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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② |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최초의 살인 범죄 재판 기록

  • 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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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주와 벌을 보여줌으로써 순종과 복종을 강요한 위대한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신화를 대신할 새로운 범죄 억제 수단이 필요했다.
  • 그것은 바로 법(法)이었다. 기원전 1850년경 수메르에서 일어난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을 디딤돌 삼아 법의 탄생을 들여다보자.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문 장식.

기원전 1850년경 수메르에서 살인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수메르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으로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이 만나는 곳이다. 수메르인은 기원전 3500년경 이 지역에 정착해 우르(Ur), 우루크(Uruk), 라가시(Lagash) 등 여러 도시국가를 건설한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살인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약 4000년 전 수메르에서 벌어진 사건을 콕 집어낸 이유는 의미가 남달라서다. ‘아내의 침묵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재판 과정이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살인 범죄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고대 사법 체계가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통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수메르 살인 사건 기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루 신과 쿠 엔릴의 … 아들인 난나 시그와… 루갈 아핀두의 아들…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를 죽였다.”

세 명의 남자가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를 살해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신전 관리인을 죽인 뒤 피해자의 아내에게 살해 사실을 곧바로 알렸다는 것. 그런데 남편이 살해당한 사실을 알고도 아내는 신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부분이다.

피해자의 아내가 신고하지 않았는데도 살인이 감춰지지는 않았다.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가 누구의 아내인지 모두 알 만큼 수메르가 좁은 바닥이기도 했고, 신전 관리인이라는 직책으로 인해 사건은 금방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수메르의 왕 우르니누르타는 판결을 니푸르 민회에 맡겼다.

“배심원제로 재판 진행”

“물증 없이 처형 못한다”

수메르 전사.

민회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구였다. 니푸르 민회 역시 행정 업무, 의회 기능, 재판 업무를 담당했다. 민회의 재판은 상당히 합리적이고 민주적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배심원제 혹은 국민참여 재판이다.

살인 사건을 다루는 민회 재판이 신전에서 열린다. 신전 관리인을 살해한 범죄인의 재판이 신전에서 열린 것은 우연치고는 뭔가 묘하다. 하여튼 민회 참석자 아홉 명은 신전 관리인을 죽인 남자 셋뿐 아니라 남편의 살해 사실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아내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람을 죽인 자들은 살 가치가 없다. 이 세 남자와 저 여자는 신전 관리인 루 이난나의 의자 앞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또 다른 참석자 두 명이 잇따라 반론을 제기한다.

“루 니루르타의 딸인 닌 다다의 남편이 살해됐다는 사실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녀가 처형당할만한 일을 했는가?”

피살자 아내의 유죄 여부를 놓고 의견이 둘로 갈려 팽팽히 맞선다. 오랜 논의 끝에 재판에 참석한 나머지 사람들은 아내의 무죄를 주장한 두 명의 손을 들어준다. 신전 관리인이 아내를 제대로 부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거론된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부양하지 않았다. 그녀가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그녀가 왜 침묵해서는 안 되는가?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처벌로 충분하다.”

결국 세 남자에게만 사형 판결이 내려진다. 그런데 아내의 행동이 영 개운치가 않다. 살인을 청부했거나 방조했는지도 모른다. 신전 관리인이 아내를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는 주변의 증언은 이런 의구심을 오히려 증폭시킨다. 복수심에서 또는 재산을 노리고 남편의 죽음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회는 ‘그녀가 남편을 죽였는가’에 방점을 찍는다. 물증 없는 단순한 심증만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합리적 의심을 넘어선(beyond a reasonable doubt)’ 증거의 제시를 강조한 것이다. 현대 형사 사건의 판결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수천 년 전과 지금은 다르다고 말한다. 맞다. 4000년 전은 고사하고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었다. 유전자니 원자력이 뭔지도 몰랐다. 또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도 없었다. 경제민주화니 보편적 복지니 하는 주제를 놓고 다툴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변하는 건 아니다.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도 많다. 범죄의 경우엔 방식과 수단은 달라졌어도 동기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해킹이나 보이스 피싱 같은 범죄는 최근에 새로 생겼지만, 범죄의 동기가 이욕(利慾), 복수심, 분노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고대 사회에서 발생한 살인이나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의 동기를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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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무│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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