 건축의 핵심이었다. 한 집의 담과 벽을 거의 벽돌로 충당했다. 기둥은 벽 속으로 들어갔고 창이나 문의 틀조차 벽돌이었다. 그래서 화재와 도둑, 그리고 동식물의 침습을 막아주는 일종의 성벽 구실을 했다.

    ‘벽돌 만 장은 돌보다 단단하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중국 벽돌집. 연암은 실용성과 안전성을 높인 벽돌집을 부러워했다.

    벽돌의 장점은 그뿐 아니었다. 조선은 성을 쌓을 때도 돌을 쓰는데 그 견고성은 물론 공사나 운반의 편의를 보아서도 벽돌만 못하다고 주장했다. 연암은 ‘벽돌 한 장은 돌보다 단단하지 않지만 벽돌 만 장은 돌보다 단단하다’는 물리적 방정식까지 제시했다.

    연암은 벽돌을 굽는 가마의 구조와 연료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피력했다. 우리나라의 가마가 뉘어놓은 길고 낮은 아궁이이고, 한 나라의 재목인 솔을 때는 낭비적이고 비효과적인 데 반해 청나라의 가마는 벽돌로 쌓고 석회로 봉한 데다 가마 위를 움푹 파서 물을 부을 수 있거니와 만주지방에 지천으로 자라는 수수깡을 땔감으로 쓸 수 있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수수깡 300줌이면 한 가마를 구울 수 있는데, 벽돌이 8000개가 나온다’고 했다.

    연암의 이용후생적인 관찰이나 연구는 구들이나 굴뚝 놓는 법에까지 치밀했다. 하긴 그랬다. 제아무리 보기 좋은 집이라도 외풍이 센 냉돌이거나 너구리 잡을 만큼 꾸역꾸역 연기를 피우는 굴뚝이면 평생 애물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구들은 겨울이면 코끝에 고드름이 달릴 정도로 추웠다.

    연암은 조선 구들의 여섯 가지 단점을 지적했다. 첫째 구들을 만드는 진흙과 돌이 고르지 않은 데다 쉽게 마르고 허물어짐이요, 둘째는 흙과 돌로 메웠기에 편평하지 못함이요, 셋째는 불고래가 높아서 불길이 호응치 못함이요, 넷째는 벽이 성기고 얇아서 바람이 새고 불이 내침이요, 다섯째 불목이 좁아서 불길이 빨려들지 못함이요, 여섯째 방을 말리는 데 땔나무가 많이 든다는 것이다. 모두 과학의 낙후에 따른 비효율성과 비경제성을 지적하고 있다.

    굴뚝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선의 굴뚝은 기껏해야 싸리로 굴레를 만들거나 나무판자로 통을 만들고 거기다 종이나 흙을 발랐다. 굴뚝에 틈이 생기거나 벌어지면 연기가 새기 일쑤요, 바람이 세면 연기가 홰를 치게 마련이었다.

    훈훈하고 넉넉한 서민적 흉금

    중국의 구들은 먼저 한 자 높이의 바닥을 반반하게 다진 뒤 벽돌로 바둑돌 놓듯 굄돌을 놓고 벽돌을 가지런히 깔았고 불꽃이 세차게 들도록 고래와 불목을 연결시킨 뒤 불길이 재빠르게 굴뚝으로 빠지도록 했다. 굴뚝 또한 큰 항아리만큼 땅을 파서 돌로 탑을 쌓되 그 높이는 지붕과 평형을 맞추었다. 연기를 끌고 빨아내는 데 힘을 내도록 설계한 것이다.

    연암의 이처럼 실학적인 관찰은 단순히 이용후생이라는 유물적인 목적만은 아니었다. 그가 책문에 들어와서 잘사는 민가를 구경할 때 청나라 기와 잇기를 유심히 보았다. 그중에도 지붕은 다만 기와만을 이어 그 중량을 줄이는 반면 바람벽은 단단히, 그리고 바닥은 깊고 무겁게 건조한 걸 놓치지 않았다. 그때 그의 조국이 생각났다. 진흙을 잔뜩 올려 무겁고, 바람벽은 기댈 데 없어 헐렁한 데다 바닥이 허전해 기둥이 휘기 쉬울 뿐 아니라 벽에 구멍이 뚫리면서 비가 새고 쥐나 새가 들락거리는, 말하자면 상후하박(上厚下薄) 현상과 하층구조의 빈약성을 넌지시 비꼬았다.

    그뿐만 아니다. 연암은 통원보에서 꼬리와 털이 모조리 뽑힌 닭이 뻘건 살덩이를 드러 낸 채 절름거리고 다니는 꼴을 보았다. 마치 털을 족집게로 뽑아버린 듯 흉물스러운 꼴이었는데 그때 청나라에선 닭을 빨리 키우고 전염병을 예방키 위해 그렇게 몰인정했다고 한다. 연암은 ‘차마 볼 수 없노라’ 했다.

    한 가지만 더 들겠다. 구들을 놓고 굴뚝을 세우는 현장을 보았을 때, 역시 추위에 떨던 조국이 떠올랐던 게다. 연암은 어서 구들 놓는 방법을 배워서 ‘삼동(三冬)의 그 고생을 면했으면 좋겠노라’고 했다.

    여기서 연암의 널찍한 가슴을 읽을 수 있었다. 이용후생의 물질적 욕구 못지않게 춘풍훈훈한 서민적 흉금이 넉넉했다. 더구나 이 같은 이용후생에 따른 발견이나 관찰은 연암이 중국에 들어온 초입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과 책문, 봉황성(지금의 펑청)과 통원보에서였다. 특히 엿새나 장마에 갇혀 연행(燕行)을 못했던 통원보 그 자그마한 두메에서였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중국 만리장성 산해관.

    연암은 실학적 관심 외에 중국인과 중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다. 그 창망한 요동벌을 마상(馬上)으로 달리면서 조선, 조선 사람과 다른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무릇 새로운 것이면 이리처럼 호랑이처럼 통째로 삼키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그것들은 모두 소중했다. 모두가 230여 년 전의 신선한 스케치요, 사실의 앵글이었다. 청나라의 정치·문화·경제·풍속 등을 연구하는 역사 자료였다. 그렇다면 ‘열하일기’는 한국의 문학 경전일 뿐 아니라 중국 청대 연구를 위한 원시 자료의 출토(出土)랄 수 있겠다.

    시간차 뛰어넘는 奇聞異俗

    연암의 중국 견문은 필자에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227년 전, 난생 처음 외국을 간 연암의 눈에 비친 중국은 어땠을까? 뚜껑을 열고 보니 그야말로 경이였다. 연암의 눈에 비친 기문이속(奇聞異俗)과 내가 47년 전 중국 대만 유학길에서 만난 기문이속이 거의 닮은꼴이었다. 그러니까 비록 170년이란 시간차가 있지만 중국문화의 토양 속에 살아 있는 그 체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연암이 도강한 지 사흘째, 책문 안에서의 일이다. 거리의 주막집, 짙은 버들에 푸른 주기(酒旗)가 펄럭이는데 탁자 위로는 한 냥에서 열 냥까지의 술잔이 즐비했다. 어떻게 술을 청하느냐 물으니 술의 무게를 결정하고 몇 냥 술을 청하면 된다고 했다. 요구하는 무게에 따라 그 술잔에 술을 따라주는 것이었다. 우리가 한 병 두 병 하는 수량이나 한 되 두 되하는 분량으로 거래하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는 양(量)의 표준으로 다른 하나는 형(衡)의 표준으로 통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중국 어디를 가나 술집에선 “몇 냥을 먹겠냐?”고 묻는다. 하긴 술만 그런 게 아니다. 수박도 잘라서 저울에 달고, 꽁치 한 마리도 토막을 내서 다시 저울에 슬쩍 올린다.

    연암이 봉황성에서 송참(松站)으로 이동 중인데 노상에서 포개(鋪蓋), 곧 이불을 똘똘 말아 어깨에 멘 행인을 보았다. 나그네면 누구나 그랬노라 했다. 이불을 메지 않을 경우 주막집에서 재워주질 않았고 심지어 불량배로 치부됐다고 했다. 최근 50년 동안 우리나라나 대만에선 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중국 대륙의 기차역이나 버스 터미널에선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대체로 빈곤한 유민(流民)이나 무전 여행자로 보였다. ‘서유기’같은 소설 속에는 떠도는 스님의 행장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넓은 땅 기약 없는 방랑을 거기 포개에 놓고 번지 없는 주막을 떠돌았던 모양이다.

    ‘漢族의 자색은 滿族보다 못하고…’

    이번에는 통원보에서였다. 민박집 옆방에서 때마침 밥을 먹고 있는 처녀를 목격한 것이다. 연암은 그 동작을 유심히 스케치했다. 하얀 살결에 억센 얼굴의 처녀가 퍼런 질그릇에 수수밥을 수북이 담더니만 쇠양푼에 떠온 물을 흠뻑 붓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글쎄 천연덕스럽게 젓가락으로 밥을 먹더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또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 사람은 식사할 때 밥공기를 들어 입에 댄 채 젓가락으로 밥알을 쓸어넣듯 날렵하게 진행한다. 그것도 궁벽한 시골이나 가난한 도시 달동네에선 마당이나 골목을 가리지 않는다. 더러는 서서, 더러는 쭈그려 앉아서도 먹는다. 심지어 오며가며 먹는다. 우리들이 숟가락과 젓가락의 구실을 구별하면서 밥그릇을 고정한 채 가만히 앉아서 식사를 고집하는 습속과 대조적이다.

    이 밖에 연암의 견문을 몇 가지 더 살펴보겠다. 봉황성 어느 상점 앞을 지나다가 금으로 만든 ‘當’자의 패방을 보았는데 그것은 지금도 중국 도처에서 만날 수 있는 전당포 간판이었다. 지금은 물론 금으로 만들지 않겠지만 꾀죄죄한 골목 으슥한 층루 한쪽 구석에 걸린 ‘當’자는 왠지 수백년 아니 수천년 가난뱅이 얘기의 화두인 듯 가물거리고 있었다.

    또 하나, 연암이 송참으로 이동하는 노변에서 아까 포개를 멘 나그네를 보기 직전에 만났던 무덤 이야기다. 그 봉분이 뾰족하고 떼를 입히지 않은 흙두덩이라고 했다. 정말 우연일지 모르겠으나 필자도 그런 봉분을 중국의 강남, 강북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다. 중국이 신 중국정부를 수립한 뒤 그들의 의례준칙에 따라 매장을 불허함에도 가는 곳마다 새 무덤을 만나지만 230여 년 전 연암이 보았던 꼭 그대로였다. 까무잡잡한 흙이나 누런 흙을 마치 팽이를 거꾸로 놓은 듯 쌓은 삼각형 분묘. 왜 떼를 입히지 않았을까? 왜 꼭지를 그렇게 뾰족하게 했을까? 유체를 모시지 않는 가묘일지라도 반원형의 분묘에다 푸른 잔디 청청하게 길러놓은 우리의 분묘와 사뭇 달라서다.

    연암은 황하장(黃河庄)을 지나 통원보로 가는 도중 희한한 정경을 보았다. 곰살맞아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뉘 집에선가 처마 끝에 새장을 걸고 이상한 새를 기르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옥수숫대로 기기묘묘하게 작은 누각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풀벌레 한 마리를 기르면서 그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정이 바쁜 조선 나그네 눈에 청인의 양충(養蟲)이 보인 것도 흔한 일이 아니지만 중국인의 세공(細工)문화 그 단면이 엿보였다. 아조(牙雕) 같은 조각이나 화투(花鬪) 같은 놀이가 그것을 방증했다. 그래선지 지금도 중국 도처에서 새장을 들고 공원으로 아침 산보 가는 중국인을 흔히 볼 수 있다.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중국 선양(瀋陽)과 펑청의 최근 모습(위에서부터).

    연암도 어쩔 수 없는 사내였다. 통원보에서 비에 갇혔을 때 옆방 만주 아가씨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 적이 있지만 요양을 떠나던 날, 처음으로 한족(漢族) 여인을 만났다. 호기심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한족 여인의 전족과 전족에 싣는 비단신 궁혜(弓鞋)를 보았는가 하면 그 김에 한족과 만주족 여인네에 대한 품평까지 늘어놓았다. 연암 말씀이 한족의 자색은 만족보다 못하고, 만족 여자 중에는 화용월태(花容月態)가 많노라고. 필자는 이 대목에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양반이 남방 한족의 ‘초요섬세장중경(楚腰纖細掌中輕)’, 곧 손바닥에서도 놀 만큼 가느다란 초나라 여인의 허리를 못 본 모양이다.

    연암의 견문은 이 밖에도 많지만 이만 접겠다. 중국 체험 반세기가 넘은 필자는 연암의 이 글을 읽는 동안 세 번 놀랐다. 첫째, 연암의 눈에 비친 술을 사고 파는 형태, 행인의 포개, 뾰족한 흙무덤, 양충양조(養蟲養鳥), 전족, 만녀(滿女)의 화용 등은 비록 만주족·한족을 포함한 중국인 생활의 일말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들이 동방의 우리나라에 비해서 기문이속일 수 있어서다. 둘째, 저 북녘 만주로부터 남쪽 광동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공간임에도 좋고 나쁘고 간에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셋째, 중국이 19세기부터 상전벽해에 비하리만큼 격동의 시대에 요동을 쳤음에도 오늘 이때까지 그 문화 그 풍속의 연속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실사구시적 사안(史眼)

    근·현대 학자들의 연암에 대한 평가가 일색은 아니었다. 혹자는 연암을 사대주의자, 지나치게 존명경청(尊明輕淸)을 반대하는 실사구시자, 끝내는 ‘소중화(小中華)’주의자로 매도했지만, 연암은 ‘열하일기’의 시작에서부터 청인을 보면 ‘되놈(胡人)’이라 서슴없이 하칭하는 민족 자존심을 보였다. 우리나라 사절과 그 수행들이 청인들에게 얼마나 자주 ‘되놈’이라 욕을 했기에 청인들은 그 뜻을 모른 채 ‘되놈’이 자기들을 지칭하는 말인 줄 알았을까. 연암 일행이 아직 통원보에 머물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사절의 숙소를 순찰하던 갑군(甲軍)에게 조선의 하인들이 수하를 묻자 갑군 한 사람의 대답인즉 “소인은 도이노음이요(都爾老音伊吾)” 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되놈’을 이두식(吏讀式) 중국어로 기음한 것일 뿐, 그 글자 본유의 뜻은 전연 없다.

    연암은 열하로 가는 장장 3000리의 산이면 산, 강이면 강마다 얽힌 겨레의 발자취를 한시도 놓친 일이 없다. 역사의 기술은 기술대로, 민간의 풍설은 풍설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벌써 주인이 바뀐 타국의 영토에서 결코 충동적이지 않았다. 사학자가 아니면서도 객관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사안(史眼)을 냉철하게 견지했다.

    그가 책문을 지나자 봉황산, 요양, 심양… 그 땅 그 길에 우리 겨레의 발자국이 박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바로 연암의 사랑과 고뇌가 이곳에 서려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한 나그네가 혼자 그 뒤를 밟고 있지만,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 왜곡, 그러한 무거운 압력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책문을 지나자 보이는 봉황산, 거기 3리 둘레의 성벽을 두고 안시성 유적(遺跡)이라고 하는 설에 대해 연암은 그것이 양만춘(楊萬春)이 장기 회전 끝에 당나라 대군을 격퇴시킨 안시성이 아니라고 했다. 지세로 보아 험악한 데다 둘레가 좁아 대군을 주둔시킬 만한 전략지가 아니며, 고구려 때의 작은 보루에 지나지 않을 거라 했다.

    그리고 고구려·조선의 영토와 한사군·패수·평양의 연혁 지리에 대한 이설을 열거하면서 고뇌에 찬 고증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 설법은 매우 실사구시적이라 할 수 있다. 요양에 이르러 썼던 ‘구요동기(舊遼東記)’에선 요동 옛 성이 수당(隋唐)시대에는 고구려에 속했음을 명쾌히 밝혔고, ‘요동백탑기’에선 요양의 백탑은 당나라의 울지경덕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벌할 때 세운 탑이라는 전설을 올리기도 했다. 요양으로부터 110리나 북상한 심양(瀋陽)에선 비록 병자호란 때 우리의 두 왕자가 인질로 잡힌 비운의 땅이지만, 연암은 뚜렷한 목소리로 “심양은 본시 조선땅이다. 한사군 때 낙랑의 도읍이란 말이 있으나 위·수·당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고 밝힌 바 있다.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필자는 2006년 11월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에 걸쳐 펑청(鳳城)시에서 랴오양(遼陽)까지 주로 지방버스를 타고 연암이 갔던 길 그대로를 따랐다. 혼자였으나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가고픈 대로 가는 게 아니었다. 연암을 따라가는 길이다. 혼자 주막집에 가도 혼자가 아니었다. 연암이 생각했던 그 순간들에 나도 함몰 중이었다.

    펑청에선 다행히 현지 문인의 안내로 봉황산을 승용차로 올랐다. 조양사(朝陽寺)에 당도했다. 초겨울임에도 안개가 겨우 한 치 앞의 코를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아침에 책문, 그러니까 지금의 변문진(邊門鎭)에서 멀리 보이던 봉황산 동남쪽 바위들이 성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거기쯤에 필시 안시성 유적이라 하는 성가퀴가 있을 텐데.

    발길을 돌려 북상했다. 통원보까지 두 시간쯤 논스톱 했다. 비산비야의 땅에 작은 개울이 많았다. 가다가 작은 마을 송참을 만났다. 연암은 6월28일 낮, 강(康)씨라는 사람의 잘사는 민가에서 점심을 먹고, 이 마을에서 노숙했다. 그 마을 어귀에 성냥갑 같은 작은 간이역-조리촌(曺里村)이 잠자코 서 있었다. 필자는 왠지 그이가 노숙했다는 곳을 만나면 울렁거렸다. 필자는 호텔서만 자는데. 연암이 뾰족한 흙무덤을 만난 곳도, 포개를 멘 나그네를 본 곳도 모두 이쯤에서였다.

    백탑을 세 번이나 돌아보다

    송참에서 삼가하(三家河), 금가하(金家河)를 건너 25km를 달려 통원보에 다다랐다. 소읍이었다. 그래도 그 이름처럼 먼 곳으로 교통하는 곳, 당나라 때부터 고을이 있었다고 한다. 염소 세 마리의 동상을 고을의 상징으로 세워놓았다. 연암이 장마에 발이 묶여 엿새나 갇혀 있었던 곳이다. 장마 덕분에 투전도 치고, 벽돌 가마·서당방·구들·굴뚝을 관찰할 수 있었다. 청인들의 신행(新行) 행렬도 구경했다.

    7월6일, 마침내 연암이 통원보를 떠났다. 하인 30여 명이 알몸으로 가마를 메고 물살에 밀리면서 가까스로 건넜다. 초하구(草河口)에서 점심을 들고 연산관(連山關)에서 또 한밤을 묵었다. 연산관은 벌써 산골, 나는 고속화한 단심(丹沈) 고속도로를 타지 않고 마운령(摩雲嶺) 해발 1000m를 가로질렀다. 버스가 헐떡거리며 고개를 넘었지만 엷은 안개를 둘러쓰느라 ‘백탑이 몸을 드러내면서 알현한다’는 그 감격과 장관은 날리고 말았다.

    첩첩산중을 넘더니만 군데군데 댐을 지나 밤중에야 요양에 도착했다. 정거장에서 한참을 걸어 여관을 정하고, 한숨 돌리려 커튼을 젖혔다. 뜻밖에도 손끝에 잡힐 만큼 바로 지척에 백탑이 우뚝 서 있었다. 세상에 이런 횡재가…. 뒤척거리다 선잠을 잤다. 먼동이 틀 때 여관 문을 열었다. 길을 건너자 백탑이었다. 필자는 요동벌 우리 사절들의 등대였던 백탑을 세 번이나 돌았다. 연암이 227년 전에 보았던 백탑의 신상명세서는 변함이 없었다. 8면 13층에 71길, 그리고 탑 꼭대기에 쇠북 3개와 층계마다 추녀 끝에 물통만한 풍경.

    “천이백리 요동벌 마주하니 한바탕 울고 싶어라”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1961년 중국시단 데뷔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연암은 유독 요양에서 묵었던 곳을 밝혔다. 요양 영수사(映水寺)라고. 필자는 요양시청 시지(市誌) 사무실에 가서 영수사를 물었다. 시청 직원은 ‘映水寺’가 아니라 ‘迎水寺’라고 했다. 요양역에서 동북쪽 약 10km 지점을 향해 필자는 택시를 타고 달렸다. 허허벌판 속에 동경릉향(東京陵鄕) 실험초등학교가 있었다. 휑한 운동장에 한참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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