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호

내 말인 듯, 내 말 아닌, 내 말 같은

말의 정치학

  • 이종훈│시사평론가 rheehoon@naver.com

    입력2015-01-22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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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워딩. 단어의 선별을 뜻한다. 대통령, 장·차관, 국회의원 같은 공직자·정치인은 ‘정치가 말이고 말이 정치’라는 점을 잘 안다. 몇 마디 어휘로 어떤 정치인은 스타가 되고 어떤 정치인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여전히 유효하다.
    내 말인 듯, 내 말 아닌, 내 말 같은
    대통령, 장·차관, 국회의원은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언론 보도를 타기 때문이다. 한번 보도되면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물론이고 비서실이나 보좌진은 늘 그 워딩(wording)을 가다듬는다. 경제인도 예외는 아니다. 오너나 최고경영인(CEO)의 워딩 하나로 기업 이미지가 순식간에 바뀌기도 한다.

    서양인에 비해 말 서툴러

    보통 사람은 어떨까. 워딩? 생소할 것이다. 모든 말을 생각 없이 뱉는 것은 아니지만,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면서 사는 이도 별로 없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다툼은 말에서 비롯된다.

    말 한마디로 취업 면접을 통과하거나, 계약을 성사시키거나,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이런 성공의 경험이 별로 없다. 오히려 말 한마디로 인해 배우자와 다투고, 친구와 소원해지고, 직장에서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 심지어 말 한마디가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대체로 표현 문화가 발달한 서양인에 비해 워딩에 서툴다고 보는 게 맞다.

    언짢게 하고, 분란 만들고



    보통 사람은 모임에서 짧게 자기소개를 하거나 인사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이때 자기를 잘 표현하는 단어 또는 인용문 따위를 활용하곤 하는데, 바로 이것이 초보적 단계의 워딩에 해당한다. 반장 선거에 나갈 때나 단체 대표에 출마할 때는 조금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 이때는 연설문을 사전에 작성한다. 이 정도면 워딩의 세계에 입문한 격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1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논란을 유발했다. 국무회의 자리에서 “규제를 한꺼번에 ‘기요틴’에 올려 처리하겠다”고 발언한 때문이다. 기요틴, 단두대를 말한다. 공포정치의 상징이다. 강해도 너무 강한 단어였다. 곧바로 야당이 공포감을 유발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후 대체 누가 기요틴 같은 워딩을 골랐는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사용하기엔 영 부적절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기요틴, 찌라시, 국정농단…

    대통령의 연설문과 말씀자료 생산과정을 추적해보면 이렇다. 먼저 각 수석실에서 부처의 도움을 받아 시안을 작성한다. 그 시안을 연설기록비서관에게 보내면 대통령의 평상시 국정철학이나 언어습관을 고려해 수정안을 만든다. 그 수정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대통령은 읽어본 뒤 추가 수정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대통령에 따라 연설문 또는 말씀자료에 본인이 애드리브(ad-lib·즉석표현)를 보태기도 한다. 사전에 메모해 가는 대통령도 있다. 이 애드리브 때문에 연설기록비서실은 물론 해당 수석실도 긴장한다. 사전 원고와 차이가 많이 날수록 긴장감은 더해진다. 애드리브로 구설에 오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의 기요틴 발언이 원고에 있던 말인지 애드리브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느 쪽이든 문제이긴 하다. 최근 박 대통령의 워딩 수위는 아슬아슬하다. ‘찌라시’ ‘국정농단’같은 워딩이 대표적이다. 워딩으로 되레 국민을 피곤하게 하는 셈이다.

    정몽구와 조현민의 경우

    기업의 CEO 워딩 공정도 청와대와 큰 차이가 없다. 비서실에서 ‘회장님 말씀’을 작성한다. 일부 기업인들은 워딩으로 인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 화제가 된 것은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의 발언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를 평가액의 세 배가량인 10조 원에 매입한 뒤 국내외에서 우려가 나오자 “정부 땅 산 것이라 마음이 가볍다”고 했다. 자신이 땅 매입을 결정했다고 시사한 것이다. 그러자‘재벌 오너의 독단 경영’이라는 비난이 국내외적으로 일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구설에 오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여동생 조현민 전무의 발언은 더 가관이었다. 조 전무는 “모든 임직원의 잘못”이라고 하더니, 조 전 부사장에게는 ‘복수해줄게’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물 타기 하네’ ‘정신 못 차리네’ ‘조씨 일가는 경영에서 물러나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보통 사람도 말 한마디로 다툼을 초래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 대화는 워딩, 그중에서도 즉석 워딩인 애드리브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다. 반면 잘 선택한 단어 하나는 위기를 넘기게 한다. 나아가 반전을 가져오기도 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의 워딩

    지난해 말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인내심(patient)’을 갖고 기준금리 인상을 결정하겠다”고 했다. 기존의 ‘상당 기간’을 ‘인내심’으로 대체했을 뿐인데 효과는 만점이었다. 러시아 디폴트 우려로 출렁이던 글로벌 금융시장은 반색했고 곧바로 안정을 되찾았다.

    옐런의 발언은 좋은 워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수위로, 조금만 개성 있게 단어들을 구성하라’라는 워딩의 기본 원칙에 잘 따른 것이다. 이렇게 의사를 전달하면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영향력은 곧 권력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2014년 초 옐런 의장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사실 박근혜 대통령도 과거 ‘파워 워딩’으로 위기를 돌파한 바 있다.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공천에서 친박계가 많이 탈락하자 “저는 속았습니다. 국민도 속았습니다”라고 말해 무소속 친박연대 후보들의 무더기 당선을 이끌었다.

    “마음으로 낳은 내 아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장인의 좌익 경력으로 공격받을 때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아내를 버려야 한다면 차라리 후보직을 버리겠습니다”라고 말해 공세를 무력화했다.

    지난해 배우 차승원의 아들 관련 언급도 위기를 기회로 만든 경우다. 차승원 씨는 “노아는 마음으로 낳은 내 아들”이라고 말함으로써 친자 논란을 잠재웠고 오히려 ‘상남자’ 이미지를 쌓았다.

    사람은 중요한 국면에선 준비된 발언을 하기 마련이다. 데이트 신청할 때, 청혼할 때, 가정에서 중대 발표할 때, 직장에서 작심 발언할 때가 이런 경우다. 이때는 말로써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그러나 늘 성공하진 못한다. 워딩이 어려운 이유다.

    기분 내키는 대로 쏟아내면…

    기분 내키는 대로 말을 쏟아내는 것을 워딩이라고 할 순 없다. 워딩은 일련의 정제 작업을 말한다. 단어의 의미를 엄밀하게 규정하고, 그 미묘한 차이를 분류하고, 최적의 단어와 문구를 추출하는 작업이다. 외교는 워딩을 중요시한다. 잘못된 워딩 하나로 외교 분쟁은 물론 전쟁까지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교적 발언은 그래서 모호하고 미묘하다.

    “어떻게 보니 예쁘시네요”

    대표적인 것이 일본의 과거사 사과 발언이다.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은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는 문장을 썼다. 1995년 무라야마 총리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했는데, 이후 일본 총리들은 이 표현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2002년 고이즈미 총리는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한다”는 표현을 썼고, 2010년 간 나오토 총리도 이와 비슷하게 “통절한 반성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죄의 심정을 표명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외교적 발언은, 얄밉게 들릴 수도 있지만, 불필요한 논란을 유발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정치인은 가끔 논란도 유발해야 한다. 지지 세력을 결집하거나 상황의 극적 반전을 노리는 경우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워딩의 실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중언부언, 미사여구 버려라

    첫째, 더함 없이 덜함 없이. 모든 단어에는 어감이 있다. 거친 것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있다. 알싸한 것이 있고 달달한 것이 있다. 최적의 어감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사람에 따라 어감에 대한 느낌이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래서 최적에 대한 판단도 차이가 난다.

    그래도 통상적인 용법을 따라 가장 적합한 단어를 골라야 한다. 상황과 맥락에 따라 같은 단어라도 조금씩 달리 들리는 점 역시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남자는 소개팅 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여성에게 “어떻게 보니 참 예쁘시네요”라고 말한다. 자기 딴엔 솔직하게 말한 거다. 여성은 예쁘다는 말인지 안 예쁘다는 말인지 헷갈릴 것이다. 두 사람이 잘될 리가 없다.

    상호배제, 전체포괄

    둘째, 중복 없이 누락 없이. 매킨지 컨설팅이 사용한다는 ‘상호배제와 전체포괄’ 원칙은 워딩에서도 중요한 방법론이다. 말을 채로 걸러보라. 중언부언은 모두 버려야 한다. 실질적 정보가 없는 미사여구도 버려야 한다. 이를 제외한 필수 문장과 단어! 순도 100%! 그것만으로 이뤄진 것이 좋은 말이다.

    신선? 식상!

    셋째, 복고적이거나 현대적이거나. 복고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을 결합한 방식이 대체로 전달력을 높인다. 예컨대 사자성어와 ‘멘붕’ ‘아이고 의미 없다’ 같은 유행어를 섞어 말하는 것이다. 나이가 든 사람도 유행어 중 몇 가지는 안다. 청년층도 옛날식 표현이라고 다 모르진 않는다. 사례를 인용할 때, 표현을 차용할 때, 상대가 젊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은 채 옛날 표현만 써선 안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드라마 ‘밀회’를 패러디한 TV 프로 개그콘서트의 ‘쉰밀회’ 코너를 본 사람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20대에게 ‘고고장’은 이해 못할 외계의 단어일 뿐이다.

    넷째, 빌려서 쓰거나 만들어 쓰거나. 어떤 사람은 대중이 모르는 고전 명언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유식해 보일지언정 폭풍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반면 대중이 잘 아는 과거 사실이나 발언을 너무 자주 인용하면 많은 사람이 ‘아~식상해. 재미없어’ 할 것이다.

    신선도를 높이는 데는 신조어가 효과적이다. 신조어 창출이 쉽진 않다. 지난해 ‘관피아’를 시작으로 각종 ‘피아’가 언론 보도를 장식했다. 그 모든 피아가 공감을 유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반기에 들어 식상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다섯째, 더 나아가거나 덜 나아가거나. 지적할 때 또는 강조할 때 유의할 점이다. 센 단어를 써서 더 강한 타격을 할지, 신랄한 문장을 써서 한 꺼풀 더 벗길지 고민해야 한다. 반작용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반발을 유발할 수도 있고 역풍을 불러올 수도 있다. 멈춰야 할 지점을 잘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끝까지 나가면 속이 시원하긴 하다.

    그러나 감당해야 할 일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체로 적당한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 좋다. 노래 ‘썸’의 가사인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워딩 기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한국 사람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같다’라는 외국인들의 평가에 유의해야 한다. 할 말은 하되 표현 수위만 완화해도 불필요한 분쟁을 많이 줄일 수 있다.

    “나는 (멈칫) 니 아버지니까”

    내 말인 듯, 내 말 아닌, 내 말 같은
    이종훈

    성균관대 박사(정치학)

    국회도서관 연구관

    CBS 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 진행자

    現 아이지엠컨설팅(주) 대표, 시사평론가

    저서 : ‘정치가 즐거워지면 코끼리도 춤을 춘다’ ‘사내정치의 기술’


    여섯째, 말 하거나 말 않거나. 말을 너무 많이 하면 효과가 반감된다. 적은 단어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실은 무섭다. 대신 결정적 단어 앞에서 멈칫하며 침묵을 두는 것이다. 명연설, 명대사는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요즘 TV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서 아버지가 자주 그런 화법을 선보인다. 말 중간에 살짝 멈칫한다. 그래서 말의 함의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철없는 막내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가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 나는 (멈칫) 니 아버지니까.” 미친 화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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