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6월호

행복을 행복해 하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 입력2011-05-19 17: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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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을 행복해 하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우리는 행복 없이도 너끈히 살 수가 있다. 그러나 행복 없는 삶은 메마른 삶이다. 메마른 삶이란 자루가 없는 호미와 같다. 자루가 없는 호미란 애초에 그것이 생겨난 도구적 기능에서 완벽하지 않다. 뭔가 모자란 것이다. 호미는 자루가 달려야 호미로서 제 구실을 할 수가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결락된 삶이란 재미도 없고 지루한 삶이다. 행복은 삶을 자라게 하는 필수 자양분이다. 행복 없는 삶은 자양분을 취하지 못하니 결국은 고갈되고 만다. 고갈은 삶의 사막화를 초래한다. 사막에는 모래바람이 분다. 늘어난 불평과 불만이 모래바람이다. 모래바람 속에서 사람은 필경 불행하다. 나는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불행 때문에 삶을 끝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가장 나쁜 삶이라도 죽음보다는 더 나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성과 희망이 고갈되고, 한 치 앞의 미래도 보이지 않고 온통 불투명할 때, 나는 불행하다. 오래 실직한 상태고 수중에 돈은 다 떨어졌는데, 카드회사에서 연체된 카드대금을 독촉받을 때, 나는 불행하다. 도무지 존경할 수 없는 사람이 큰돈을 벌고 떵떵거릴 때, 입만 열면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그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불행하다. 사랑이 습관과 의무로 전락해버렸을 때, 더 이상 연인을 기다리는 일이 가슴 떨리는 기쁨이 아니게 될 때, 나는 불행하다. 문득 어린 시절의 어떤 순간들,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님이 귀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로 기뻤다. 그런데 그 행복했던 순간들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나는 불행하다. 몸이 아프고 주위에 돌봐줄 사람이 없을 때, 나는 불행하다. 나에 대한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이 돌고 그 소문 때문에 절친했던 사람이 나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보지도 않고 말없이 등을 돌릴 때, 나는 불행하다. 나의 우둔한 결정과 선택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나는 불행하다. 정말 배가 고플 때, 마실 물이 없을 때, 누군가에게서 욕을 들을 때, 하루가 덧없이 저물었다고 느낄 때, 나는 불행하다.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나는 불행하다.

    행복과 불행 사이

    행복이란 이 모든 것과 정확하게 역상(逆像)을 이룬다. 정신의 고양(高揚), 생기의 가득참, 기쁨의 생동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마음에 뜻밖에도 가득 찬 고요와 평화, 도취, 꿈이 현실이 될 때 그 융합도 행복감을 불러온다. 행복이란 마음에 채워야 할 어떤 공허도 없을 때 온다. 사랑, 웃음, 도취로 이끄는 기호들, 드높은 목표의 달성, 경이롭게 펼쳐진 자연 절경들……, 이것들이 불러일으키는 놀라움과 기쁨은 우리에게 생기를 주고 가슴 뛰는 삶으로 이끈다. 가슴 뛰는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다. 가슴 뛰는 삶은 운명의 피동적인 수납이 아니라 내가 꿈꾼 바로 그 삶, 자발적 의지와 행동으로 일군 최상의 삶이다. 반면에 공허는 내적 결핍이며, 마음이 내적 결핍을 품고 있을 때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의미의 고갈, 생기의 고갈로 마음이 팬다. 공허는 마음에 파인 부분을 뜻한다. 공허를 채우는 것은 무엇인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 그것은 보람과 기쁨의 상실이다. 누군가에게서 사랑받지 못할 때, 혹은 버려졌다고 느낄 때 세계는 텅 빈 것 같고, 삶은 공허해진다. 나의 자유가 타자에 의해 회수되고 자존감이 짓밟힐 때,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받았을 때, 내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낄 때, 나 혼자만 고립되어 있을 때,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 같은 것은 아무 가치도 없는 거야. 내가 죽어서 사라지더라도 누구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 이런 말들이 마음속에서 꾸역꾸역 솟아나올 때 우리는 불행하다.

    여기 행복에 관한 개구리의 우화가 있다. 연못의 물이 점점 말라가고, 그 수위가 현저하게 낮아진다. 연못을 삶의 터전으로 삼은 개구리에게 이런 현상은 위기다. 개구리는 이런 현실에 대해 깊이 실망한다.



    “옛날의 그 깊고 넓은 연못, 풍부한 물로 가득했던 그곳이 그리웠습니다. 물위를 온통 뒤덮은 연꽃과 주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백합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취할 듯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었습니다.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 아름다웠죠. 대숲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갈대의 잔잔한 리듬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평화롭고 아름다운 물가 풍경은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사라진 연못에는 핑의 깊은 내면을 채워줄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 ‘핑!’)

    개구리 ‘핑’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척박한 현실에 내던져져 있다. 그 척박한 현실을 넘어서서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핑’은 “무언가 ‘되기(be)’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무언가를 ‘해야(do)’만 해”라는 멘토의 조언을 듣는다. ‘핑’은 멘토의 조언에 따라 행복을 찾아 떠난다. 다시 멘토는 말한다. “네가 행하는 대로 네가 만들어진다”라고. ‘핑!’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행복이란 의도적인 삶, 즉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선택하고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다. 멘토는 말라가는 연못을 버리고 새로운 연못(꿈)을 위해 도약하라고 말한다. 도약을 떠받치는 것은 강렬한 열망, 결단력, 자발적 의지다. 나는 “실행이 곧 존재다”라는 멘토의 메시지를 따르는 ‘핑’에게서 한국인의 모습을 언뜻 본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 동안 “하면 된다”는 구호를 앞세우고 살았던가.

    안타깝게도 여러 객관적인 통계를 근거로 한다면 한국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그리 높지가 않다.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이 느끼는 주관적 행복지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도 어른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내 주변을 보아도 행복하다는 사람보다는 사는 게 시들하다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는 민주화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부국 대열에 진입한 한국을 선망하고 배우려는 제3세계 국가의 사람들이 볼 때 기이한 일이다. 오늘의 한국을 만든 한국인의 기질로 “냄비 근성, 강인함, 활력, 승부 근성, 도전 정신, 자신감, 대담함, 빨리빨리 문화, 신바람, 악바리 근성, 잡초 근성, 거침, 격정, 난폭함, 떼거리 근성”(연합뉴스, 2006년 7월 11일자, 여기서는 진중권, ‘호모 코레아니쿠스’에서 재인용)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능동적 기질이 목표지향적 삶을 일구고 이 목표지향적 삶 하나하나가 모여서 한국을 경쟁력이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전사의 나라

    한국은 ‘전사의 나라’다. 앞만 보고 달려가게 한 이 전사 기질이 양적인 삶을 키우고 규모의 삶을 이루는 데 기여한 바가 있지만 이제는 그 폐해에도 눈길을 돌려야 한다. 우리 사회의 여러 부문에서 불거지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모럴해저드가 그 폐해의 한 조각이다. 사회악이 창궐하는 세계에서 개별자의 행복이란 볼품이 없는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 전체가 오염되었다면 파도 한 조각의 미적 현존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한국인의 내면에 있는 ‘전사 기질’은 그 뿌리가 있다. 근대 이후 우리가 불가피하게 감당해야만 했던 사회적 불행과 개별자로서 겪은 삶의 시련들이 우리 안에 거침과 난폭함을 심어준 것이다. 진중권은 그 뿌리가 “동양식 문명화 과정이 식민주의에 의해 단절된 결과이고, 더 결정적으로는 한국전쟁의 참혹한 경험, 그리고 산업화 시대 군사주의 문화의 잔재”(진중권, 앞의 책)라고 말한다. 살아온 세월이 참혹하고 힘들어서 우리는 가난이나 불행이라면 진절머리를 친다. 바로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우리 마음은 거칠어지고 독해졌다. 그러나 시련과 불행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련은 우리를 단련시키고 불행은 우리 마음에 그것에 대한 항체를 만든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꼭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유대인은 다양한 시기에 세계 이곳저곳에서 풍요를 누렸다. 특히 반복되는 유배 때문에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역동적인 경험을 통해 지적·문화적으로 독창적인 결과물을 생산했고 ‘창조적인 회의주의’의 태도로 유대인의 고유문화와 그들이 정착한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니콜 라피에르, ‘다른 곳을 사유하자’)

    따져보면 전사 기질의 상당 부분은 이성과 합리주의의 부재에서 만들어진 기질들이다. 문제는 압축적인 근대화 과정 속에서 이런 ‘선동’들이 끊임없이 있어왔고, 한국인은 개발 독재의 시대에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런 기질들을 강요당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절대 가난의 족쇄에서 벗어나는 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기질들이 경쟁에서 이기는 자질인지는 모르나 행복을 위한 미덕은 아닌 게 틀림없다. 나룻배는 강을 건너는 데 필요하다. 강을 건넌 뒤에도 이 나룻배를 등에 지고 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이제 우리 마음이 지고 있는 나룻배를 내려놓아야 한다. 조급증, 실적주의, 투쟁심, 상대적 박탈감, 빨리빨리 문화, 하면 된다는 정신에 밴 비이성적 성취의식, 떼거리 근성 따위가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나룻배다. 우리가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혜와 자아 탐구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 지혜의 바탕은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극단적인 경쟁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살자 식의 상생 정신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앞만 보고 달리느라 자아에 대한 성찰과 탐구에 게을렀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야 한다. 아울러 타자에 대한 배려, 이타주의 정신, 느림, 그리고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기르고 키워야 한다.

    가진 것에 만족하라

    행복을 행복해 하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영화 ‘행복’의 한 장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가난은 결핍인데, 왜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마음이 가난한 것은 참된 가난, 물질에 대한 초월적 상태에 있음을 뜻한다. 내가 서른 해가 넘는 서울 살림을 정리해서 아무 연고도 없는 안성으로 그 많은 책을 싸들고 내려왔을 때 나는 패배자이고, 경쟁사회에서 이탈한 낙오자의 느낌이었다. 나는 그대로 빈털터리였다. 하릴없이 집 아래에 넓게 펼쳐진 호수의 반짝이는 물결이나 바라보며 소일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분노, 슬픔, 억울함 따위가 느닷없이 솟구쳐 올라 나를 쓰러뜨리곤 했다. 물론 나는 파산한 것도 아니요 쫓겨서 내려온 것도 아니다. 시골에서 조촐한 삶을 꾸리려고 자발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독히 불행했다. 불행하다는 느낌이 마음에 사무칠 때 나는 미친 듯 산길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져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났다. 가끔 안성의 젊은 벗들이 시장통에 있는 소줏집에 모여 있다고 불러내곤 했다. 그들과 함께 ‘양성집’에서 어울려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벌건 두부찌개를 앞에 놓고 소주 두어 병을 간단히 비우고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채 집에 돌아와 쓰러져 잠들곤 했다. 이튿날에는 혼자 콩나물국을 끓여 빈속을 달래곤 했다. 젊은 벗들이 부르는 날보다는 혼자 있는 날이 훨씬 많았다. 혼자 있는 날에는 호젓하게 도연명의 시를 읽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매미소리를 들으며 ‘장자’를 읽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바람이 부는 날에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확실히 그전보다 욕심이 없어졌다. 이는 내 마음이 비움을 품고 느림을 사모한 결과다. 이게 정말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태도가 아닐까?

    천지는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다 쥐어주는 법이 없다.

    “천지는 만물이 다 좋게만 하는 법이 없다. 뿔 있는 놈은 이빨이 없고, 날개가 있으면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쉬 흩어진다. 사람에 이르러서도 그러하다. 기특한 재주와 화려한 기예가 뛰어나면 공명이 떠나가서 함께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치가 그러하다.”(이인로, 여기서는 정민, ‘한시미학산책’에서 재인용)

    뿔이 있으면 이빨이 없고, 이름난 꽃은 열매가 없다. 이게 천지를 지배하는 이치다. 마음에 욕심이 있으면 자족할 수가 없다. 자족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가진 것에 자족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난한 마음은 작은 것에도 만족할 수 있는 자족의 정신에 바탕을 둔다.

    지금은 오월이다. 겨울이 가고 호숫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의 연초록빛이 날마다 짙어지는 걸 바라보는 게 즐겁다. 산벚나무와 앵두나무에서 꽃이 피고, 바람에 날린 하얀 꽃잎이 연못 위로 내려앉는다. 연못에는 벌써 수련의 새 잎이 올라오고, 부들은 파랗게 줄기를 세웠다. 별무리가 흩어진 밤하늘 아래에서 소쩍새가 울고 개구리떼가 극성스럽게 울어댄다. 저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니 며칠 뒤에는 잘린 자라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보다 더 붉은 모란꽃과 작약꽃이 곧 피어날 것을 알겠다. 오월의 신록이 짙어질 때 산길은 걷기에 맞춤하고 된장에 풋고추만 있어도 밥맛은 달다. 밤에는 개구리떼의 우레 같은 울음소리 속에서도 숙면을 이룰 수가 있으니, 오월은 두루 행복하지 아니한가! 도시에서 시골로 돌아와 산 지 벌써 십년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나는 ‘자연의 사람’이 되었다. 이 말은 제도와 편견으로 일그러져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여론의 인간’, 혹은 ‘인간의 인간’에서 제정신을 찾아 바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루소는 “순수한 자연 상태란 지상에서 대다수의 인간이 가장 덜 사악하고, 가장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츠베탕 토도로프, ‘덧없는 행복’)고 쓴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의롭고 선하다는 뜻이다. 나는 하나의 존재로서 그 자연 상태에 도달한다.

    행복할 수 있는 능력

    슬퍼지는 것은 쉽다. 그러나 행복해지기는 어렵다. 사람들은 불행에 빠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는 열심히 배우지만 정작 행복해지는 방법은 알지 못한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만 생각하지만, 행복한 사람은 행복만을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 때문에 불행한 사람이 된 게 아니다. 불행하다는 생각에 젖어 살기 때문에 불행해진다. 행복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행복한 조건을 갖고 있어서 행복한 게 아니다.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불행은 그것을 불행이라고 꼭꼭 씹으며 향유하는 사람의 몫이듯 행복은 그것을 행복으로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의 몫이다. 남들이 그게 행복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행복을 향유하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란 실재가 아니라 마음을 물들이는 기이함이다. 그런 까닭에 그것을 감지하고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행복은 물질이나 조건이 아니라 그것을 마음의 지복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주체의 역량이다. 사과 하나를 쥐고도 자족하고 기뻐한다면 양손에 사과를 쥐고도 더 많은 사과를 가질 수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분명 행복하다. 행복은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을 체험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행복은 뭔가를 말해주어야 하고, 뭔가를 가져다주어야 한다.”(베르트랑 베르줄리,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행복은 찰나에 현현하지만, 찰나를 넘어서는 즐거움의 지속이고, 앞으로도 즐거울 것이란 약속이 있는 한에서 가능하다. 행복은 “살아 있는 것 속에서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 행복의 순간. 차라리 지복(至福)의 순간”(베르트랑 베르줄리, 앞의 책)이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살아 있음이 곧 행복의 순간이란 걸 깨달아야 한다. 살아 숨 쉬는 순간은 행복의 순간이요, 지복의 순간이다. 행복한 사람은 불행의 조건에 처할 때조차 그 불행의 감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모든 행복은 “덧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덧없는 것은 사람이 나약한 존재기 때문이다. 행복하려면 반드시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통찰한 이가 바로 장자크 루소다. 츠베탕 토도로프는 행복이 타인을 필요로 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루소의 말에 이어서 이렇게 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타인을 필요로 하고, 이 타고난 불완전함이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규정한다.”(츠베탕 토도로프, 앞의 책)

    행복을 행복해 하라 그래야 행복해진다
    장 석 주

    1955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입선

    동덕여대, 경희사이버대 출강

    저서: ‘느림과 비움의 미학’ ‘지금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몽해항로’ 등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행복은 신기루와 같이 저 멀리 달아난다. 행복을 전달하는 타인이란 언제나 변화에 취약하고(그는 나이를 먹고 늙거나 어디론가 떠난다. 마침내 죽는다), 그에 따라 사랑은 곧 소멸한다. 행복이란 화사하게 피었다가 곧 지는 벚꽃같이 무한성의 욕구 앞에서 유한성에 귀속되는 그 무엇이다. 행복은 깨지고 쉽고 덧없다 하더라도 그것을 추구하는 일은 숭고하다. 우리 모두는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 츠베탕 토도로프 | ‘덧없는 행복’ | 고봉만 옮김 | 문학과지성사, 2006

    ● 베르트랑 베르줄리 | ‘내가 행복해야만 하는 이유’ | 심민화 옮김, 2008

    ● 에카르트 폰 히르슈하젠 |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 | 박규호 옮김, 은행나무, 2010

    ● 마이클 폴리 | ‘행복할 권리’ |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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