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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재구성 ③ 예수와 소크라테스 재판

“기득권에 저항한 자, 죽어라!”

정치범의 탄생

  • 이창무│ 한남대 경찰행정학과 교수·형사사법학

“기득권에 저항한 자,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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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원전 2000년경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에서 마침내 법이 만들어졌다.
  •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법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정의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법에 따라 처벌됐다. 처벌받은 사람 중에는 예수와 소크라테스도 있었다.
  • 그들은 정치범이었다. 법은 모호했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기득권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합법’이라는 이름 아래 짓밟혔다.
5월25일 그리스 아테네에서 오나시스 재단 주최로 열린 한 행사가 주목을 받았다.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신 지 2400여 년 만에 소크라테스 사건 모의재판이 열린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스, 미국에서 모인 10명의 판사와 변호사가 배심원단을 구성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유죄 여부를 검증하면서 고대 재판의 의미를 재조명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섰다. 시인 멜레토스를 포함한 아테네 시민 3명이 소크라테스를 고발했다.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은 501명. 법정 통로에는 물시계가 있었다. 재판을 저녁식사 전에 끝내야 했기에 발언 시간을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재판 결과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가 처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느꼈다.

재판이 시작됐다. 원고를 대표해 멜레토스가 고발 이유를 밝혔다. 소크라테스의 혐의는 두 갈래였다. 하나는 아테네의 국가적 가치를 경멸하도록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타락시켰다는 것, 다른 하나는 아테네가 인정하는 신들을 부정했다는 것이다. 멜레토스의 고발이 끝나자 소크라테스가 물었다.

“누가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멜레토스는 ‘법’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느냐고 다시 묻자 멜레토스는 ‘재판관’이라고 고쳐 말했다. 소크라테스가 원로원까지 들먹이며 젊은이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되묻자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만 빼고 어떤 아테네 시민도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가르칠 수 있다고 대답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가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발인들과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재판 시작부터 승소할 생각이 별로 없는 듯 보였다. 생사를 초월한 듯한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면,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오히려 자신이 옳은 일을 하는지, 잘못을 저지르는지에 대해 고민할 것이오. ‘이른바 현자(賢者)’들이 죽음에 대해 두려워할 뿐이지 ‘진짜 현자’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소…나는 결코 선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피해가려 하지도 않을 것이오…다시는 젊은이들을 가르치지 않겠다는 조건을 달아 풀어주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소. ‘아테네의 시민들이여, 나는 결코 철학을 가르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오.”

탈옥 거부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결연했다. 결과는 유죄였다. 배심원 501명 중 280명이 소크라테스의 유죄를 인정했다. 당시 아테네 법정은 형량을 정하는 논의에 피고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형량과 관련해 2차 변론이 시작됐다. 다급해진 제자들은 소크라테스를 설득했다. 소크라테스가 전쟁에 나가 용맹하게 싸운 점 등 그동안 아테네에 기여한 공로를 감안해 유배형이나 금고형을 받을 수 있도록 배심원들을 다독일 것을 스승에게 간곡히 요청했다. 눈 한번 찔끔 감아달라는 거였다. 유배형은 정치범이 주로 받는 형벌이었다. 잠시 유배 갔다 수년 뒤 조용해지면 돌아와 제자리를 찾는 게 보통이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금고형 역시 소크라테스가 70세 고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형식적 처벌에 그칠 공산이 컸다.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배심원단에게 선처를 부탁하기는커녕 배심원들이 보기에 터무니없는 요구를 서슴지 않았다. 자신이 아테네의 영웅 칭호를 받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무상으로 식사를 제공받아야 한다는 얘기까지 꺼냈다. 배심원단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의 권위를 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의 요구 조건은 아테네 시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기 때문이었다. 전쟁 영웅이나 올림픽 우승자가 누리는 보상이었다. 곧이어 형량이 정해졌다. 배심원 가운데 360명이 사형 판결에 동의했다. 1차 판결 때보다 분위기가 더 나빠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의 목숨을 재촉한 꼴이 됐다. 소크라테스는 재판이 끝나고 곧바로 감옥에 수감됐다. 사형 집행 전날 밤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리톤이 소크라테스를 찾아와 탈옥을 권유했다.

“불공정한 판결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습니다. 감옥을 지키는 이들을 매수해놓았으니 나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제안마저 거절했다. 밤이 늦도록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은 탈옥 문제를 놓고 승강이를 벌였다.

“생명을 포기하는 것은 미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나아가 죄악일 수 있으며 수치심을 느껴야 합니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살리고자 갖은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 빚진 것이 있는데 꼭 갚아주게”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大)철학자의 마지막 유언이 빚 갚아달라는 생뚱맞은 것이었기에 이를 두고 현재까지 해석이 분분하다. 고대 아테네에서 아스클레오피스는 치료의 신(神)이고 수탉은 병에서 회복했을 때 감사의 표시로 바치는 제물이었다. 니체가 말했듯이, 소크라테스가 생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하는 의미로 이런 유언을 남겼을 소지가 크다.

많은 이가 지금껏 궁금해하는 것은 ‘소크라테스는 왜 법정에 서야 했는지’ ‘도대체 어떤 죄를 졌기에 사형까지 당해야 했는지’일 것이다. 모든 역사적 사건이 그렇듯 이 재판 역시 당시 아테네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재판이 열릴 무렵 아테네의 사정은 몹시 좋지 않았다. 두 차례에 걸친 스파르타와의 펠레폰네소스 전쟁 때문이었다. 기원전 415년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 나서면서 스파르타와의 두 번째 전쟁이 시작됐다. 아테네는 참전한 알키비아데스를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아테네로 소환했다.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도망가 아테네 군대의 중요한 정보를 알려줬다. 유능한 장군과 정보를 스파르타에 넘겨준 아테네는 결국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전쟁 패배로 인해 아테네는 극도로 피폐해졌다. 또한 난민들이 성안으로 이주하면서 성내 인구가 폭증했고 이로 인해 도시 환경이 극도로 열악해졌다.

전쟁의 패배는 정치적 변동으로 이어졌다. 군사정변이 두 차례 일어났다. 권력을 잡은 이들을 참주라고 불렀다. 30명의 참주가 아테네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참주정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던 아테네 시민들은 포악한 참주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제를 되찾았다. 하지만 화려했던 아테네의 전성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정치 상황은 계속 불안했고 시민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스파르타에 매년 거액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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