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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록, 그 진실과 왜곡 사이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오항녕은 극우 파시스트다!’

  • 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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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쟁 또는 토론이란, 어떤 가정이나 전제에서 합리적 추론을 통해 모종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 통상 이 과정에선 서로 소통하는 과정이나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오류나 왜곡이 꼭 의도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조금만 산만하거나 마음을 놓으면 그 틈으로 오류가 스며든다. 나는 예외겠지, 하는 생각이 바로 오류의 출발이다. 그렇다고 너무 주눅 들진 말자. 오류를 줄이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소쩍새 울 듯, 서리가 내리듯 오류의 양상과 종류를 훑어오지 않았던가. 지금 논쟁이나 토론 과정에서 나타나는 오류를 점검하면서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하는 중이다.

논쟁이란 음모가 아니다. 논쟁 또는 토론이란, 어떤 가정이나 전제에서 합리적 추론을 통해 모종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을 말한다. 통상 논쟁 과정에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근거나 사실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의미론적 오류, 후자를 실체적 오류라고 한다. 의미론적 및 실체적 오류와 왜곡의 대표적 사례에 대해 우리는 지난번에 교학사 고교 한국사교과서(권희영, 이명희 대표집필)의 사례를 들어 살펴봤다. 시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교학사 교과서가 역사학의 쟁점에 대해 전형적인 오류를 워낙 다양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의미론적 왜곡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모호함의 오류. 이 오류는 두 가지 또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표현이나 단어를 사용한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계급, 문화, 교육, 정당, 봉건제, 낭만주의 등의 용어는 누구나 아는 듯하지만, 논의하는 그 맥락에서 정의(定義)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종종 서로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모호함은 곧잘 혼동으로 이어진다.

‘확실히’=‘아마도’(?)

너무도 익숙한 논쟁의 오류들

영국 런던대 정치경제대학 도서관에 비치된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초간본. 때론 긴 분량의 저술도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를 낳곤 한다.

개념에 가까운 용어 사용도 오류를 수반하지만, 역사학자의 과장(誇張)도 오류를 낳는 데서는 예외가 아니다. 역사학자들도 설득력을 높이려다 보면, ‘때때로’ 대신 ‘항상’, ‘가끔’ 대신 ‘때때로’, ‘드물게’ 대신 ‘가끔’, ‘한 번은’ 대신 ‘드물게’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이 ‘확실히’라고 말하면 ‘아마도’로 알아들어야 하고, ‘아마도’라고 말하면 ‘혹시’ 정도로 알아들어야 하며, ‘혹시’라고 말하면 ‘추정컨대’ 정도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말할 필요도 없다’는 말은 종종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며, ‘알려져 있지 않다’는 말은 ‘나는 모르겠다’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문장을 시작하며 곧잘 덧붙이는 ‘사실’이라는 말은 단지 ‘내 생각에는’이라는 의미이고, ‘의심할 것도 없이’라는 말은 오히려 ‘의심할 만한 요소가 있는데 내가 무시했다’는 뜻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비꼬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가의 판단’을 마치 ‘역사의 판단’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의미론적 오류는 신문의 타이틀, 인터넷 뉴스 제목에서 자주 발견되듯이, ‘강조의 오류’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른바 ‘낚였다’는 느낌이 들면 ‘강조의 오류’에 넘어간 경우일 때가 많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오류가 ‘흑백논리의 오류’다.

흑백논리의 오류

춥다/덥다, 빛/어둠, 선/악, 자유/부자유, 좌익/우익 같은 용어가 그것이다. 춥다(선선하다)/덥다(따뜻하다)는 것 사이엔 아무런 고정된 기준이 없다. 실내에서 20℃면 더운 느낌이 들다가도 밖에 있으면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열대지방에 살던 사람은 28℃ 되는 날씨가 선선하지만 온대지방에 사는 우리는 덥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특정한 목적 아래 정확히 구분할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 구분은 언제나 임의적인 구분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두 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임의적이고 정도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음지와 양지는 구분되는 듯하지만, 햇빛이 직접 비치든지 반사되어 비치든지의 차이일 뿐이고, 심지어는 음지에서도 더 어두운 곳이 있고 비교적 환한 곳이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를 무시한 채 아예 검다/희다는 구분으로 환원시킬 때, 여기서 우리가 자주 쓰는 용어, ‘흑백논리’가 나온다. 둘째 문제점은 이러한 자의성을 절대화할 때 생긴다.

“미국 지성인의 책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언제나. 진실은 이러하다. 매카시 상원의원을 만드는 운동은 이성, 용기, 도덕성이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비이성, 기회주의, 비도덕성을 대변한다. 진실은 이렇다. 도덕적으로 남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도덕적인 인물과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진실은 이렇다. 목적은 결코 수단을 합리화할 수 없다. 미국 지성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매카시와 케네디 사이에서,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이는 미국 역사학자 벤슨(Lee Benson)과 셴턴(James P. Shenton)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5월 20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에 낸 광고 내용이다. 벤슨과 셴턴은 매카시 상원의원을 지지했고, 케네디 반대파였다. 여기서 매카시는 1950년대 반공주의로 미국 사회를 얼어붙게 했던 조지프 매카시와 다른 인물로, 반전주의자인 미네소타 주의 유진 매카시(Eugene McCathy) 상원의원을 가리킨다. 광고, 선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광고는 매카시와 케네디라는 이름을 곧장 도덕성과 비도덕성이라는 모호한 용어와 결합시켰다. 흑백논리의 시작이다. 이 논리가 어디서 본 듯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 주위를 한번 돌아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서 모호한 용어에 대해선 정의를 내리고 시작할 필요가 있다. 변치 않을 정의가 아니라, 적어도 논의되고 있는 맥락에서 적절하고 합당한 정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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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전주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hallimo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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