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서울 광화문광장

소음과 차와 국가상징물에 갇힌‘통제의 섬’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9-11-04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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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우로 차량이 매연을 뿜으며 쏜살같이 달리고 거대한 국가 상징물이 압도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조형물 사이를 걷거나 혹은 피하면서, 때로는 계단에 앉아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서울시의 홍보영상을 바라보면서, 과연 연인들은 사랑을 나누고 시민들은 사색할 수 있을까.
    서울 광화문광장
    우리는 지금 광장으로 간다. 어디로? 광장!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광장이 있는가? 광장으로 가는 길은 어디인가? 광화문광장? 그곳이 광장인가? 아무튼, 그런 질문들을 짊어지고, 지금 우리는 광장으로 나간다.

    광장이라는 공간 개념은 100여 년 전의 한반도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이 한반도의 오랜 농업기반 시스템은 광장이라는 도심형 공간을 조성하지 않았다. 우물가나 마당이나 장터가 광장의 기능을 대신하였고 옛 왕조 시절의 한양이라고 해도 오늘날 손쉽게 떠올리게 되는 광장의 형식에 걸맞은 공간이 달리 조성되지 않았다.

    광장은 유럽의 개념이다. 근대 이후 엇비슷한 생체리듬의 역사를 살아온 미국만 해도 도심 한복판에 광장이 들어서기보다는 공원이 조성되는 경우가 많다. 뉴욕? 그곳에 광장이 있던가.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본다면 타임스스퀘어를 비롯하여 록펠러, 메이시 헤럴드, 워싱턴스퀘어 등을 ‘광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 공간은 도심지 개발 과정에서 파생된 널찍한 공간이거나 시와 건물주가 의도적으로 조성해낸 공원이지 광장은 아니다.

    광장, 그 개념과 역사

    그렇다면 광장이란 무엇일까. 유럽의 수많은 도시마다 그 한복판에 오랜 역사를 거쳐 형성된 바로 그 광장이란 무엇일까. 그들의 광장이 우리가 반드시 표절까지 해야 할 전범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공간의 조성원리와 개념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형태와 기능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래도 유럽인의 광장, 그 내면부터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그는 이들이 미사에 참석하느라 산마르코 광장에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서둘러 그곳으로 갔다. 그리고 이글거리는 광장의 열기에서 빠져나와 어스름한 황금빛 성전에 들어서서 그는 자신이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던 소년을 발견했다. 소년은 기도용 탁자에서 몸을 굽힌 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이 열린 정문을 통해 비둘기떼가 우글거리는 밝게 빛나는 광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매혹당한 자는 현관에 몸을 숨기고, 몰래 숨어서 소년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폴란드인들이 성당을 떠나는 것과 남매들이 격식을 차려 어머니와 헤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어머니가 몸을 돌리고 작은 광장 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소년과 수녀 같은 자매들과 가정교사가 오른쪽으로 접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그들이 어느 정도 앞서도록 하고 그들 뒤를 따라갔다. 베네치아 거리를 산책하며 두루 돌아다니는 그들 뒤를 몰래 따라다닌 것이다.

    뛰어난 산문 서사시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흐의 죽음을 통해 근대 유럽 교양 문명의 붕괴를 다룬 이 중편에서 토마스 만은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광장을 간결하게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 광장은 베네치아 사람들과 그곳에 잠시 여행하러 온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고 있다. 사람들은 광장으로 나간다. 그런데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다. 광장을 보러 광장에 가는 것이 아니다. 미사를 드리거나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거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광장을 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이 소설에 국한한다면, 산마르코 광장은 단순히 널찍한 공터이거나 그 자체가 관광 이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수많은 수로가 흘러나오는 곳이자 다시 서로 다른 삶으로 다양한 수로가 열리는 수렴과 확산의 공간이다.

    광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고라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아고라는 도심의 한복판에 자리 잡되 그 주변으로 사원, 가게, 공공시설, 사교장 등이 자연스럽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물론 분수도 있고 나무도 있어 휴식공간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장치일 뿐이다. 널찍하게 비어있으되 사람들의 삶에 의해 보이지 않게 채워지는 공간, 그곳이 광장이었다.

    이러한 광장의 개념은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여러 제후에 의해 의식적인 도시 조성의 핵심이 된다. 중세의 겨울과 근대의 봄에 이르는 시기에, 유럽의 도시는 자연스럽게 발전해온 광장을 좀 더 의식적으로 조성하기 시작한다. 도시를 설계하면서 가장 먼저 광장의 위치와 넓이와 기능을 고려했다.

    유럽의 도시와 광장 문화를 연구한 프랑코 만쿠조는 저서 ‘광장’에서 유럽의 역사가 곧 광장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광장은 일상생활의 통행과 회합과 교환의 장소이자 동시에 권력과 그 의지의 실현의 장이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의 연대와 소통의 장이다. 물리적인 형태는 다를지라도 우리의 역사적 경험에서도 광장(도시산업화 이전에는 마당이나 장터)은 그와 같은 공간이었다.

    광장은 인류의 모든 활동이 수렴되고 확산되는 공간이며 장터이자 문화마당이고 예술이 구현되는 장이며 더 많은 자유를 향한 열정이 집결하는 장이었다. 특히 근대사회 이후 광장의 이 같은 기능과 열망은 확연한 시민권을 갖게 됐다. 권력의 의지가 무지막지하게 발현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유의 열망이 바로 광장에서 빚어졌다. ‘만남, 의견교환, 산책, 휴식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이 바로 광장이다.’ 프랑코 만쿠조의 말이다.

    거대한 중앙분리대

    다시, 광화문광장으로 나간다. 이미 서울시청 앞의 서울광장과 청계천에 의해 광화문에서 세종로, 태평로를 지나 복원작업 중인 숭례문에 이르는 서울 한복판의 중심축이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지만, 역시 그 화룡점정의 백미는 광화문광장의 변화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면서 ‘국가 상징 가로의 역사성 회복’이라는 테마를 맨 앞에 내세웠다. 이 일대가 국가 상징 가로임은 틀림없는데, 그것의 ‘역사성 회복’이라는 테마는 상당한 논의와 토론이 필요한 대목이다. 어떤 역사성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국가 상징 가로’를 오브제로 삼는 작업이기 때문에 매우 절실한 토론과제인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광화문광장 북쪽 끝 부분에 너비 17.5m, 길이 162m 규모로 조성된 꽃발 ‘플라워카펫’.

    서울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조선시대에 광화문 앞 좌우의 길들은 육조 관아 등이 위치한 국가 중심 거리였으며 이것이 일제강점기에는 주요기관의 철거와 함께 차도로 사용되고 말았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광화문 앞 세종로는 국가권력이 전적으로 지배하고 점유하는 독점적인 공간이었다. 군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일제의 강압통치와 이후 권위주의 지배체제가 오랜 기간 광화문을 독점했다. 그곳은 밤낮으로 차량이 질주하는 무기질의 대로가 되었으며 어쩌다가 차량의 흔적이 끊긴 날이면 어김없이 권위주의적 국가이념을 과시하는 열병식과 행렬과 이벤트가 벌어졌다. 동원된 군중이 그 좌우에 늘어서서 만세를 불러야 했다.

    그랬던 광화문과 세종로가 새롭게 조성되어 개장된다는 것은 일단 그 자체로 ‘역사성 복원’ 운운할 것도 없이 역사적인 사건이다. 마침내 2009년 8월1일, 총면적 1만9000㎡의 광화문광장이 열렸는데, 아뿔싸, 이 공간은 그저 폭 34m, 길이 557m의 길쭉한 공간일 뿐 그 어디에서도 ‘광장’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조형의 개념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서울시가 기본적인 개념으로 내세운 ‘역사성 회복’이라는 당위는 널찍하게 조성되는 광장 곳곳에 역사 상징물을 설치하는 것으로 실현됐다. 기존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 더해 세종대왕 동상이 설치되고, 역사문화와 관련된 전시관이 들어서는가 하면, 해치마당, 역사 물길, 해치상 원형 등을 배치해 역사복원의 장으로 삼는다는 게 서울시의 기본적인 조형개념이다. 이를 위하여 기존의 16차선 차로 가운데 6개 차로를 걷어내고 남북으로 길게 광장이 새로 조성됐다.

    흘러간 왕조를 상징하는 몇 가지 시설물을 설치하는 게 과연 ‘역사성의 회복’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인지는 의심스럽지만, 그 점을 유보한다 하더라도 ‘역사성의 회복’을 위해 동원된 이미지와 설치된 조형물은 오늘의 세련되고 신선한 감각의 바탕 위에 조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저 1970년대의 국가주도형 공간구성에 약간의 화장을 더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 되고 말았다.

    물론 서울시의 조성사업에 일정한 개념과 맥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는 2007년 12월에 광화문광장 조성사업 계획안을 발표하면서 광화문광장을 ‘인간중심 공간’ ‘보행 네트워크 공간’ ‘자연공간 조망 공간’ ‘역사 문화 체험 공간’이라는 네 개의 관점에서 조성해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같은 개념은 현실의 광화문광장에서 일정한 형태로 실현됐다. 북악산을 정점으로 널찍한 중앙대로가 뻗어 나와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우람한 기틀을 광화문광장은 그 한복판에서 크고 작은 조형물로 변주해낸다. 광장 좌우에는 수심 2cm, 폭 1m, 길이 365m의 ‘역사 물길’이 조성되어 있고, 동편 바닥돌에는 조선왕조에서부터 시작해 실질적인 공사가 진행된 2008년까지 이르는 기간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새겨져 있다. 서울시 측이 영구불변의 고정형 시설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시적인 이벤트도 아니라고 밝힌 광장 북쪽의 ‘플라워카펫’에는 22만4537송이의 꽃이 만발해 있다. ‘224537’, 이 숫자는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한 1394년 10월28일에서 광화문광장 개장일인 2009년 8월1일까지의 날수가 된다.

    그럼에도 조선 초기, 피비린내 나는 정치지형이 안정된 후 등장한 문화정치의 구현자 세종대왕이 오늘날 광화문광장에 임재해 ‘백성을 어여삐 여겼던’ 그 심정으로 보신다면 어떨까. 우선 과도하게 치장된 국가주의적 장식물이나 서울시정을 홍보하기 위한 크고 작은 시설물부터 제거하라고 지엄하게 명령하지 않으실까. 그런 우려가 들 만큼 광화문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중앙분리대에 가깝고, 또한 서울시정의 홍보공간에 가깝다.

    광화문광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른 볼일 대신에, 광장에 가야겠다는 작은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광장으로 가기 위해 우선 신호등을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지시 사항은 광장에 이르는 첫 단추가 꽤나 어렵게 꿰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광장 그 자체에 볼일이 없다면 굳이 좌우로 신나게 달리는 차량을 주의해가면서 횡단보도를 건너 그 널찍한 공간으로 걸어갈 필요가 없다.

    군데군데 마련된 신호등이나 건널목을 건너서 광화문광장으로 가면, 이제부터는 광장의 아래쪽에서 위쪽까지 혹은 그 반대로 걸어야 한다. 머물러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편안하거나 안정된 심리상태를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저 광화문 앞까지 ‘걸어가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두 가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 앞뒤로 배치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보자. 우선 등 뒤로 끊임없이 들려오는 차량의 소음을 견뎌내야 한다. 개장 초기와 달리 차량과 광장을 확실히 구분하는 안전장치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급박한 사고가 나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도심 한복판에서 바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불편한 차량의 소음을 견뎌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매연이나 공해는 차라리 둘째 문제다. 거대한 차로 한복판에 광장이 형성되어 있다. 그런데 또 그 한복판에는 거대한 동상 두 개가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끝없이 샘솟는 분수도 있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그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온몸을 적시고 싶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연히 뒤로 물러서게 되는데, 마침 그곳에 벤치가 마련돼 있다. 등 뒤에서 차량들이 질주하는 그 위치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토마스 만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쓴 것 같은, “이글거리는 광장의 열기에서 빠져나와 어스름한 황금빛 성전에 들어서서 그는 자신이 그리워하며 찾아다니던 소년을 발견했다”는 풍경이란 적어도 이 광화문광장에서는 도저히 이뤄질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광화문광장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차량 소음과 분수 물줄기를 피해) 걷게 된다.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그 보행과정에 시선을 좌우로 돌리면 수십년의 근대화 개발과정에서 형성된 거대한 건물들이 압도적인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북쪽을 향해 걷다보면 우측으로는 교보빌딩을 시작으로 방송통신위원회·KT 건물과 주한 미대사관, 문화부 건물이 이어진다. 좌측으로는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가 늘어서 있다. 모더니즘과 국가주의가 맹렬하게 팽창해 형성해낸 이 모든 건물은 사람들의 접근이나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대로 반사하거나 뱉어내거나 차단한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일정한 규모의 경찰병력이 근무를 서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광화문광장 한복판에도 순찰을 도는 경찰들이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임무는 시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광장 한복판에 순찰을 도는 경찰이 있고 그 바깥으로 각종 시설과 건물을 호위하는 경찰 병력이 있다는 것은 광화문광장이 ‘만남, 의견 교환, 산책, 휴식’(프랑코 만쿠조)이 이뤄지는 공간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은유한다.

    서울 광화문광장
    인간 중심의 광장?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조성의 중요개념으로 ‘인간 중심 공간’을 천명한 바 있다. 중요한 개념이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발상에 의해 인간의 살아있는 발걸음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었던 차량과 권위의 광장을 대대적으로 바꾼다고 한다면, ‘인간 중심’이라는 테마를 적극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차로를 줄이고 그 한복판에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인간 중심’의 공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호등이나 건널목을 이용해서 건너가야 하는 일종의 ‘섬’이라는 조건만이 아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서 진실로 인간적인 휴식과 만남과 대화와 성찰이 가능한 곳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광화문광장은 대답하기를 꺼린다. 차량이 시속 60km 이상으로 달리는 공간, 더욱이 쉬지 않고 분수가 흘러넘치고 크고 작은 시설물이 동선과 시선을 빼앗아가는 공간에서는, 예컨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인물은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다.

    광장의 기능, 특히 경건한 위로와 인간적 성찰의 기능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아마도 가장 순도 높은 장면을 보여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독단적인 가치에 사로잡혀 충격적인 살해를 범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숭고한 신념에 전혀 미치지 못하는 거리의 여자 소냐로부터 거룩한 위로와 사면을 받고는 광장으로 걸어 나간다. 그 대목을 한번 읽어보자.



    광장의 복판까지 왔을 때, 그의 가슴에는 갑자기 어떤 충동이 일어났다. 그는 순간 어떤 움찔하는 느낌과 동시에 자기가 온통(몸도 마음도)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득 소냐의 말이 생각났다. ‘네거리에 나가서 모든 사람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땅바닥에 키스하세요. 당신은 대지에 대해서 죄를 범했으니까요. 그리고 큰 소리로 뭇 세상 사람들에게 나는 살인잡니다 하고 말하세요.’ 이 말을 상기하자,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 그는 광장 한복판에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몸을 굽혀 환희와 행복을 느끼면서 그 더러운 대지에 키스를 했다. 그는 일어서서 다시 머리를 숙였다.

    자, 누군가 지금 라스콜리니코프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비통한 심정으로 광화문광장에 들어섰다고 상상해보자. 억울한 사정에 직면했거나 불가피한 죄를 범했거나, 아무튼 그는 광장으로 나가서, 그 차디찬 대지에 몸을 엎드리면서 자기 내면의 긴급한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고 한다. 그때, 아마도 광화문광장을 순찰하는 경찰들이 제지하지 않을까?

    “이보세요 아저씨, 여기서 뭐하시는 거예요.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어서 일어나세요. 이봐요. 아저씨. 여기는 분수 솟는 거 구경하고 꽃 구경하고 동상 구경하면서 계속 걸어 다녀야 하는 곳이지, 그따위 무슨 행동이세요, 아저씨?”

    안다. 조금 과장해서 썼다. 그렇지만 실제로 광화문광장에서는 이 같은 행동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광화문 일대 복원계획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2006년 1월 초, 당시 문화재청은 ‘서울 역사도시 조성 계획안’을 발표하면서 광화문의 원형복원과 함께 광화문 언저리에 2만6000여㎡ 규모의 광장을 조성하겠다고 제시했다. 이를 발판 삼아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그해 12월 서울시는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세종광장 조성계획’을 마련했다. 세종로 일대(760m 구간)를 보행광장으로 만든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때 서울시는 △양측 배치안 △중앙 배치안 △편측 배치안 등 세 가지를 검토했다. 세종로와 광장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 것인가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이때 거론된 것이다. 양측 배치안은 세종로 양측 보도를 확장해 광장으로 조성하는 것, 편측 배치안은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던 세종로의 중앙분리대를 없애 양방향의 도로 기능을 살린 뒤 세종문화회관 쪽의 기존 보도 폭을 확장해 광장을 만드는 안이었다. 중앙 배치안은 기존의 은행나무를 뽑아내고 그 중앙분리대를 광장의 기능에 맞게 넓혀 조성하는 의견이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안이 지금의 형태로 진화돼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서울시는 다소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국가 중심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채택한 셈인데, 이 선택에 사실상 서울시의 ‘공간 이념’이 반영된 것이다.

    편측 배치안을 구상한 건축가 승효상은 세종문화회관과 맞붙은 편측광장을 조성할 때 광화문 기본축 및 육조 거리의 복원이라는 개념도 살릴 수 있으며 더욱이 어떤 의미로든 광장은 실제의 생활환경이나 시민의 보행원리와 맞물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을 주목해본다면 ‘사면이 차도로 막혀 있는 광화문광장은 세계 최대의 중앙분리대’라는 그의 비판이 현실감을 갖는다. 이 ‘중앙분리대’에서는 느긋하게 산책하거나 편안하게 성찰하는 대신 적지 않은 소음을 내며 질주하는 등 뒤의 차량을 의식하면서 크고 작은 시설물을 따라 계속 걸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 문화 체험 공간?

    서울시는 광장을 조성하면서 ‘역사 문화 체험 공간’이라는 화두를 또한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럼에도 그 결실은 ‘문화 체험’과는 거리가 먼 이벤트 전시에 그치고 있다. 일제 잔재를 없애기 위해 세종로 한복판에 있던 은행나무들을 제거해 이식했다는 점도 별도의 검토가 필요하다. 서울시에 따르면 광화문 은행나무들은 일본 사람이 총독부와 일본 신사를 잇기 위해 심은 일제의 축이다. ‘역사 바로 세우기’ 관점에서 이 은행나무 ‘축’을 없앴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은행나무 그 자체가 아니라 옛 총독부와 신사를 잇는 ‘축’을 제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실상 ‘축’은 그대로 뻗어 있는 상태다. 서울시에는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인 수령 100년 안팎의 은행나무들만이 산산이 뽑혔을 뿐, 문제의 그 ‘축’은 거대한 광장으로 여전히 ‘기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진실로 ‘축’을 없애겠다고 한다면 그 축의 조형물인 은행나무들만 다 뽑아버릴 게 아니라 현재의 광장을 일본의 ‘축’을 따라 조성하지 않고 이를테면 세종문화회관과 맞붙은 편측 광장으로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광화문광장이 ‘국가 상징 축’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이다. ‘국가 상징’이라는 거대한 프레임이 제시되면 그 안을 채우는 수많은 조형물이나 행사나 이미지들은 이 프레임 바깥으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그 바깥에서 안쪽으로 스며드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국가 상징’에 부합하거나 버금가는 조형물과 행사만이 허용된 관제광장이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광장이 시민의 일상공간이 아니라 ‘국가 상징의 거대한 공간’이 되는 순간, 관제화나 박제화라는 운명의 길은 피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서울 광화문광장

    광장에서 지하 해치마당으로 이어지는 통로에 설치된 계단과 화면. 계단에 앉은 시민들의 눈에 자연스레 들어오는 것은 서울시 홍보영상이다.

    광장의 기능, 그러니까 진실로 당대의 일상과 문화와 고뇌가 어우러져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울려 퍼지는 풍경을 그린 작품을 하나 더 읽어보자. 1920년대 독일 사회를 그린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이 작품은 격동기의 혼란과 죄의식을 넘어서고자 하는 섬세한 개인의 속죄의식을 보여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베를린의 광장과 거리를 배회하고 그곳에서 ‘다른 삶’을 발견한다. 베를린 동부의 알렉산더 광장에 선 주인공은 오랜 방황과 사색 끝에 ‘더 이상 혼자 서 있지 않는다.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사람들이 가고 그의 뒤에 사람들이 간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호 연대를 강조하면서 이 아방가르드 소설의 작가 되블린은 주인공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깨어 있거라 깨어 있거라 혼자 있는 게 아니다. 대기는 우박과 비를 내릴 수 있고 사람들은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많은 것은 막을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옛날처럼 운명이다, 운명이다 하고 소리 지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운명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걸 붙잡고 파괴해야 한다.”

    자, 광화문광장에서 이 같은 일이 가능할 것인가. 만약 누군가 작품 속의 주인공처럼 오랜 방황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광장의 열정에 휩싸여 위와 같이 외치려고 광화문광장에 뛰어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서울시의 ‘광화문광장 사용 및 관리에 관한 조례’에 의해 체포되거나 적어도 광장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을 ‘허가’의 공간으로 보고 있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을 일정한 목표 의식을 갖고 사용하려고 하면 반드시 서울시와 서울지방경찰청의 허가를 이중으로 받아야만 한다. 이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불법 점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와 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서울시는 이미 허가한 행사에 대해서도 취소하거나 이용정지를 내릴 권한을 갖는다. 서울시는 광장을 관리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감독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만 도드라지게 살핀다면, 광화문광장은 시민의 것이 아니라 서울시의 것이다.

    누군가는 서울시의 이러한 운영 지침에 대하여 현 정권의 ‘광장 공포증’에 따른 결과라고 비판했다. 일정 부분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촛불집회 등으로 인해 현 정부와 서울시가 도심의 널찍한 공간에 많은 군중이 모이는 것을 우려해 벌인 즉발적인 반응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단순히 현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적 집회를 미리 걱정해서 이 같은 운영 지침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 이 나라의 오랜 관 주도 행정의 거대한 무의식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 같은 무리한 지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들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광장에 사람이 모이는 것이 두려워서 관 주도의 조례지침을 마련한 측면도 있겠지만, 이 나라의 오랜 권위주의적 행정시스템 자체가 ‘허가’ ‘절차’ ‘정지’ 같은 언어에 여전히 포획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국가 상징 공간’ 아닌가. 이처럼 무지막지하고 거창한 언어를 나열해 조성한 공간이므로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과 같은 시민이 혹시나 있다면 그는 자신의 골방에 가서 울음이나 터뜨려야 할 것이다.

    여기서도 사랑이 가능할까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이다. 지난 20세기의 화두가 되었던 소설이며 그 문장이다. 개인과 공동체가 어울리는 삶, 밀실과 광장이 서로 삼투하는 삶. 작가는 그것을 소망했으되 여전히 이뤄지지 않은 꿈이다. 여기서 ‘광장’이란 명백히 지난 20세기 중엽의 불구적인 정치상황을 은유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대도시 중심가의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 현대의 고전에서 최인훈은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이 자기의 밀실로부터 광장으로 나오는 골목은 저마다 다르다. 광장에 이르는 골목은 무수히 많다. 그곳에 이르는 길에서 거상의 자결을 목도한 사람도 있고 민들레 씨앗의 행방을 좇으며 온 사람도 있다.

    광장이란 그런 곳이다. 광장이란 단순히 물리적으로 널찍한 도심 속의 공간이 아니라, 밀실의 개인이 공포와 외로움을 이겨내고 좀더 넓고 따스한 공동체로 스며드는 통로인 것이다. 하지만 광화문광장은 낡은 시대의 감수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국가 상징’ 공간이 되고 말았다. 분수가 솟구쳐 오르고 아이들이 온몸을 적시고 그것을 어른들이 하루 종일 바라본다? 그것이 광장의 한 요소일 수는 있어도 핵심 개념이 될 수는 없다. 광장에서 지하 해치마당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통로의 한쪽 면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계단은 자연스럽게 관람석의 기능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보게 되는가. 시민들은 계단에 앉아 맞은편 벽에서 쉬지 않고 흐르는 서울시 홍보영상을 보고 있다. 개인의 삶과 공동체의 정념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공간이 아니라 거대한 국가주의적 이벤트와 서울시정 홍보만이 가능한 공간, 그곳을 광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도 ‘사랑’이 가능할까. 일상의 자연스런 흐름을 따라 광장으로 산책을 나가고 그곳에 마음이 헛헛한 사람들이 모이고 그리하여 자연스레 대화가 이뤄지고, 나아가 현대 문명의 압도적인 스케일 아래에서도 미약한 마음들이 서로 어울려 사랑을 이루는, 그런 풍경이 가능할까. 광장이 그런 곳이라고? 당연히 광장은 ‘사랑의 광장’이기도 한 것이다. 이를 절실히 보여준 작품은 레마르크의 ‘개선문’이다. 지금은 샤를드골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어도 파리지앵들은 여전히 에트왈 광장이라고 부르는 그곳에는 개선문이 있다. 바로 그 아래에서, 나치 수용소를 탈출한 외과의사 라비크는 벼랑 끝에 선 채로 희미한 사랑의 끈을 붙잡는다. 소설의 끝에서 레마르크는 ‘광장은 어둠에 잠겼다. 빛은 없었다. 거대한 개선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래도 광장에서의 인연과 사랑의 힘만은 남겨두었다. 그는 썼다.

    그는 구두를 벗기고 서랍에서 목이 짧은 털양말을 꺼내 그것을 여인의 발에 신겨주었다. “자, 이만하면 조금은 낫겠지. 괴로울 때는, 하찮은 일에서도 위안을 찾아내도록 해야만 해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군인들의 철칙이랍니다.”

    과연, 이러한 인연과 사랑이 광화문광장에서 가능할까. 좌우로 차량이 매연을 뿜으며 쏜살같이 달리고 거대한 국가 상징물이 압도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조형물 사이를 걷거나 혹은 피하면서, 때로는 계단에 앉아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서울시의 홍보영상을 바라보면서, 사랑의 인연이 가능할까. 내밀한 사유와 고요한 산책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과도한 홍보영상과 소음덩어리 아래에서 사랑은,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절망에 다름아닐 것이다.

    소설가 이기호는 세종로를 배경으로 한 단편소설 ‘수인’을 썼다. 이 소설은 끔찍한 핵 재앙 이후의 붕괴상태를 맘껏 상상하여 그린 것인데, 이벤트 공간으로 전락해버린 오늘의 광화문광장과 겹쳐 읽으면 결코 그로테스크한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기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현재의 광화문광장이 조성되기 훨씬 전에 쓴 단편이지만 오늘의 ‘국가 상징’ 광장을 거꾸로 해석하게 만드는 장면이다.

    도로 이곳저곳엔 유리가 깨지고 보닛이 우그러진 차들이 사선으로, 혹은 뒤집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가로수들은 뿌리를 온전히 다 드러낸 채 말라 죽어가고 있었고, 도로에 면해 있는 고층건물들은 하나같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 때마다 도로와 인도에 쌓여 있던 낙진 덩어리들이 플라타너스 잎들과 함께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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