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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치의 달인

복종하라, 버텨라, 그리고 웃어라

‘미생’의 정치학

  • 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복종하라, 버텨라, 그리고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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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둑에서는 두 집을 지어야 산다. 그전까지는 미생(未生)이다. 살았다 말할 수 없는 상태다. ‘미생’이 만화에 이어 드라마로도 히트한 것은 왜일까. 강호제현의 폭풍 공감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미생’에 담긴 생활정치의 함의를 살펴봤다.
복종하라, 버텨라, 그리고 웃어라
비정규직, 인턴, 시간제 사원은 직장인이긴 하되 미생이다. 정규직이 돼야 완생(完生)이라고 해서 이들은 오늘도 발버둥친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는 자신도 남도 확신하지 못한다. 실은 정규직도 완생이라고 할 수 없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명예퇴직, 희망퇴직까지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래서 드라마 ‘미생’에서 전직 대기업 상사 맨은 말한다. “직장은 전쟁터”라고. 그러면서 그는 덧붙인다. “바깥은 지옥”이라고.

“직장은 전쟁터, 바깥은 지옥”

만화와 드라마 미생이 인기를 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기업 비정규직의 고달픈 직장살이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씁쓸하기도 하다. 시청자는 금요일과 토요일 밤 이 드라마에 빠져 슬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한다. 그러다 월요일 동이 트면 직장에 늦지 않게 출근하려 서두른다. 정글 같기도 하고 놀이터 같기도 한 그곳에서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호한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하루를 보내야 한다.

조훈현의 145수

1989년 9월 5일은 한국 바둑계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한 날이다. 주인공은 조훈현 9단이다. 2대 1로 뒤지던 상황에서 2대 2를 만들더니 마지막 제5국에서 상대를 잡았다. ‘빠른 창’ 조훈현 9단과 ‘철의 수문장’ 녜웨이핑 9단의 대국은 145수로 끝났다. 미생은 이 기보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미생의 주인공은 145수만에 정규직을 땄나? 대기업 상사의 인턴사원으로 출발한 주인공 장그래는 계약직을 따낸다. 직장인이지만 직장인이라 말할 수 없는, 그래도 실직보단 나은 상태다.

위기십결

정규직이 되어 승승장구하기 위해선 145수만으로 충분치 않을 수 있다. 수는 생물처럼 꿈틀거린다. 상대방의 다음 수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자신이 묘수를 두었다고 해도 그 결과가 어떨지는 확신할 수 없다. 또 이번에 먹힌 묘수가 다음번에 먹힐 거라는 보장도 없다. 상대방에게 읽혀버리면 패착이 되기도 한다.

미생이 인기를 끌면서 바둑인에게는 널리 알려진 위기십결(圍棋十訣)이 새삼 주목받는다. 당나라의 바둑 명수 왕적신(王積薪)이 펴낸 책이다. 드라마 미생 9회에서 장그래가 위기십결 가운데 세고취화(勢孤取和)를 인용한다. 비결 가운데 가장 어려운 비결을 인용한 것이다.

위기십결을 정리해보면 이렇다. ①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지 말라 ②입계의완(入界宜緩): 경계를 넘어설 때는 완만하게 하라 ③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나부터 되돌아보라 ④기자쟁선(棄子爭先):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선수를 잡아라 ⑤사소취대(捨小就大):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취하라 ⑥봉위수기(逢危須棄): 위기를 만나면 버려라 ⑦신물경속(愼勿輕速): 조급해하지 말고 신중하라 ⑧동수상응(動須相應): 서로 호응하게 움직여라 ⑨피강자보(彼强自保): 적이 강하면 지켜라 ⑩세고취화(勢孤取和): 고립되면 조화를 꾀하라. 다 맞는 말 같다.

장그래 따라 하다간 낭패

바둑의 바이블인 위기십결을 토대로 직장인의 생존 전략을 제시한 미생에 딴죽 걸 생각은 없다. 다만 위기십결은 너무 어렵고 미생은 너무 극적이라는 점은 지적해두고자 한다. 미생은 많은 좌절을 담고 있지만 그래도 요행수를 버리지 않는다. 여느 직장인이 장그래처럼 따라 하다가는 굴욕을 겪을 수도 있다. 계약직이 사장과 전무의 눈에 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미생은 비현실적이다. 직장인을 위한 신데렐라 동화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묘수보다 정석

‘레알 미생’직장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정석이다. 묘수 찾다 낭패 본다. 미생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암투와 갈등이 난무하는 혼돈 속에서 장그래는 관찰자에 가까운 정석 행보를 더 많이 보인다. 절대 함부로 나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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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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