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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파리 사이 101장면 <마지막 회>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고현학(考現學)으로 풀어본 두 도시

  • 정수복│사회학자·작가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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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은 배달 문화의 최선진국이다. 자장면뿐 아니라 피자, 햄버거, 선물, 장롱까지 배달되지 않는 것이 없다. 연애편지도 퀵서비스로 보내는 사회.
  • 서울에서 파주까지 30분이면 서류가 배달되는 사회.
  • 그러나 신속한 서비스 사회의 이면에 느림을 견디지 못하는 조급증이 숨어 있다.
느림을 견디는 파리 조급증에 빠진 서울

비오는 날의 파리 뒷골목.

고고학(考古學·archaeology)과 대비되는 고현학(考現學·modernology)이라는 말이 있다. 고고학은 수천 수만 년 전에 살았던 인류의 희미한 흔적을 발굴해 그 조각들을 이어보며 그들이 살았던 삶 전체의 모습을 유추하는 학문이다. 반면 고현학은 지금 여기 눈앞에 보이는 대도시의 풍물들을 마치 수천 수만 년 전의 사물처럼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현대인의 삶의 양상을 이해하려는 일상의 지적 활동이다. 고고학자가 사라진 문명과 지나간 역사의 자국과 조각들을 맞춰보며 지난날의 삶을 재구성한다면, 고현학자는 대도시의 익명성 속에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에 다가오고 몸에 부딪히고 손에 잡히고 입에 들어오는 온갖 사물의 형태와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현대 도시의 핵심은 거리에 있다. 거리에는 사람들과 자동차와 유행의 물결이 흐른다. 고현학자는 거리를 걷는 젊은 남녀의 패션과 자동차의 형태와 색채, 건물 외양의 변화는 물론 간판과 광고판 위의 문구들, 대형 화면 위에 쏟아지는 현란한 이미지들, 가판대 위의 작은 물건들, 지하철 안 사람들의 표정과 몸동작, 그리고 그들이 쓰는 언어생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것들은 해석을 요구하는 기호들이다. 도시는 수없이 많은 이질적인 기호가 서로 교차하며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모순을 빚어내는 기호의 제국이다. 고현학자는 그 일상의 기호들이 갖는 숨은 의미를 해석하는 일상의 민속학자다. 그는 현상의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외피를 뚫고 들어가 숨은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들이 여행자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인다. 1980년대 초 프랑스 유학 시절 알프스 부근의 샹베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외국에 처음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나에게는 거리의 광장에 만들어놓은 둥근 화단이 이색적으로 보였다. 그곳에 피어 있는 분홍색, 청색, 은색, 보라색 꽃들의 배합이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 그 꽃밭에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랬더니 함께 여행하던 프랑스 친구가 “네 눈에는 그게 새롭게 보이냐? 그거 아무 데나 다 있는 거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객은 현지인들이 당연하게 생각해서 눈여겨보지 않는 사소한 것에 감탄할 권리가 있다. 여행자에게는 포스터에 쓰인 글씨, 건물 지붕의 형태, 상점의 진열창, 슈퍼마켓의 일상적 물건들, 식당의 차림표,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의 얼굴 표정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인다.

오래 살아서 익숙해진 도시도 여행자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새로운 풍경을 찾아 멀리 떠날 필요가 없다. 프랑스 혁명을 반대했던 보수주의 사상가 조셉 드 메스트르의 동생 사비에르 드 메스트르야말로 여행자의 눈으로 일상의 풍경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민한 눈으로 침대, 침대 시트, 스탠드, 탁자, 벽에 걸린 그림, 유리창, 커튼 등 침실의 익숙한 물건들을 두루 관찰하고 나서 ‘나의 침실여행’과 ‘나의 야간 침실 탐험’이라는 두 권의 여행기를 출판했다. 당연의 세계를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다면 돈도 힘도 들이지 않고 자기가 머무는 일상의 장소에서 즐겁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자 그럼 여행을 떠나보자.

풍경 #92 일상의 역사적 공간들

매일 거기에 서 있으니까 당연하게 보이는 건물들 하나하나에도 역사가 있다. 그것들을 이어보면 긴 역사적 연대기를 만들 수 있다. 궁궐과 성벽, 숭례문과 흥인문 같은 것이 조선시대의 역사적 유물이라면,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우정국 건물, 독립문, 조선호텔 옆의 원구단, 교보빌딩 옆의 비각은 합방 전 개화기의 흔적들이다.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과 겨우 명맥을 유지한 옛 서울시청사,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서울역사, 서울시 의회로 쓰이는 옛 국회의사당 건물, 일민미술관이 된 동아일보 구 사옥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근대적 건물들이고,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박정희 시대의 유물이다. 종로 2가의 삼성빌딩과 신문로의 흥국생명빌딩은 세계화 시대를 상징한다.

한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면 강남역 부근의 삼성타운 빌딩들에서 시작해 삼성역에 이르는 테헤란로 양쪽에는 LG와 포스코를 비롯한 대기업의 현대식 건물들이 대한민국 경제의 비약적 성장을 보여주며 줄지어 서 있다. 이런 도시 공간에서 서울 사람들은 지난날 어려운 시기를 보냈지만 이제 그것을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건설하고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장소를 바꾸어 파리로 가보면 거기에는 프랑스 혁명 이전 절대왕조 시대를 상징하는 궁궐과 광장, 동상과 기념비가 즐비하고 혁명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수많은 성당이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였음을 보여준다. 콩코르드 광장에 남근처럼 힘차게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제국주의의 상징이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와 함께 이집트 땅에 서 있어야 마땅한 오벨리스크가 파리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파리지앵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1830년에야 파리에 도착한 외래의 물건으로서 나폴레옹의 이집트 정복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행사한 프랑스 제국주의의 영향력의 산물이다. 파리의 군사 박물관인 앵발리드 입구와 건물의 복도에는 갖가지 모양의 대포 포신이 줄지어 서 있는데 그것은 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군사력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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