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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다큐 | 잃어버린 근대를 찾아서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1920년대 서울

  • 박윤석│unomonoo@gmail.com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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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금까지 이야기
  • 경성의 신문사에서 10년째 일하는 기자 한림은 1929년 12월 세밑에 옛 참정대신 한규설을 방문하여 25년 전 을사조약 당시의 사정을 청취한다. 그 집에 이르는 청계천변을 따라 조선 5백년간 쌓여온 시간의 퇴적층이 한림의 머리에 연상된다. 되돌아 나오는 남촌의 황금정 가로는 병합후 20년 동안 진행된 근대화의 얼굴을 보여준다. 실망과 불안과 일말의 기대 속에 맞이했던 1920년대는 1910년대와는 분명 달랐다. 이번호에서 한림의 마음은 1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10년 공백을 깨고 조선인의 언론이 제한적 자유를 되찾은 1920년 서울의 봄으로.
(제6장)

밀려오는 개조의 물결 피어오르는 자각의 불길

조선시대 대군과 공주의 집으로 쓰인 안동별궁 건물 일부.

1920년 3월 31일. 봄비를 맞으면서 한림은 야트막한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남으로 안국동(安國洞) 사거리를 향해 뻗어 내린 길은 곧고 길다. 이틀 연속 내린 비에 기온은 떨어졌다. 화동(花洞)의 기와집 낮은 담장 밖으로 벗어나온 목련 가지 하나가 찬비에 흔들린다. 꽃을 부르는 비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궂은 날씨다. 날로 다사로워가는 봄볕을 따라 곧이라도 터질 듯 방긋대던 새끼손가락 끝마디만한 꽃봉오리는 놀라 움츠러든 표정이다. 가늘지만 꾸준히 내리는 비는 목덜미에 닿는 느낌이 선뜩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은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 사이비(似而非). 겉으로는 그런 듯하나 실제로는 아니다. 한림은 문득 그런 구절을 떠올리며 안동별궁(安洞別宮) 담장 곁을 지난다. 두꺼운 돌담이 두 길도 더 되는 높이로 한참을 펼쳐진다. 여기가 어딘가. 지금 창덕궁에 계신 이왕(李王) 전하가 두 차례 가례(嘉禮)를 올린 곳이다. 여덟 살 때 세자빈을 맞는 경사스러운 가례를 위해 고종과 민비는 이 별궁을 마련했다. 전국 처녀들의 혼인이 일시 금지된 상태에서 엄선한 규수들로 여기서 세 번의 간택 행사가 치러졌고 최종 낙점된 민씨 집안의 규수가 여기서 숙식하며 석 달간 신부수업을 받고 궁중예법을 익혔다. 그리고 여기서 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어 입궁하였다.

이 별궁 터는 일찍이 세종이 여덟째 아들을 위해 처음 터를 잡고 저택을 지은 이래로 대대로 대군과 공주들의 집이었다. 세종은 이 집을 짓고 나서 몸져누웠는데, 이 집에서 지내기를 원해 이리로 거처를 옮기고 열흘 만에 승하했다고 한다.

세종의 자식 사랑 못지않은 열정을 고종과 민비는 아들에게 쏟았다. 혼인 다섯 해 만에 어렵게 얻은 첫 원자(元子)를 닷새 만에 잃고 3년 후에 다시 얻은 귀한 원자는 돌을 맞기 무섭게 세자에 책봉되었다. 책봉의 원만성사를 위해 청나라 조정에 청원도 넣고 청국 주재 일본공사를 통해 지원도 부탁했다. 병자수호조약으로 일본에 개항하기 한 해 전인 1875년이었다. 이해의 설날, 세자 책봉을 앞둔 고종 내외의 벅찬 기쁨을 담은 고종의 말이 실록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올해는 우리 태조(太祖) 대왕이 탄신하신 지 아홉 번째 회갑이 돌아오는 해이다. 원자가 어느덧 자라 세자 책봉 예식을 이해에 거행하게 되니 나라의 근본을 확고히 하고 선대의 위업을 빛나게 하는 의의가 있다. 자전(慈殿)께서도 매우 기뻐하면서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조선왕조의 역대 혼례 중 가장 화려하고 성대했다는 이 가례식을 거쳐 고종 내외는 1882년 초, 세자빈을 맞이했다. 다섯 달 뒤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군인 병사들이 폭도가 되어 궁궐에 난입해 왕비를 잡아 죽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날뛰는 난리를 피해 민비는 궁녀로 변장하고 궁을 빠져나가 도성 밖을 나서 지방으로 피신했다. 궁궐에 난입해 왕비를 찾아낸다며 혈안이 되어 날뛰는 일본인들과 조선인 협력자들을 피하지 못하고 민비가 시해되기 13년 전의 일이다.

을미사변이라 부르는 그 현장의 참담함을 23세의 나이에 온몸으로 겪은 왕세자빈은 그때 받은 육신과 정신의 충격에 짓눌린 채 온전치 못한 생을 아홉 해 더 연장하다 1904년 말에 이승을 하직했다. 을사조약 한 해 전이었다.

을사조약 다음 해에 황태자는 계비(繼妃)를 들이는 두 번째 가례를 이곳 별궁에서 올렸다. 그리고 다음 해 고종황제가 왕좌에서 밀려나자 순종이 되었다. 그리고 3년 만에 폐위되어 10년째 이왕(李王)이란 칭호로 창덕궁에 거주하고 있다. 덕수궁에서 이태왕(李太王)이란 칭호로 거주하던 고종이 작년 1월 승하한 이후 아직 삼년상중이다.

안동별궁은 일없이 비어 있고 본채 전각 주위로 늘어선 부속 건물들엔 상궁(尙宮)들이 거처하고 있다. 여관(女官)이라 불리던 이들의 등등한 기세는 이제 찾아볼 길 없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마지막 호롱불처럼 남은 창덕궁 하나를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미 많은 상궁 나인이 오래전 궁궐을 떠나갔다. 명월관을 위시한 요릿집에 궁중음식을 선보이거나 낙원동에 들어서는 떡집에 궁중 떡 제조비법을 전수하며 남은 인생을 보내고 있다. 창덕궁 정문 돈화문이 굽어보는 앞길 주변에서 궁중 복식을 선보이는 나인들도 있다. 이곳에 즐비하게 들어선 국악원에서 궁중 아악을 전수하며 생활하는 악공(樂工)들이나, 견지동과 인사동 주위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들도 유사한 처지다.

언감생심 꿈속에라도 넘보지 못할 구중궁궐의 의식주가 어느덧 만백성에게 공개되고 있다. 나라를 잃었다고 울부짖었지만 실은 임금을 잃은 것이었고 그를 옹위하며 백성의 세금으로 녹봉을 받는 관리들이 교체된 것이었다. 국권을 잃었다고 가슴을 쳤지만 실은 왕권을 잃은 것이었고 일상생활의 규율을 정하는 권력의 주체가 바뀌었던 것이다. 문제는 조선인만의 권력교체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한성(漢城)의 백성은 이제 경기도 경성부(京城府)의 부민이 되었다. 궁궐 밖의 백성들은 이제 부민으로서 빈 궁궐 안으로 들어가보기도 한다. 안동별궁은 매년 한 차례 북촌 주민들이 예방접종 받으러 가는 공설 접종소가 되었다. 백신 맞을 때 한 번 가고, 며칠 뒤 접종이 잘되었는지 검사하러 또 한 번 들른다.

민간에 위생관념이 철저하지 못하여 예방할 생각이 아주 적음에 말미암아, 몹쓸 천연두로 훌륭한 얼굴과 육체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손실함이 많으니 크게 주의하여 예방할 필요가 있겠다. 특히 천연두는 우두(牛痘)만 넣으면 걸리지 않는 법인데 우두도 넣기를 싫어하는 일은 실로 잘못된 관념이다. 금번 종로경찰서에서 시행할 봄철 종두일자는 양력으로 4월 12일부터 나흘간을 시행하는데 일자와 시간과 처소와 구역은 별표와 같으니 종로경찰서 관할구역 안의 인민은 빠짐이 없이 우두를 넣게 함이 좋겠다 한다. △12일 단성사 △13일 안동별궁 [검사는 18일 안동별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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